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
필립 퍼키스 지음, 박태희 옮김 / 눈빛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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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무렵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나 역시 인생의 황혼 무렵에 이러한 ‘니오타니(생물학적 성장이 끝났는데도 의식 안에선 호기심, 상상력, 장난치기,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의 욕구들 같은 초기 성장 단계를 여전히 밟아 나가며, 어린 시절의 감성과 환상들을 그대로 간직한 어른을 은유적으로 지칭하는 생물학적 용어)’가 가득하기를!

50여 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사진을 찍고, 가르쳤던 예술가이자 교육자였던 필립 퍼키스 교수의 단 한 권의 책. 경외감이 절로 드는 깊고 소중한 글이다. (나는 ‘눈빛’ 출판사 버전으로 읽었는데 이 책을 번역한 필립 퍼키스의 제자가 새로운 출판사를 설립하고 그의 작품집을 몇 권 더 소개했다.)

최근에 읽은 몇몇 저서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호리타우스(시학)는 예술가는 철학과 도덕을 공부해야 한다고 했고 알베르티(회화론)와 칸딘스키(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도 예술가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인성과 도덕성을 꼽았다. 스스로를 연마하고 끊임없이 인생을 성찰하는 자에게서 훌륭한 인품이 느껴진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겨울 하늘을 가르는, 헐벗은 나뭇가지를 스치며 날아가는 새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이 순간, 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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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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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기대 없이 갔던 브루클린 미술관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서 하루 종일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작품을 둘러보다가 방대한 컬렉션에 놀라고, 미처 몰랐던 19-20세기 미국 화가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미국의 역사가 궁금하거나 미국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겐 이 미술관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달빛을 소재로 낭만적이고 신비한 그림을 그렸다는 미국의 화가, 랄프 알프레드 블레이크록.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을 읽다가 처음 그를 알게 되었는데 내가 만약 이 책을 일찍 읽었더라면 브루클린 미술관에 갔을 때 <Moonlight>라는 그림을 가장 먼저 찾아보았을 것이다. 에핑이 포그에게 지하철을 탄 후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보고 오라고 했던 그림. 제목도 '달'의 궁전이고 작품 안에서 달이 상징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나는 폴 오스터가 소설의 필요에 의해 지어낸 가상의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브루클린 미술관의 소장품이었다니. 아쉽지만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달의 궁전>은 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진진하다. 주인공 포그가 어머니와 외삼촌을 잃고 빈털터리 신세가 되어 험난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때를 묘사한 초반의 에피소드들이 가장 재미있다. 굉장히 힘든 상황인데 작가의 유쾌한 묘사때문에 웃으면서 읽게 되는 아이러니.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조금 억지스럽고 황당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끝까지 '소설'답게 이어나가는 힘도 모두 소설가의 능력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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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0주년 특별판 - 수상 작가들이 뽑은 베스트 7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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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고 있다. 여성작가, 단편소설, 이북/오디오북 위주로. 쉽게 쓰여진 것 같은  소설도 있고 이런 것도 소설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작품도 있다. 그래도 읽을 때 마다 좋고 새롭고 자극이 된다. 최근 빠진 작가는 정지돈과 백수린. 정지돈은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는 구조와 그 재치가 마음에 들고 백수린은 이방인으로서의 감정을 세밀하게 드러내서 좋다.

요즘 한국 문학의 트렌드는 퀴어와 페미니즘인 것 같다. 우리의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 그동안 새로운 작가를 많이 알게 해 준 문학동네의 ‘젊은 작가상’이 벌써 10주년이 되었다. 기획이 참 마음에 들어서 매해 기다려진다. 새롭고 아름다운 단편을 더 많이 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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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뫼르소, 살인 사건 : 카뮈의 《이방인》,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카멜 다우드 지음, 조현실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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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이방인>은 ‘문체는 사람이다’라는 뷔퐁의 말을 증명한다. 간결하고 적확한,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그 문장들이 좋아서 읽을 때 마다 단숨에 빠져들게 된다. <뫼르소, 살인사건> 때문에 다시 읽은 <이방인>은 역시나 정교하고 완벽했다.

알제리의 저널리스트 카멜 다우드는 <이방인>을 토대로 그 이후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뫼르소, 살인사건>은 뫼르소가 살해한 아랍인 남자, 이름 한 번 등장하지 않는 그 희생자(무싸)의 동생 하룬이 오랑의 한 바에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뫼르소와 하룬, 다른 듯 닮은 두 남자의 운명과 일생이 두 작품 사이를 오가며 전개되는데 독백조이다 보니 중간 중간 잡다한 이야기가 많아 몰입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콩쿠르상을 수상하고 각종 언론의 찬사(종종 이것이 상술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를 받은 작품이지만 기대했던 것 보다 재미있게 읽지는 못했다. <이방인>을 뛰어 넘는 대단한 작품이길 바랐지만 결국 <이방인>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을 뿐. 

<이방인>과 비교하며 읽으면 재미있다지만 오히려 <뫼르소, 살인사건>은 지명, 전통, 역사 등등 생경한 아랍 문화에 대한 내용이 많아 타 문화권에 대한 나의 무지함만알 알게 된, 그래서 읽는 내내 반성하는 마음이 들어던 작품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곳에 살고 있지만 아무리 익숙해 져도 나는  나라를(아랍을, 또 다른 문화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반쪽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나도 이들에겐 무싸처럼 이름 없이 존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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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 열린책들 세계문학 3
알베르 카뮈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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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작은 섬에서 자란 뤽 베송은 자신의 예술적 영감은 어린 시절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눈부시게 새파란 바다 외에 아무것도 없던 그 때, 손에 잡히는 돌멩이는 상상하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소금기 가득한 바람을 맡을 때면 상상하는 그 어디든 갈 수 있었으리라. 아마도 이러한 유년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토록 아름다운 ‘그랑블루’는 탄생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결말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빨리 읽는 것이 아까워 밤 마다 한 챕터씩 아껴 읽은 <최초의 인간>. 

순수함 말고는 가진 게 없는 아이들 때문에 여운이 많이 남는 ‘어린아이의 놀이들’을 읽을 땐 그랑블루의 흑백 장면, 그러니까 자크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주인공 이름도 같네.) 자크가 되어 말하는 어린 카뮈의 유년은 장난 치던 기억 마저 슬프고 애틋해서 차라리 이것이 오직 ‘소설’이기만을 바라기도 했다. 

스물 아홉에 전사한 아버지, 장애가 있는 어머니 그리고 과거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라곤 목이 메이는 가난 뿐이었지만 그 결핍으로 일궈 낸 자크의, 아니 카뮈의 애잔한 생은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남았다. 비록 미완성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기억은 부자들의 기억만큼 풍요롭지 못하다. 자기들이 사는 곳에서 떠나는 적이 거의 없으니 공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고 그게 그 턱인 단조로운 생활을 하니 시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었다. 물론 가장 확실한 것은 마음의 기억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마음은 고통과 노동에 부대껴 닳아 버리고 피곤의 무게에 짓눌려 더 빨리 잊는다.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는 사람들은 오직 부자들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그저 죽음이 지나간 길의 희미한 자취를 표시할 뿐이다. 그리고 잘 견디려면 너무 많은 기억을 하면 못 쓴다. 매일매일, 시간시간의 현재에 바싹 붙어서 지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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