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섬
주제 사라마구 지음, 강주헌 옮김 / 큰나무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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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큼 알수 없는 존재는 없다. 하지만 난 그 미지의 섬으로 탐험할 용기가 없다. 때로는 내 몸에 생채기가 나는 것을 각오해야 하지만 두려움이 발목을 잡는다. 혹시 같이 떠나자는 사람이 있다면 발을 뗄 수 있을까? 난 아마 고개를 저을 것이다. 난 이기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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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부정
M. 스콧 펙 지음, 민윤기 옮김 / 김영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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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때 사회과 교육을 공부하면서 교수님이 포럼에 대한 수업을 하셨다. 이해를 돕기위해 실습을 권하셨는데 주제는 안락사였다. 대학새내기로 그리고 동기들 앞에 나서고 싶은 욕심에 발표를 맡기로 하고 안락사에 반대하는 입장에 나섰다. 그리고 다음날 안락사에 찬성하는 친구들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수업을 이끌어 갈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그 사건(?)을 자랑스러워했다.

영혼의 부정을 선택할 때도 그랬다. 안락사? 당연히 안돼는 일이지. 저자도 그런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흔들리고 당황스럽다. 내가 당황하는 것은 인간의 죽음과 삶의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단순하게 생각했었다는 점과 그것이 얼마나 무지한 모습이었는가를 깨달은데 있다. 나는 여기서 왜 안락사에 반대하는가를 얘기할 수 없다. 내가 얻은 것은 안락사에 대한 뚜렷한 의견이 아니다.

나는 이제서야 죽음에 대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을 뿐이다. 스캇 펙 박사는 어렵지 않은 말로 영혼의 문제와 삶, 죽음의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이제서야 진지하게 다가서기 시작한 사람으로서는 혼란스럽고 어렵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의 삶의 질의 문제를 나는 어쩌면 그리도 간단하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나는 어쩌면 나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영혼의 부정은 나에게 결론을 주었다기 보다 화두를 던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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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디드 - 혹은 낙관주의
볼테르 지음, 윤미기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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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는 낙관주의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캉디드를 집필한 듯 한다. 하지만 곳곳에서 보여주는 낙관주의에 대한 비판은 합리적인 이유를 든 것이라기 보다는 어린애적인 고집으로 우기고 있다. 이야기의 내용들은 우연과 우연으로 연결되고 낙관주의를 주장하는 팡글로스의 입장은 상당히 단순하게 묘사한다. 후반에 입장이 변한 캉디드와 팡글로스의 대립(?)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세계사 시간에 또는 철학 시간에 내내 졸지 않는 한은 한번쯤 들어본 볼테르의 철학 소설이라 거창한 마음으로 읽었지만 오래된 사상가의 사상은 현대에 읽기에는 다소 유치한 면이 있어보인다. 감히 평범한 사람이 위대한 철학가를 유치하다 말하디니 당돌하다 말할지 모르지만 레닌의 사상이 당시에는 혁명적이었어도 지금에는 그저 평범한 생각에 불과하듯 볼테르의 사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가 미친 영향은 컸을 지라도.

여러분도 캉디드를 읽을 때는 대단한 철학적 문제를 얻고자 하기 보다는 곳곳에 보이는 사람들의 순진함(바보스러울 정도로)과 익살을 즐기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게다가 볼테르가 부르조아적 입장의 한계점을 어떤 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를 찾는것도 색다른 즐거움 일것이다. 과연 어느 장면에서 그런 모습을 볼수 있는가? 한번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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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 혁명 -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교사의 기록
고니시 겐지로 지음, 서혜영 옮김 / 사계절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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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대학을 나올때 열정과 의욕에 차서 아이들 앞에 섰지만 나 스스로 생각해 볼때 그열정이 얼마나 정직했는지 물으면 고개를 숙일수 밖에 없다. 또한 교육이란 열정이나 의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게된다.

고니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대한 기본적인 자세는 믿음과 애정이었던 것 같다. 글을 통해 보여지는 아이들의 생활이나 그 글들에 하나하나 말을 달아주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믿고 사랑하는지가 느껴졌다.

가장 인상적이었던것은 학급에서 지배자 노릇을 하려는 학생에 대해 알면서도 성급히 다가서지 않고 아이들이 스스로 그와 같은 폭력에 대응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던 점이다. (나라면 아마 그날로 잡아다 혼을 냈을 거다.)

때로 교사들은 자신들이 자신의 교실에서 모든것을 다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고니시선생님은 그런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모두가 함께하는 학급을 이끌었다. 이야기 나누기를 통해 글을 통해 모두가 모두를 위하는 학급만큼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교육이 없는 것 같다.

이말은 우리 학급의 급훈이 되었다.
'모두가 모두를'
너무나 아름다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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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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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우리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지만 문화적으로는 상당한 이질감을 준다. 오히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미국의 문화는 그리 친근할 수가 없어서 추수감사절이나 할로윈 축제는 신기할것도 없고 마치 나도 오래전부터 해왔다는 듯이 바라보지만 일본의 마츠리를 보게 되면 그렇게 괴이해 보이고 신기할 수가 없다(설마 나만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왜그럴까. 일본이야 오래전부터 아시아에는 등돌린 상태라지만 우리는 왜 그렇게 일본을 낯설어 할까.

우리나라에서는 모두가 일본을 잘 안다고 말하지만 사실 알고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모습은 임진왜란과 일제침략기의 악랄한 모습뿐이다. ( 주로 우리가 당했을 때의 기억들) 그리고 거기에 반감이라도 사듯이 우리가 전해준것들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요즘 나는 일본에 대한 관심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여서 관련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있다. 하지만 모두들 어디서 모여서 같이 쓰기라도 했는지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거기서 느껴지는 일본은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이해할 수 없어 난감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국화와 칼을 읽고서 일본에 대해 아하하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집착하는 일제침략기의 피해자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색다르게 다가올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의 일본은 당시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그들의 후손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살수 있는 것은 우리의 선조로 물려받은 정신문화의 영향인것처럼 현대를 사는 일본인도 그들의 선조로부터 그러한 영향을 받았음은 자명하다. 이제 이 책을 바탕으로 지금의 일본을 알아야 할 때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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