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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산월기(山月記) / 이능(李陵)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늦기 전의 ‘성찰’에 관하여 - <산월기山月記>
“인생은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에는 너무도 길지만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너무도 짧은 것이다.” 어딘가에서 만났음직한 이 문장은 단편 <산월기山月記>에 등장하는 ‘이징(李徵)’의 목소리다. 그는 탄식한다. “나는 시(詩)로 명성을 얻으려 하면서도 스승을 찾아가려고도, 친구들과 어울려 절차탁마(切磋琢磨)에 힘쓰려고도 하지 않았다네. … 내가 구슬이 아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애써 노력해 닦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내가 구슬임을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리지도 못하였다.”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 때문에 “나를 망가뜨리고, 아내를 괴롭히고, 친구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 맹수가 되었으며, 비겁한 두려움과 고심(苦心)을 싫어한 게으름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탄식은 소설 속의 인물 ‘이징’의 것이다. 그는 남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인 데다 자신의 실력에 비해 너무 낮은 관직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 때문에 앙앙불락(怏怏不樂)한 인물이었다.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며 오로지 시 짓는 일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문명(文名)을 얻는 것이 쉽지 않았으며 궁핍을 못 이겨 다시 출사하였다. 그러나 예전에 우습게 여겨 상대하지 않던 자들이 내리는 위로부터의 명령을 견디지 못한다. 자존심의 상처를 다스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어느 날 발광하고 만다.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의 탄식은, 어느 날 같은 해에 진사시에 급제했던 친구를 조우하여 털어 놓은, 시인이 되지 못해 호랑이가 되어버린 가련한 사내의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불화는 깊은 것이다. 층위에 관계없이 불화의 결과는 타자를 향할 때가 많다. 맹수의 발톱처럼 날을 세우고, 말에도 각(角)을 세운다. 상처를 입힌다. 나의 불화와 불안을 상쇄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다소의 위안 끝에 자위(自慰)한다. 반복은 습관이 되고 굳어져서 타성(惰性)이 된다. 타성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타자에 관한 것이기도 하여 세상은 삭막하여지고 소통은 사라지게 된다. 모두 우리 안에 꿈틀대는 내부의 짐승 때문이다. <산월기>는 우리에게 성찰(省察)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너무 늦지 않게”를 주문하고 있다. 욕망과 불만, 수치와 분노의 그 어느 지점에서, 너무 늦기 전에 성찰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아츠시는 나이 열여섯에 세 번째의 엄마를 만나고, 천식을 안고 살았다. 서른세 살에 요절하였다. 그의 불우와 신열과 불면이, 인간과 인간의 절망과 또 다른 희망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낳았다. 큰 것을 꿈꾸거나 절망한 적이 있는 사람은 아츠시의 단편들로부터 성찰의 끈을 잡을 수 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을 누군가에게 호소하고 싶거나 산꼭대기 바위에 올라가 인적 드문 계곡을 향해 울부짖고 싶을 때 아츠시의 단편 안에 있는 맹수, 이징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만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스승이고 동시에 누군가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서문에 얹힌 신영복 선생의 말이다.
정진(精進) 끝에 다다른 목우(木偶)의 경지 - <명인전名人傳>
<명인전名人傳>의 이야기는 탄식과 성찰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줄거리가 이러하다.
조나라의 도읍 한단 땅에‘기창(紀昌)’이라는 이가 살았다. 천하제일 궁시(弓矢)의 명인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궁술의 진수를 배우기 전에 활의 명수 ‘비위(飛衛)’의 문하에 들어가나 자기 정진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마침내 그는 눈썹과 눈썹 사이에 거미가 집을 지어도 미동치 않으며 말이 산처럼 크게 보이는 감각을 터득한다. 5년이 걸렸다. 화살 1백 자루를 쏘는데, 첫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자 다음 화살은 먼저 번 화살의 오늬를 꽂고 그것을 반복하여 단 한 자루의 화살을 길게 일직선으로 연결시키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스승으로부터 “우리들의 기(技)는 어린아이의 놀음에 불과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의 자존심이 더 큰 스승을 찾아가게 한다.
산의 정상에서 만난 ‘감승(甘蠅)’이라는 노인은 눈이 양처럼 부드럽고 온화하며 수염 긴 늙은이였다. 의기충천한 기창이 화살을 메겨 날아가는 큰 철새 다섯 마리를 떨어뜨렸다. 감승은 그를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의 기암 위로 데려간다. 기창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발뒤꿈치에서는 땀이 흘러내려 시위를 당기지도 못하고 암반 위에 엎드리고 만다. 맨손의 감승은 “사(射)를 보여주겠네.” 하며 보이지 않는 활에 보이지 않는 화살을 메기고 보이지 않는 시위를 만월 모양이 되기까지 당겨 쏘았다. 깨알만큼 작게 하늘을 날던 매가 공중에서 떨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기창은 등골이 오싹하였다. 예도(藝道)의 심연을 본 것이었다. 불사지사(不射之射)의 경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기창은 노명인의 곁에서 9년을 있다 산을 내려왔는데 남에게 지기 싫어하던 예전의 예리한 표정은 자취를 감추고 목우(木偶)처럼 어수룩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스승 비위는 천하의 명인이 되어 돌아 온 제자를 알아보았고 세상은 눈앞에 펼쳐질 묘기를 기대하며 들끓었다. “지위(至爲)는 행하지 않는 것이고, 지언(至言)은 말하지 않는 것이고, 지사(至射)는 쏘지 않는 것이다.”하는 말을 남긴 기창은 일체 활을 손에 쥐지 않았다. 그러나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구름처럼 퍼져나갔다. 사심을 품은 자들은 기창의 집에서 사방 10정보(町步)를 떨어져 돌아다녔고, 현명한 철새는 그의 집 상공을 지나지 않았다. 명성 속에 그는 늙어갔다. 활의 명인은 활을 잊은 채, 감승 곁을 떠나온 지 40년이 지나 연기처럼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한단 땅에서는 당분간 화가는 붓을 멈추고 악사는 비파의 현을 끊고 장인은 줄과 자를 손에 쥐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천하제일 궁시(弓矢)의 명인이 이룬 예도(藝道)의 완성에 대한 예의였던 것이다.
‘기창’은 머뭇거리고 주저하였던 ‘이징’의 모습이 아니다. 나아간 것이다. 게으름을 벗은 영혼의 모색이 치열하다. 꿈꾸고 실천하여 벽을 넘어 이룬 것이다. 다만 성취한 그 어느 지점에서 거듭 나아가지 않고 물러난다. 인간의 것이나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그가 꿈꾸고 실천하면서 집요와 오만과 뜨거움을 보여 주나 도달한 그 어느 지점에서는 모든 것의 경계를 벗어버린다. 속인(俗人)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명인전>의‘기창’을 따라가면 개인의 노력이 도달할 수 있는, 인간적 성취의 최대치와 그것의 무의미함 사이에 우리는 놓이게 된다. 우리는 더러‘감승’, 혹은 ‘기창’의 모습을 갈구한다. 연기처럼 조용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본질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접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모습이 두려움과 외경(畏敬)으로 다가오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일상에 다소의 지혜를 얹어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본다면 인간은 삼가는 마음으로 들어설 수 있다. 잠시 붓을 들고 머뭇거리거나 흰 백묵 한 자루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높고 외롭고 쓸쓸한 것은 결과이다.
보라! 군자는 관을 바로하고 죽는 것이다. - <제자弟子>
<제자弟子>는 ‘자로(子路)’의 이야기다. 그는 13년간의 공자의 주유(周遊)를 호위한 고난의 동행자였다. 친구이기도 하고 비판자이기도 했다는 평이 있으나 공자가 “도가 행하여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나를 따를 자는 자로뿐이다.”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애제자였다. 그러나 자로의 삶은 그 성격만큼이나 순탄하지 않았다. 고전 주석이 빼곡한 소설의 이야기는 대체로 인간 자로의 삶과 일치하는 것 같다. 오래 스승의 곁에 있으면서 가장 치열한 모색으로 뜨거웠던 그는 공가(孔家)의 집사로서 위나라의 박 땅을 다스렸으나 그의 주인에 해당하는 ‘공회’가 묶여 위협을 받자 불 속으로 뛰어든다. 군중 속에서 “정의파는 망하지 않는다. 불을 질러라, 불을!” 하면서 격렬하게 싸운다. 적의 창끝이 뺨을 스치고 관의 끈이 끊어지면서 땅에 떨어진다. 그의 어깻죽지에 또 다른 칼이 박히고 피가 솟구쳤다. 쓰러지며 손을 뻗어 관을 줍고 머리에 쓰고는 재빨리 끈을 묶는다. 선혈을 뒤집어 쓴 자로는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절규한다. “보라! 군자는 관을 바로 하고 죽는 것이다!”그의 전신은 생선회같이 찢겨 죽었다. 그의 사체가 소금절임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공자는 저립명목(佇立暝目)하고 집안의 젓갈류를 내다 버리고 이후 일절 식탁에 올리지 않았다 한다.
자로의 뜨거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실(史實)에 무지하므로 소설만을 따라가면 자로는 본디 유협의 야인이었으나 문에 든 이후에 ‘한 마리의 소 구실’을 다하는 외곬성의 방패였다. 사(邪)가 번창해 정(正)이 무시당하는 뻔한 사실 앞에서 그는 비분을 누르지 못한다. “하늘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선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는 예는, 먼 옛날에는 모르지만 요즘 세상에는 들은 기억이 없다. 왜 그런가? 선을 이룬 데에 대한 보답은 결국, 선을 이루었다는 만족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스승의 불운과 방랑의 운명에 대한 불만은 세속적 수고와 오욕을 모두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고 말겠다는 신념이 된다. 그러므로 공자의 탄식은 천하창생을 위한 것이나 자로가 흘린 눈물은 공자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평생 공자 한 사람을 지키는 개노릇만으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결심을 한다. 그의 스승이 그의 순수함을 두고 “언제까지나 전혀 나이를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라 하며 우스꽝스럽게 생각하거나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의 뜨거움은 성정의 순수와 슬픔의 강도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스승을 몰라보는 시정을 향한 그의 아픔은 이러한 것이다. “소위 군자라는 사람이 나만큼의 분노를 느끼고도 그것을 억누를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훌륭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분노를 나만큼 강하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스스로 억누를 수 있을 만큼 분노를 약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의 불만을 들어보면, 다른 제자와 그는 다르다. 진나라의 영공(靈公)이 신하의 아내와 통정하고 그녀의 속옷을 입고 조정에 나아가 이를 모두에게 자랑해 보이자 설야(泄冶)라는 신하가 간언했다가 죽임을 당한 일이 있었다 한다. 한 제자의 질문에 답하여 공자가 설야를 두고, “설야는 영공과 혈연관계도 아니고, 또 지위도 일개 대부에 불과하지 않은가? 군주가 올바르지 않고 나라가 올바르지 않으면 깨끗하게 물러나야 하는데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구구한 몸으로 일국의 어지러움을 바르게 하려 하다니, 이는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함부로 버린 게야. 인은커녕 소동에 불과한 게지.” 질문한 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으나 자로가 그것을 잘라 말할 수 없지 않느냐는 투로 따지는데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유, 그대는 소의(小義) 속에 있는 훌륭함만을 보고 그 이상을 보지 못하는가? 옛 사대부들은 나라에 질서가 있으면 충성을 다해 왔으나, 나라에 도가 없으면 물러나 피했다네. 자네는 아직 출처진퇴(出處進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군.” 자로가 세상에서 중요한 것이 일신의 안전을 꾀하는 것인가, 몸을 버려 의를 세우는 것인가를 재차 묻자 스승은 “서둘러 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거든.” 하고 타이른다. 자로는 다른 제자들이 본능적으로 인정하고 마는, 스승의 말 속에 번지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을 최상이라 생각하는 경향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가 찌푸린 표정으로 자리를 뜨자 스승이 말한다. “나라에 질서가 있을 때에도 곧기가 대쪽 같더니 나라에 질서가 없을 때에도 역시 곧기가 대쪽 같으니, 저 아이도 위나라의 사어(史魚) 같은 부류의 인물이군, 어쩌면 심상치 않은 죽음을 당할지도 몰라.” 자로는 천하 만대의 목탁(木鐸)인 스승의 예언대로 죽고 말았다. 여전히 규각(圭角)을 가졌으나 인간의 관록을 보이기 시작한 자로가, 형식을 숭상하는 듯한 스승의 실행력에 불만족하며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서 죽고 말았다. 노나라에서 위나라의 정변 소식을 들은 스승은 “유(由)는 죽을 것이다.” 하였으며 그의 말대로 된 것을 알았을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의 스승이 그에게 부린 말을 물러난 자, 혹은 현실주의자의 말이라고 하면 속되다 할 것이다. 나는 가끔 <필통>에서 살아있는 자로들을 만난다. 그들의 숨결은 뜨겁고 가슴은 뛰고 있으며 눈은 한없이 맑아서 목소리에도 타협할 줄 모르는 투명함이 쟁쟁하다.(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삶이 그 어디의 불행한 곳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 뜨거움과 순수와 슬픔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로의 삶은 우리시대에도 여전히 감당하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주유하던 그들 스승과 제자는 은둔자로부터 “보아하니 손발로 수고하지 않으며 사실을 좇지 않고 공리공론으로 날을 세우는 사람 같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었다. “도가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도 도를 외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하는 자로의 음성은 소설 안의 이야기면서 우리시대의 것이기도 하여 여전히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단편 안의 인물들은 낱낱으로 존재한다. 개별적 이야기처럼 들린다. 게으름과 소통, 신독과 의미 있는 성찰, 정직과 순수를 살다간 사람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츠시의 단편들은 사람들을 종횡으로 엮으며 장편이 된다.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의 파노라마이며, 서사이며 역사다.
나는 아츠시의 책에 실린 마지막 단편 <이능李陵>에 관한 것은 미뤄둘까 한다. 그 안의 이야기는 좀 더 기다렸다 하고 싶다. ‘기마 없는 북정(北征)’에서 고군분투하다 적국 흉노에서 늙어 간 이능(李陵), 그를 변호하다 궁형(宮刑)의 치욕을 당하고 통분과 번민 속에서 최후의 울분을 자기 자신에게 쏟으려 했던, 그래서 기쁨도 흥분도 없이 그저 일의 완성에 대한 의지만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경지에 다다른 사마천(司馬遷), 상상을 뛰어넘는 곤궁과 결핍, 혹은 고독을 통해 이룩한 처참하고도 장대한 의지 소무(蘇武)의 이야기는 쉽게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은 역시 보고 있었구나” 하는 이능의 늦은 탄식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두려운 것이다. 지식인의 변명과 저항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의미있는 사실(史實)이며 전사(前史)를 이루는 것이다.
루카치는 그의 <역사소설론>에서 월터 스코트를 논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역사적 형상화, 즉 역사적인 ‘여기 그리고 지금’은 자못 심원한 어떤 것이라 전제하면서 역사소설에서 “역사상 중요한 인물들을 낭만적으로 기념비화 하거나 심리적이고 사적인 자질구레한 일들의 나락에 빠뜨리지 않는 수단을 발견했다.”고 하였다. 어찌 그것이 역사소설만의 이야기일까. 우리시대의 모든 것이, 만약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망각하지만 않는다면 그 가치는 굴곡을 지나 온전하게 계승되고 유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질구레해지지 않으려면 여기, 지금을 사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네루가 딸에게 준 감옥에서의 마지막 편지에서 인용하는 롤랑의 말, “행동은 사상의 종점이다.”, 혹은 “행동을 동반하지 않는 사상은 모두가 미숙아이며 변절이다. 만약 우리가 사상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행동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에 근접한 것이다. 여전히 두려움이 틈입하고 회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가 그 무엇인가를 무릅쓰게 된다면 높은 산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실 것이다. 그렇게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오래 서리나 안개가 감도는 축축한 의식의 골짜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언제 열릴지 모르나, 세상의 문을 열기 전의 나는 여전히 어두워하며 다만 읽은 것을 옮겨보고 싶었다.
원문이 있는 곳 : http://blog.hani.co.kr/sanmoon/25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