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100쇄 기념 에디션)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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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100쇄를 할 수 있을까? 100쇄 기념 에디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연하늘색 책이 예쁘게 배송되어 왔다. 장영희 그녀가 살아왔고 살아갈 기적을 담담히 펼친다. 이제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말이 필요 없는 영문학자이자 에세이스트 장영희 교수님은 13년 전 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나셨다. 교수님은 떠나셨지만 그의 글들은 이렇게 펄떡이는 생명력으로 100쇄까지 이어오고 있다. 2000년 내 생에 단 한 번 출간 이후의 샘터에서 연재된 글들을 묶은 책으로 서양화가 정일 님의 그림이 함께 실려 있다. 따뜻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체와 그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책은 아름답다. 그래서 더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를 일이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책은 1년의 미국 안식년을 지내면서 쓴 글과 투병 중 쉬었다가 일상생활로 복귀하면서 쓴 글, 연구 년을 포기하고 한국에 남아 있을 때의 경험을 쓴 글이다. 프롤로그에서는 투병 중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책의 내용에서는 자신의 투병 생활이 자세히 나오지 않아 그저 웃는 모습으로만 기억될 것 같은 느낌이다. 밋밋해서 심심한 일상을 마주하며 저자의 기적들이 내 삶에도 힘을 불어넣어 주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그래서 이 더운 여름날 내 마음속에 사는 도깨비들을 이리저리 아우성이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숨어 있는 3퍼센트의 좋은 생각이 있는지 나는 다시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 기쁘게 이 글을 쓴다.(p43)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도깨비가 산다고 말하는 저자는 이날 유독 글을 써야 하는 마감과 더운 날씨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 속에 있는 도깨비들이 아우성을 치며 동료 교수가 보낸 좋은 말 모음 메일에 하나하나 토를 달았다고 쓴다. 그러다가 마지막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섞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나쁜 생각이 있어도 3퍼센트의 좋은 생각이 우리 삶을 지탱해 준다는 말에는 수긍하고 말았다며 이어지는 문장이다.

마음속 도깨비를 묘사한 부분이 너무 수긍이 가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싶다거나 가발 쓴 사람의 머리를 벗겨 보고 싶은 충동에 대해 말했다. 나는 가끔 나를 앞질러 달리는 차를 뒤에서 밀고 싶다는 생각과 또각거리며 걷는 높은 하이힐의 여성을 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런 이야기들을 가끔씩 남편에게 하면 내가 이상하고 못된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 충동이 들어도 말하지 않았었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받았다. 또 3퍼센트의 좋은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그것도 마음이 놓였다. 90퍼센트의 좋은 생각이 아니라 고작 3퍼센트면 족한 것이다. 그 3퍼센트의 좋은 생각으로 무더위를 이기고 주방으로 들어가 가족들의 저녁을 준비한다. 저자처럼 기쁜 마음이 못내 되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가스 랜지에 불을 켠다. 훅하고 숨을 막는 열기를 느끼면서도 3퍼센트를 속으로 외친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말만 골라서 하고 침묵을 지키고 산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세상이겠는가. 가끔은 실없는 소리를 해서 웃기기도 하고, 화가 나면 혼자 누군가를 향해 욕도 해보고, 실속 있는 결과가 없더라도 잡답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세상 사는 재미 아닌가.

평소 말이 많은 저자는 목에 돌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3일 동안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접촉사고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말을 할 수 없으니 고스란히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 저자는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수다. 가르치는 일의 특성상 말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침묵에 대한 강조와 가치에 대해서는 위와 같이 말한다. 나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이전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tv나 영화를 봐도 이야기 하기를 좋아한다. 뉴스의 내용과 책의 내용도 나누기 좋아한다. 또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더라도 거의 내가 말을 한다. 말이 없는 침묵을 견디기가 어색해서 힘든 부분도 있고, 분위기를 좋게 해야 한다는 약간의 사명감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말로 인해 실수를 할 때도 있고, 오해를 사거나 마음 상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말을 줄여야겠다고 늘 다짐하지만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늘 마음속으로는 말이 많은 것이 약점이나 잘못처럼 인지되어 말이 많은 날은 괜히 위축되거나 힘들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저자의 말이었다. 물론 그 이야기의 끝에는 침묵보다 나은 말을 영혼과 마음이 전해지는 말을 해야겠다는 다짐도 나오지만. 아직 영혼까지 전달되는 말은 경험하지 못한 것 같다. 마음이 전해는 것은 다양하게 경험하지만. 굳이 말이 아니더라도 표정으로 눈빛으로 마음이 전달되는 감동도 느껴보았지만 영혼까지 전달되는 말은 어떤 말일까? 일상이 기적이 되는 마음과 눈이 되면 가능할까?


식사를 하던 도중 그 사람은 마치 당연한 일을 한다는 듯, 벌떡 일어나 회전 중인 선풍기를 자기 쪽으로 고정시켜 놓는 것이었다. 민숙아 이상하게도 나는 못내 그 선풍기가 마음에 걸렸다. 옆에 앉아 있는 네게 허락도 받지 않고 자기 쪽으로만 선풍기를 돌리던 그 사람이 왠지 불안했다. (P115)

아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평소의 사소한 행동들이 그 사람의 본성을 나타내는 거라고. 사소하지만 음식을 함께 먹을 때 수저를 놓는다거나, 물컵에 물을 채우는 일, 덥지 않을까 선풍기의 방향을 조정하는 것. 이런 것들이 그 사람의 평소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아직은 어린 두 딸들에게 흥분하며 일장 연설을 했다. 그것은 내속의 결핍으로 인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배려한 다는 것은 그런 것이라도 생각했다. 학교 다닐 때 똑똑하고 착하고 마음씨도 좋아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챙기던 민숙이라는 제자가 힘들어하며 저자를 찾아왔다고 한다. 제자의 무거운 발걸음과 못내 웃으며 씩씩했지만 돌아서던 뒷모습에 마음이 아파 편지를 쓴다고 저자는 말했다. 그 제자는 위의 선풍기 남과 채 2년을 살지 못하고 상처만 가득 남긴 결혼 생활을 정리했다고 한다. 그 후 늦었지만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가 남자를 만나 2살 아기까지 있는 상태에서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 상황들을 담담히 전하며 아기를 위해서라도 힘을 내 보겠다던 제자를 아무 위로도, 격려의 말도 하지 못했다고.

그러면서 결혼할 남자라고 소개했을 때 그 작은 신호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하고 있다. 누군들 알았을까? 상대가 그렇게 좋다고 하는데, 아끼는 제자를 향한 사랑으로 그 사람까지도 좋게 보려는 마음이 되는 것을.

딸아이를 둘이나 키우면서 나는 이런 상황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미리 고민을 한다. 내가 말린다고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나도 어머니의 그런 못마땅함을 무참히 내팽개치고 결혼을 했으니 뭐라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런 사람을 만나기 전에 내가 좀 더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과 아이들에게 잘 일러주어야지 하는 다짐뿐이다. 한참이 지난 이야기 속의 민숙이라는 사람이 지금은 행복하기를 바라본다.


맞다. 향기 없는 이름이 아니라 향기 없는 사람이 문제다.(p191)

자신의 흔한 이름인 영희에 대해서 말하고 마지막에 하는 말이다. 그래 이름에 향기가 있어서 무얼 하겠는가? 사람이 향기가 있어야지. 어젯밤 꿈이 아직도 선 면하다. 몸에서 냄새가 나서 밤새도록 목욕을 했었다. 함께 간 동료도 있었는데, 무슨 목욕탕이 시설이 엉망진창이라 제대로 씻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눈떠도 찝찝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꿈을 다시 생각해 보면서 냄새와 향기를 생각했다. 모든 사람에게 기분 나쁜 냄새와 좋은 향기는 과연 있을까?

향기라는 것도 상당히 주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을 좋아하면 평소 좋아하지 않던 향도 좋아지기도 하고, 아무리 비싼 향수라고 해도 그 사람이 싫으면 그 향기도 싫은 것이 되니까. 내가 샤워를 하고 나서 화장실을 사용하면 둘째는 꼭 향기가 좋다고 한다. 그러면서 엄마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똑같은 샤워젤을 써도 남편은 내가 씻고 나온 후에 환풍기를 돌리고, 냄새가 나서 싫다고 한다. 남편이 나를 싫어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그 향기를 싫어하는 것도 자신이 나에게 화가 났을 때 더 심해진다. 어느 날은 괜찮은 향기가 어느 날은 지독한 냄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문제이다.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가족들에게만이라도 좋은 향기로 기억되고 싶은 욕심을 부려본다.


이전에 읽은 책에서도 그랬지만 저자의 에세이는 소소한 일상들을 귀하게 엮어낸다. 제자들이 나오기도 하고,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나오고, 제자들의 과제와 노트들까지도 나온다. 스스로 활동 반경이 좁고, 사람들을 폭넓게 만나는 편이 아니라고 하는 저자는 누구나 경험하는 소소한 일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관찰에는 사랑이 있다던 그림책 작가의 말처럼 그녀의 에세이에는 대상들을 향한 감출 수 없는 사랑이 넘친다. 그 사랑을 사랑이라고 대놓고 말하지 않고, 은은하게 느끼게 하고, 맡아지게 한다. 그래서 그녀의 제자들의 안부가 궁금하고, 그다음 이야기들이 궁금하게 다가온다. 그녀의 사랑의 마음처럼 제자들의 삶이 좀 더 행복하기를 같이 바라보기도 하고, 지금의 모습도 기대와 궁금함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나도 조금 더 내 삶이 소중해지고, 굳이 성취와 성공이 없는 일상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조급하지 않다. 나만의 색깔과 향기로 나만의 삶의 잔잔한 물결들이 그녀를 통과하여 기적이 되는 느낌을 받는다.

당신의 일상은 너무 소중합니다. 당신은 더 소중합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조용히 건네주고 싶은 책이다. 그럼 그 안에서 사랑이 담긴 따뜻한 시선과 마음들이 자신을 어루만지는 기적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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