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밑줄을 쳐놓거나 페이지를 접어두곤 한다. 어제밤을 가득채워준 이 시집은 책 전체를 접어놓고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p49환절기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충농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