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6
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5월
평점 :
절판


그들은 내게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미쳐버린 거야'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생의 참맛은 그런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걸'

책 커버를 넘기면 이 짧은 대화가 나온다. 이 간결한 대화는 자기 앞의 생을 압축해 놓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한 장을 넘기면 이제 어린 모모를 만날 수 있다. 누구보다 삶을 이해하는 아랍 소년 모모. 자신의 나이도 알지 못하는 이 아이의 삶은 참 힘들어 보인다. 엄마가 창녀란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자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모모는 창녀들의 아이를 맡아 주는 로자 아줌마 밑에서 자란다. 유태인인 로자 아줌마 역시 젊은 시절 창녀 였고, 나치의 탄압때 받은 트라우마를 떨치지 못하는 불쌍한 여인이다. 그리고 이 여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포옹하려는 이는 다름아닌 어린 모모이다.

서로 보듬고, 떨어질 수 없는 가족처럼 아줌마와 모모의 사랑은 특별해 보인다. 유태인 노인과 아랍 소년의 사랑은 벌어진 인종의 거리를 단숨에 불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엔 사랑 이상의 것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여장 남자인 룰라와 아프리카에서 온 친구들, 그리고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의 소중한 사람들이다. 하밀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빅토르 위고가 말해주듯 그들은 다름 아닌 작가의 레미제라블이다. 모모는 희망이란 언제나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사위가 시리고 힘들지만 그것이야 말로 어린 모모를 지탱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보호받아야 마땅할 나이의 아이는 환경 덕에 어른보다 더 성숙한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오물덩어리같은 세상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더라도 결코 질책하지 않는다. 가진 게 없는 아이가 삶을 살기 위해 터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모모의 작은 행동에 웃기도 하고 설움에 못이겨 울기도 하면서 책과 함께 했던 것 같다. 작가인 아자르 자신이 모모라고 했을 정도로 캐릭터가 섬세하다. 그래서 모모는 진짜 심장을 가진 아이처럼 느껴진다. 사실 뼈 아픈 성장기를 나열한 소설은 무수하다. 첫사랑의 한 순간을 도려내어 보여주었던 오즈의 줌치나, 모리슨의 푸른 눈동자, 상처 받는 아이를 전면에 내세웠던 기븐스의 엘렌등 힘든 선장기를 가진 아이들이 나온 소설은 나름대로의 정서와 감성을 지니고 고찰했던 소설들이다. 그리고 -자기 앞의 생-. 이 소설은 성장 소설인 동시에 작은 철학서이다. 읽는 내내 느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열살짜리 소년은 단지 몇분만에 열 네 살이 되지만 그 혼란스런 눈이 느끼는 감정과 고민들은 실존의 탐구이다.

그래서 그눈은 머리칼이 서른 다섯개 밖에 남지 않은 다 죽어 가는 95킬로의 노인을 아름답다고 말하기도 하고,(모모에 따르면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모든 것을 하나의 눈으로 볼 수 없다고도 말한다. 삶은 습관처럼 살기엔 너무 소중한 것이 많다. -자기 앞의 삶-은 바로 그것을 일깨워 준다. 알수 없는 미래를 살아간다는 것은 불안과 희망이라는 양면적인 스릴을 준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되뇌던 하밀 할아버지의 말을 절실히 느끼는 순간 모모는 그래서 스릴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떻게든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은 아이는 진짜로 성숙해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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