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이일훈, 불편함의 미학을 말하다
모형 속을 걷다 - 이일훈의 건축 이야기
이일훈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이일훈, 불편함의 미학을 말하다
모형속을 걷다 / 이일훈 지음 / 솔, 2005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셨던 다석 유영모 선생의 인간적 됨됨이를 보여주는 일화는 많다. 그 중의 하나. 유영모 선생은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 다니셨던 모양이다. 우리 중의 누가 그런 모험을 감행할까. 체력도 문제겠지만 시간 낭비도 문제겠다. 그러나 유영모 선생은 기꺼이 그런 불편을 감수하셨다. 오히려 그런 불편함 속에서 기계적 매카니즘에 묶이지 않은 대자유의 삶을 사셨는지도 모르겠다.

기술이 삶의 편익을 증진시킨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차가 있으니 발이 편하고, 식기세척기가 있으니 손이 편하다. 몇 천 자리 계산도 알아서 척척 해주는 컴퓨터가 있으니 머리가 편하다. '삼분카레'니 '삼분짜장'이니 하는 인스턴트 식품들, 캔만 따면 당장 먹을 수 있는 통조림, 세탁은 물론 다림질까지 척척해주고 심지어는 양말까지도 빨아주고 개켜주는 세탁소……. 이제는 돈만 있으면 홀아비들도 궁색함과는 안녕이다.

그러나 불편함을 무슨 훈장처럼 껴안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산악인들은 말한다.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던 고통의 크기가 그가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의 크기라고. 그들은 가장 험난한 시즌과 가장 험난한 코스를 택해서 에베레스트에 오른 자에게만 최고의 알피니스트라는 칭호를 준다. 헬리콥터를 탔다고? 첨단의 장비를 빌렸다고? 그대는 실격이다. 실격의 이유는 간단하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투의 과정이 중요하는 것!.

사랑의 행위는 또 어떤가. 사랑의 행위는 엎치락뒤치락하는 그 비효율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 <데몰리션맨>에서의 사이버섹스를 생각해보시라. 체액과 타액을 교환하지 않는 간편하고 산뜻한 사랑의 행위가 과연 사랑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일까. 사랑의 시간은 루즈타임과 연장전을 요구하는 법이다. <데몰리션맨>에서처럼 후다닥 기계적으로 성급하게 해치우는 사랑의 행위는 위생적이고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사랑의 심리학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어쨌든 편리와 효율은 기술개발로 이득을 보는 자들에게는 최고의 미덕일지 몰라도 피와 살이 도는 우리네 선남선녀들에게까지 능사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을 도드라지게 역설하는 건축가가 있다.

인천시 만석동에 위치한 저소득층 어린이 보금자리 '기찻길 옆 공부방'을 설계한 이일훈이 바로 그다.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 결손가정의 아이들을 돌보는 신앙공동체인 '기찻길 옆 공부방'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이 건물은 1998년말 만석동에 지어졌다. 건축주의 빠듯한 예산 때문에 일반 다세대주택보다도 적은 공사비로 지어진 연건평 45평짜리 이 작은 건물은 건축계의 젊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이끌어 낸다.

<행복이 가득한 집>류의 잡지를 뒤적이다 보면 은근히 부아가 난다. 그런 유의 잡지들이 말하는 행복은 광고가 말하는 행복의 모습과 닮은꼴이다. 물질의 소비만이 행복을 보장해준다. 행복을 원한다면 일단 구입해라. 광고는 은근히 우리 무의식을 강제한다. '부드러운 협박'이다. 여기에 손들면 끝장이다. 일단 일벌레가 되야 하고, 할말은 꾹꾹 가슴속에 쟁여놓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물질이 보장해주는 안락함에 동참하려면 있는 성깔 다 죽이고 고분고분해져야지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일훈은 좀 불편해지자고 말한다. '빈자의 미학'을 역설하는 건축가 승효상도 반갑지만 '불편의 미학'을 말하는 이일훈 또한 반갑기 그지없다.

승효상은 '빈자의 미학'을 말하지만 그의 건축에선 어쩐지 돈 냄새가 난다. 지나치게 세련되어 보이는 것도 어쩐지 마뜩찮다. '빈자의 미학', 논리로 보면 버릴 게 없지만 속내를 보면 왠지 찜찜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일훈의 건축에서는 승효상적인 세련미는 덜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네 건축의 주류적 마인드를 흠집 내는 어떤 거칠고 속 깊은 배포가 느껴진다. 그 '거침'과 '질박함'이 이일훈의 미학이다. 건축미학하면 흔히 가진 자들의 몫이었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일훈은 '기찻길 옆 공부방'에서 소규모 서민 공공건물에 철학과 미학을 스며들게 한다. 『모형 속을 걷다』(솔)의 거의 모든 페이지가 그런 철학과 미학을 말하는 데 바쳐진다.

이일훈은 동물의 집짓기를 예로 들면서 우회적으로 인간의 건축을 비판한다. 길지만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집에 대해서 부리는 과도한 욕심, 갖고도 더 가지려 하는 욕심, 살지도 않으면서 여러 채를 갖고 싶어 하는 욕심, 여기저기 경치 좋은 곳에 별장 짓고 살고 싶은 욕심, 더 크게 더 높게 더 화려하게 짓고 싶은 욕심, 결국 그런 욕심은 치장과 장식으로 나타난다. 장식도 일종의 기능이긴 하지만 필요 이상의 과도함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보기 위해서가 아닌 보여주기 위한 것, 보여주기의 속뜻은 우월감을 나타내고픈 속내이다. 종종 그것이 건축으로 표현되면 역겨운 졸부의 치졸함으로 나타난다. 과잉/과도가 낳는 그 우스꽝스러움.

바로 그 우스꽝스러움이 '세계 제일'이니 '동양 최대'니 하는 화려한 수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우스꽝스러움이 대리석으로 발림이 된 '무늬만 르네상스풍'인 국적불명의 건축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보여주기 위해서 지어진 건축물에 침묵과 겸손이 깃들 여지는 없다. 엄청난 규모로 지어진 교회의 건축물에 신비가 깃들 여지는 없다. 신비가 없는 곳에 침묵이 있을 리 없다. 이 시대의 건축은 이 시대의 종교를 닮아간다. 그리고 이 시대의 종교는 이 시대의 화두인 자본을 열심히 따라간다. 침묵이 사라진 곳에 여지없이 번쩍거림의 광택과 소음이 들어선다.

이일훈이 설계했다는 '자비의 침묵' 수도원은 그가 말하는 '불편의 미학'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현해준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는 넓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일훈의 생각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자비의 침묵' 수도원의 통로를 설계한 이일훈의 말이다.

복도가 넓으면 지나는 걸음걸이가 빠르고 빠름은 사람끼리의 예의를 소홀히 여기게 만든다. 서로 간섭 없이 스쳐갈 수 있는 넓은 복도는 언뜻 여유로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관계에서는 외면/소외를 조장하는 악덕의 동선이다. 서로 마주치면 한 사람이 비켜서야만 둘 다 지나갈 수 있도록 복도를 아주 좁게 만들자.

좁은 복도에서 서로 마주치면 후배가 양보하면서 비껴 설 것이고 바로 그 비켜서는 데서 예의와 공경이 묻어난다는 것이다. 서로 먼저 가라고 양보하는 사이에 겸손이 배는 것이니, 겸손을 미덕으로 지키는 수도원에서는 좁은 통로가 알맞춤이라는 말이다. 모든 복도를 좁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불편의 미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건축에서의 공간설계는 그 건축물이 상징하는 정신까지를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공간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것까지야 타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는 일상적 삶을 초월하는 데에 그 속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초월의 의미를 간단히 방기해버리는 우리의 건축문화에 대한 그의 일갈은 아프게 음미해볼 만하다.

아무리 노자연하고 공자연해도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구복이 웬수'이고 보니 그런 건축가도 없다. 그는 "냉혹한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사회적 기능과 미학적 성취를 동시에 이루는 건축가들은 존경받을 만하다."라고 말한다. 주판알을 퉁기다 보면 이념이 뒷전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다. 자재비와 인건비도 제때 지급해주지 못하는 판에 철학이니 미학이니 따지는 것도 한심하다. 이일훈도 여느 건축가처럼 현실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박한 도시에 신중한 건축 드물고 기품 있는 공간 속에 비로소 기품 있는 생활이 따른다."라고 주장하는 그가 돈이 되는 만큼만 대충 지을 사람은 아니다.

동선(動線)은 짧아야 한다, 집은 한 덩어리로 지어야 한다, 공용면적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규범화된 건축양식을 그는 거부한다. '조금 편하자고 많은 것들을 잃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편하게 살기'의 철학이 그가 말하는 '채나눔'의 논리다. 채나눔'은 이일훈이 일관되게 고집해온 건축형태다. "집은 작을수록 공간을 나누고, 한 가족일수록 적당히 떨어져 살아야 한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공간이 좁다고 집을 한 덩어리로 만들면 햇빛이 한쪽에서만 들어와 집 전체가 어두워지지만, 채를 나누면 나눠진 면은 모두 남향이 되어 채광과 통풍, 환기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파트 같은 거실 중심의 획일적인 실내구조는 친부모라 해도 두 세대가 함께 살기에는 불편함이 따르는데 비해 채 나눔을 한 집에서는 사적인 공간을 침해받지 않고 동선이 길어져 가족 간의 충돌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는 주장이다. 바로 그런 주장의 연장선상에 그가 설계했다는 자비의 침묵 수도원, 도피안사 향적당, 천주교 우수영공소 등의 종교용 건축물과 BK메디텍 본사 및 공장, 문학과지성사 사옥, 나루터 공동체, 기찻길 옆 공부방 등이 있다.

일전에 아스카 문화의 중심지라는 나라현으로 일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서의 문화적 충격을 나는 어떤 일간지에 다음과 같이 소개한 적이 있다.

울긋불긋한 도시의 간판들은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끌기 위해 안달이다. 행인들이 어떤 미적 취향을 가지고 있느냐는 관심 밖이다. 오직 강렬한 빛깔로 행인들의 시각을 사로잡겠다는 의지 하나로 도시의 간판은 번쩍거린다./ 관광지라고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한적한 여유를 누리고 싶다는 소망은 관광지의 입구에서부터 여지없이 깨어진다. 노래방, 음식점, 모텔과 각종 위락시설들이 끊임없이 소음을 생산해낸다./ 침묵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고, 여행은 침묵을 찾으러 가는 시간이다. 소리도 침묵하고 빛도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를 생각한다. 그러나 번쩍거리는 간판으로 눈은 고역이고, 호객의 외침으로 귀 또한 고역이다. 백 번 양보해서 장삿속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더 큰 문제는 시설물들이 주는 시각적 공해다. 시멘트를 나무처럼 보이게 하여 글씨를 판 안내문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고, 사찰입구의 유럽식 가로등도 우리네 한심한 미의식을 증명해준다. 새로 건축한 건물들은 주변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튀는 느낌을 준다./ 일전에 일본 나라현의 동대사(東大寺)를 다녀온 적이 있다. 커피를 마실까 해서 동대사 입구에 있는 자동판매기를 보니 나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거참, 신기하군 하는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서 보니 자동판매기의 표면을 나무로 덧내어 놓았다. 자동판매기의 생뚱맞은 빛깔이 사찰의 고색창연함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미학적 판단에서 비롯된 발상이었다. 배울 건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한복에 하이힐을 신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복엔 고무신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네 미학적 판단이다. 미학은 학자들의 학술적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네 쾌적한 감각을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모형 속을 걷다』에서 만난 이일훈의 이런 구절이 아마도 그가 '우리편'임을 확신하게 했을 것이다.

시간의 흔적을 거부할수록 빛나는 것은 소위 보석이나 귀금속 종류이다. 그것들은 녹슬면 안 되고 퇴색하면 가짜이지만 건축 배료는 시간이 지나 갈수록 퇴락하고 변형되며 상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노후된 건축물을 고치고 새로 짓는 것이다. 오히려 시간 따라 변해가는 그 푸석함을 즐기는 것이 건축의 참맛을 아는 것이다.

그의 시선을 빌어 우리네 건축을 보라. 경복궁에만 가도 울화가 치민다. 이일훈의 책,『모형 속을 걷다』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의 책을 빌어 우리네 건축물을 보는 일은 울화가 치미는 일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축물은 무너지지도 않고 우뚝 서있다. 시각적 폭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선인들의 미학이 아니다. 어떡해서든 자본을 증식시키고야 말겠다는 자본의 확장 논리다. 그 자본의 제국주의적 논리 앞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논리는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얼빠진 인문주의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빈축을 언제까지 사야 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우리의 풍경은 '자본의 풍경'이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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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신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영역
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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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이 상상력이다. 아이들은 뭉게구름에서 호랑이와 토끼의 형상을 읽는다. 존재하는 구름에서 존재하지 않는 호랑이와 토끼를 만들어내는 것이 상상력이다. 일상은 존재하는 것의 영역이다. 그러나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상상력의 영역이다.
 
『신화의 힘』의 저자, 조셉 캠벨은 말한다.
 
자동차는 벌써 신화가 되었어요. 이미 우리의 꿈이 되었으니까요. 이제 비행기도 우리의 상상력을 섬기는 존재가 되었어요. 가령 비행기가 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새가 상징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지요.
 
조셉 캠벨은 신화는 인간의 꿈이 구현된 것으로 본다. 단군신화에서의 웅녀의 곰으로부터의 인간으로의 변모 또한 삶의 질적인 변환을 소망하는 인간의 꿈이 구현된 결과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성춘향의 결합, 심청전에서 심봉사의 개안(開眼), 모두 현실에서는 달성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달성되기 힘들다 해서 인간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도저히 물리적인 힘으로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낸다. 바로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진 현실이 곧 환상이다.
 
조셈 캠벨은 말한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예전에는 대학의 캠퍼스 하면 일종의 철저하게 열린 사회였지요. 그래서 내면적 삶이, 우리가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분들, 말하자면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불릴 수 있는 분들인 플라톤, 공자, 석가, 괴테 등 우리 삶의 중심과 관련된 영원한 가치를 좇으라고 한 분들에 대한 관심과 상충되지 않았어요. 나이를 먹어 나날의 삶에 대한 관심에 심드렁해지면, 사람은 내면적 삶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 내면적인 삶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 참 곤란한 일이지요.(중략) 우리는 바로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조셉 캠벨은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일상적인 일들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내면적 삶에 눈을 돌려야 하며, 신화는 내면적 삶의 지표를 제시해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일상적인 것에 매달려 있다. 어떻게 하면 성적을 올릴까,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을 얻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지위에 오를까를 고민한다. 이 일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라는 것이 조셉 캠벨의 충고다.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하면 성적을 올릴까 하는 고민은 일상적이고 외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진정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고 묻는 것은 성장의 본질을 묻는 지극히 내면적인 물음이다. 신화는 그 내면적인 물음에 지침을 준다.
 
성경은 예수의 신화를 기록한 책이고, 불경은 석가모니의 신화를 기록한 책이다. 그 책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진정한 행복과 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말해준다. 그러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사, 곰이 변하여 웅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라. 신화는 일상의 논리로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신화를 ‘사이비 진술’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처녀의 몸에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은 육체의 삶의 시작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인 태어남을 상징한다는 것이 조셉 캠벨의 설명이다. 그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이라고 조셉 캠벨을 덧붙인다.
 
조셉 캠벨은 신화가 고통의 의미를 가르친다고 말한다.
 
살면서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곰이 웅녀가 되기까지의 시련,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의 시련,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기까지의 시련....한 인간이 고통과 대면하여 그것을 어떻게 초극하는가를 웅장하게 보여준다.
 
『축제와 문명』의 저자 장 뒤비뇨는 말한다.
 
축제 때는 용인되었던 모든 기호들이 변조되고 뒤집어지고 파괴되며, 쾌락 속에서 혼미스러우면서도 즐겁게 신과 인간, 신과 나 사이의 짝지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축제 때는 용인되었던 모든 기호들이 변조되고 뒤집어지고 파괴’된다는 구절을 학교 축제의 예를 들어 주목해보자. 학교 축제에서 선생님들을 풍자하는 연극을 연출했다고 하자. 그 연극에서 선생님이 학생역할을 맡고 학생이 선생님의 역할을 맡았다고 하면 연극의 상연장은 완전히 웃음바다가 될 것이다. 교사의 권위는 연극을 통해 풍자와 해학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바로 이것이 뒤비뇨가 말하는 ‘모든 기호들이 변조되고 뒤집어지고 파괴’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파괴는 파괴로 끝나지 않는다. 축제를 통하여 우리의 일상은 다시금 활력을 얻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축제의 비일상성은 이렇게 우리의 일상에 반성적인 활력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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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사랑의 단상
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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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슨 일이세요? 당신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군요"
  --아니예요, 전 행복해요, 하지만 슬퍼요.
              -- 메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중에서  

 라디오를 틀어놓으면 채 십분이 되기도 전에 우린 사랑을 운운하는 수많은 노랫말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담론의 양적인 결과에 비해 그 실질과 내용은 왜소해 보인다. 사랑의 담론이 이렇게 부실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그것들이 삶과 사물에 대한 사려 깊은 통찰과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의 자기 증식 원리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마아케팅 차원에서의 사랑의 담론은 시장의 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을 채 가지기 힘들다.

 통속적인 사랑의 담론들이 범람하고 있다.통속적이라는 것은 무반성적이라는 것이다. 대중들은 사랑의 담론들을 기계적으로 수용한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아주 미세한 뉘앙스가 결여되어 있다. 연인들이란 지극히 섬세한 어떤 것들을 쉴 사이 없이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랴. 하나하나의 느낌들이 극도로 민감해지는, 그래서 쉽게 깨어지기 쉬운 영혼들, 바로 그들이 우리가 연인들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이 아니랴.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에서 비롯된다'라고 작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이 책의 문체는 롤랑 바르트를 마르크스주의자, 구조주의자 라는 기존의 인식틀에서 제외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대단히 아름다운 산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미리 이데올로기화, 정치화 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저 깊이 느낄 자세만 갖추면 된다. 약간의 심호흡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역자 김희영은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이게 된  이 사랑의 담론을, 상상적인 것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의 자리를 제공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라고

 이 책은 그러므로 기특한 책이다.

 남들에게 공개하기 아까운, 그래서 혼자 몰래 간직하고 싶기만한 이 책을 열어 보자. 이 책은 제 몸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를 열어 우리와 대화하게 될 것이다.나는 내가 밑줄친 그곳을 열어 보이겠다.(바슐라르 읽기에서 고정된 나의 이런 어투는 고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약간의 주석을 달겠다. 그 주석들은 언제나 그 책들이 나에게 촉발시킨 몽상과 사유의 흔적들이다.

 참고로 이 책은 괴에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대상으로 행해진 강의의 결과임을 밝혀두자. 이 책엔 치열한 사랑의 담론들이 등장한다. 그것의 대부분은 베르테르의 담론이다. 하지만 더 정확히는 사랑을 하는 모든 연인들의 담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의 담론이다.

               # 표시는 본문의 내용 그 아래는 감상적 주석

  #장미빛과 신비로운 푸른빛이 어우러진 어느날 저녁, 우리는 하나의 유일한 섬광을 교환하겠지. 모든 것은 긴 오열처럼 작별 인사로 가득한 채   ---보들레르

 그와 내가 나누는 섬광은 무엇일까? 입맞춤, 아니면 어떤 느낌의 홍수, 아니면 부딪히는 눈빛들, 눈물에 반짝이는 불빛들....

  #죽음을 사랑하는 것일까? 키츠의 말처럼 반쯤은 그런 마음도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편안한 죽음을 반쯤은 사랑했거니 half in love with easeful death) 죽는 것으로부터 해방된죽음. 나는 이런 환상을 해본다. 내 육체의 어느곳에서도 피가 흐르지 않는 부드러운 출혈, 채 사라지기 저에 고통을 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계산된 거의 즉각적인 소모. 나는 잠시나마 죽음의 뒤틀린 상념 속에 머무른다.

  어떤 구렁텅이에 빠지고 싶은 열망이 사납게 가슴 속에서 자라난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격렬한 감정들. 즉각적으로 소모되고 싶은 이상한 충동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선 삶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가 매우 부조리한 존재임을 말해준다. 사랑 속에서 사람들은 부조리하다. 아픔의 본질은 그 부조리에 있다. 부조리를 넘어서려는 이성의 안간힘은 창백한 얼굴을 가진다. 그 창백함을 바라보는 존재는 초라하면서도 그 부조리함을 견디는 존재는 한편으론 위대하다.

 #그의 천직은 철새, 사라지는 자이다. 그런데 사랑하고 있는 나의 천직은 그 반대로 칩거자, 그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않고 미결 상태로 앉아 있는, 마치 역 한 구석에 내팽개쳐진 수화물마냥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 앞에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그 사람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과연 나를 위해 행복한 처분을 내려줄 수 있을까. 스스로 팔 뻗지 못하는 그런 기다림의 수동성이 존재를 달뜨게 한다. 다가설 수 없음이 부재를 향하여 맹렬하게 손을 뻗친다. 그의 부재가 확실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기다림의 자리는 뜨겁다.

 #하나의 단어가 육체로부터 우러나와 부재의 감동을 말해준다.즉, 갈망하다란 단어가...입김을 불 때마다 그 불완전한 입김이 서로 상대방의 입김에 섞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두 개의 이미지를 하나로 녹이는 것으로서의 포옹의 이미지. 그러나 사랑의 부재에서의 나는 서글프게 누렇게 메마르고 오그라든, 떨어진 이미지이다.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다. 이 존재의 감옥에서 나는 행복한 유폐자다. 그러나 '행복한'이란 말은 한정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아픈 행복이기에. 사랑의 찰과상이 주는 아픈 행복들.

 #일생을 통하여 나는 수백만의 육체와 만나며 그 중에서 수백개의 육체를 욕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백개의 육체 중에서 오로지 나는 하나만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말해준다...수많은 사람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우연과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필요했던가. 

 사랑엔 멀티태스킹이 있을 수 없다. 내 욕망은 놀랍게도 오직 하나만을 요구한다. 둘은 희미하다. 오직 하나만이 강렬하다. 하나는 둘보다 강하고, 셋보다 격렬하다. 나는 무리중에서 오직 그만을 구별해낸다. 하나가 없는 모든 다수는 안중에도 없다. 그를 돌려다오.

 #나는 내 광기의 유일한 증인이다. 사랑이 내게서 노출시키는 것은 에너지이다.
 
 나는 타오르는 나를 본다. 그 불이 나를 바라보는 나의 눈길마저 태운다. 롤랑바르트는 말한다. '왜 지속되는 것이 타오르는 것보다 더 낫다는 말인가?'  이성은 정열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그런 우열이 정당한가?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그 앞잡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과 욕망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연인들은 현명해질 수 있을까? 욕망은 대상을 수중(手中)에 두려고 한다. 대상이 저항할 때, 그 저항이 불가항력적일 때 욕망은 스스로를 자학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나는 인생을 헛되이 살았다고. 그때 욕망의 큰구렁에 자학의 늪이 고인다. 욕망은 단지 큰구멍이다. 거기에 무언가를 채워야만 욕망은 편안하다. 그러나 그 구멍은 점점 둘레를 넓혀 간다. 욕망은 확장적이다. 더 깊은 곳을 찾아서 손을 뻗친다.

 #자신의 불행을 재현함으로써 그를 감동시키려 할 때,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징계하는 어떤 고행의 행위를 시도한다.(생활방식이나 옷차림 등에서)

 그는 격렬한 동작으로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는 세상을 버린 듯 멀리 있는 것들, 천문학과 해양학에 몰두하기도 한다.그는 은둔자처럼 허름하게 옷을 입기도 하고 그녀는 머리를 자르고 평소에 입지도 않던 스커트를 입기도 한다. 도발적으로, 그녀는 태우지도 않던 담배를 입에 문다. 그들은 변화하고 싶은 것이다. 표면의 변화가 내적이고도 화학적 변화를 가져오기를 갈망하고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세계가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그들의 행위엔 하염없는 융합에의 욕구가 스며 있다. 세계가 변화하여 그와 내가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는, 그 터무니없는,불가능을 꿈꾸는, 슬프고도 미묘한, 달콤쌉싸름한 초콜렛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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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토성의 영향 아래(1)

 

 

 

 

'토성의 영향 아래(Under the Sign of Saturn)'는 작년말에 세상을 뜬 수잔 손택(1933-2004)의 신간 <우울한 열정>(시울, 2005)의 원제이면서 책에 실린 '발터 벤야민'론의 제목이기도 하다. 소설가이자 비평가이기도 한 이 전방위 지식인이 특히 빛을 발하는 것은 에세이들을 통해서인데(에세이의 한 전범을 보여준다), <토성의 영향 아래>(1980)는 <해석에 반대한다>(1966)와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1969)에 뒤이은 세번째 에세이집으로서 1972년부터 1980년까지, 그러니까 40대 중년의 손택이 쓴 에세이 7편을 묶은 책이다. 그녀는 이러한 에세이 30쪽짜리를 쓰기 위해 (믿거나 말거나) 수천 페이지를 쓴다고 하는데, 그 '열정'이 경이롭다(동시에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우울한 열정>의 속표지에는 근간예정으로 손택의 또다른 에세이집과 소설들도 거명돼 있는 걸로 보아 이대로라면 조만간 '손택 전집'이라도 갖추어질 듯하다. 나는 그녀의 다른 책들을 현재는 품절된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을 제외하곤 모두 갖고 있다. 하니 나름대로 손택을 읽을 준비는 돼 있는 셈인데,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읽은 몇 편의 에세이들보다 이번 <우울한 열정>에 실려 있는 에세이들이(아직 다 읽지 않았지만) 더 편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거꾸로 읽어나가야 할 모양이다.   

책을 열면, 처음에 '조지프 브로드스키에게'란 헌사가 나온다. 두 페이지 뒤에 가서 브로드스키에 대한 역주가 나오는데, 'Joseph Brodsky'(1940-1996)는 '러시아 태생의 미국망명시인'이다. 그의 이름은 러시아어로 '이오시프 브로드스키'라고 읽으며 국내에도 그렇게 소개돼 있다. 198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러시아에서는 1990년대 이후에 소개되어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러시아 시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된다), 국내에서 브로드스키의 책들이 번역돼 나온 건 물론 그 수상을 계기로 해서이다.

예컨대 <소리없는 노래>(열린책들, 1987), <겨울결혼식>(정음사, 1987), <20세기의 역사>(문학사상사, 1987) 등의 시집과 에세이집 <하나반짜리 방에서>(고려원, 1987), 희곡인 <대리석>(한마당, 1987)까지 앞을 다투듯이 나왔던 것. 역주에서 '하나도 채 못되는(Less than one)'이란 옮겨진 것이 <하나반짜리 방에서>이며 안정효 번역이다(다른 역자에 의해 <하나도 채 못되는>(성원, 1987)이란 번역서도 나왔는데, 실물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안정효의 책과 원저를 갖고 있다). 원저(1986)가 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인 걸 고려하면 국역본은 발췌역이겠다. 

 

 

 

 

시집이 여러 권 번역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브로드스키를 읽고 감상한다는 건 먹다 남은 가시만 가지고 생선의 맛을 음미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넌센스에 가깝다(브로드스키의 성탄시 한 편에 대해서 나는 '모스크바통신'에서 자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 러시아시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일찍부터 영시에도 조예가 깊었던 브로드스키는 특히 존 던을 애송했었고, 미국 망명 이후에는 로버트 프로스트에 바치는 시들을 쓰기도 했다. 지난 2002년에는 그가 쓴 영시들이 (사후)출간되기도 해지만, 러시아시만큼 평가받는 것은 아니며 그의 본령은 역시나 러시아시이다. 하지만, 에세이스트로서 그의 명성은 언어에 구애받지 않는데, 손택과의 교분은 그런 배경하에서 이루어진 듯하다(브로드스키에 대한 에세이도 손택이 썼음 직하다. 한번 찾아봐야겠다!).  

어쨌거나 생각난 김에 브로드스키의 시 한편을 옮겨놓는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시이며, 노벨상 수상 기사와 함께 언론에 게재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겨울 물고기>. 좀 드문 일이지만, 이 시는 우리말 번역으로도 시가 된다.

겨울 물고기

물고기는 겨울에도 산다.
물고기는 산소를 마신다.
물고기는 겨울에도 헤엄을 친다.
눈으로 얼음장을 헤치며,
저기
더 깊은곳
바다처럼 깊은곳으로.
물고기들
물고기들
물고기들
물고기는 겨울에도 헤엄을 친다.
영원히 같은
물고기 방식으로.
물고기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얼음덩이속에 머리를 기대고
차디찬 물속에서
얼어붙는다.
싸늘한 두눈의
물고기들이
물고기는 언제나 말이없다.
그것은 그들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고기에 대한 시도
물고기처럼
목구멍에 걸려 얼어붙는다. 

아직은 11월이고 '가을 물고기'의 목구멍은 아직 멀쩡하기에 계속 떠들어보기로 한다. 여하튼 손택이 <우울한 열정>을 브로드스키에게 헌정하고 있다는 말씀이고, 엊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나는 책에서 세편의 에세이를 읽었다. '폴 굿맨에 대하여' '토성의 영향 아래' '바르트를 추억하며'. '폴 굿맨'은 손택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 가운데 내겐 가장 생소한 이름이었는데(내가 아는 '좋은 사람'은 '넬슨'밖에 없다), 그의 부고를 듣고 쓴 '폴 굿맨에 대하여'(1972)에서 그녀는 그가 자신의 '영웅'이었음을 열정적으로 고백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손택에 따르면, "D. H. 로렌스 이래로 여어를 그만큼 설득력 있고 진실하고 독창적으로 구사한 사람은 없다."(18쪽)

그런 그와 손택은 친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녀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그를 싫어했다. 이유가 (이해할 만한) 가관인데 "그의 생전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소연하곤 했듯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 그럴 만했던 게 "폴 굿맨은 원래 여자를 인간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나중에 그 자신이 터놓고 고백한 바대로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다. 해서 손택의 사랑은 일방적인 짝사랑일 수밖에 없었던 것. 아무려나 이 에세이를 읽은 독자라면 '폴 굿맨'이란 이름을 쉽게 잊어먹지 못할 것이다.

 

 

 

 

'바르트를 추억하며'(1980)는 풀 굿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르트의 부고를 듣고 쓴 에세이이다. 짤막한 분량이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초상을 생생하게 스케치하고 있다. 그리고 바르트 정도라면 내게도 낯설지 않다. 청년시절 병약했던(폐결핵을 앓았다) 바르트가 첫 책을 출간한 것은 37살의 일이니까 우리 기준으로도 좀 늦깍이이다. 하지만 "뒤늦게 출발한 뒤에는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많은 책을 썼다." 특별히 손택만의 의견이랄 건 없는데, 하여간에 "그는 무엇에 관해서든지 간에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것 같"은 지식인이었다.

젊은시절에 바르트는 지방 극단에서 연기도 하고 연극비평도 했다. 거기서 비롯된지 모르지만, 그의 아이디어들을 극적이었다(His sense of ideas was dramatugical). "프랑스의 지적 무대에 스스로를 올리면서 그는 전통적인 적에 반기를 들었다. 그것은 플로베르가 '기성관념'이라고 불렀고 '부르주아'적 감성이라고도 알려진 것, 마르크스주의자가 허위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사르트르 추종자들이 '나쁜 믿음'이라고 맹렬히 비난한 것, 고전 연구로 학위를 받은 바르트는 '최근 의견'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134쪽)

 

 

  

 

플로베르의 '기성관념'(received ideas)은 <통상관념사전>(책세상, 2003)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르주아적 감성'은 부르주아적 멘탈리티를 가리키고 마르크스주의에서의 '허의의식'이란 말 그대로 '이데올로기'를 지칭하겠다. 사르트르의 '나쁜 믿음'은 흔히 '자기 기만'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바르트의 '최근 의견'이란 건 그리스어 'doxa'의 번역으로(예전엔 '억견'이라고 번역했다) 'current opinion'이라고 병기된 걸 참조한 듯하지만 오역에 가깝다. 근거 없는 믿음을 뜻하므로 '통속적인 의견' 정도가 어떨까 싶다. 어쨌든 그러한 '우상들'에 대한 바르트의 공격은 <신화학> 혹은 <현대의 신화>(동문선, 1997)로 묶여나왔다. 

"바르트를 매혹한 것은 정신적 분류학이다"라고 손택은 진단하는데, 구조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초기 바르트의 세계가 특히 그에 해당한다. "그는 문학에 대해 말하는 행위를 통해 문학을 만들어내는, 무책임하고 장난스러운 형식주의자였다"라는 게 손택의 지적이며, 변태적인 것에 면밀한 관심을 가졌던 바르트는 "그것이 해방적이라는 낡은 시각을 갖고 있었다"라고 그녀는 꼬집는다(폴 굿맨과 마찬가지로 바르트 또한 동성애자였으며 "그와 같은 성적 취향과 유명세를 가진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상당한 성적 특권을 누렸다"). 그래도 "그가 쓴 글은 무엇이든 다 재미있다."

두 권 정도가 예외인데, "초기에 쓴 라신에 관한 논쟁적인 책." 흔히 프랑스 문학에서 신구비평 논쟁을 가져온 저작인데, <라신에 관하여>(동문선, 1998)로 국내에는 소개돼 있다. 또 한권은 "보통 책 길이의 패션 광고의 기호학에 관한 책"인데, 우리말로는 <모드의 체계>(동문선, 1998)로 번역돼 있다. "학회 회비를 내기 위해 쓴 것으로 몇 편의 거장다운 에세이를 담고 있다."라고 했는데, '학회회비를 내다'는 'to pay his academic dues'의 번역이다. 그런 관용표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드의 체계>가 바르트가 제출한 박사학위청구논문이었으므로 직역해서 (학위논문심사에는 비용이 듦으로) '학위논문 수수료를 내기 위해 쓴'이라거나 의역해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정도의 뜻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르트의 지적 생애에 관심있는 독자에게 궁금한 것 중 하나는 <기호학 요강>과 <모드의 체계> 같은 책을 쓰던 그가 <텍스트의 즐거움>이나 'S/Z'의 저자로 변신한 내막이다. 이에 대한 손택의 해명이 명쾌하다. "바르트의 작업은 극복되거나 부인된 슬픔에 관한 것이다. 바르트는 모든 것을 하나의 체계, 하나의 담론, 하나의 분류체계로 취급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모든 것이 체계이므로,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체계에 싫증을 냈다. 그의 정신은 너무 민첨하고, 야심적이고, 모험에 끌렸기 때문이다."(138쪽, 번역 일부 수정)

체계 이후에 바르트가 선택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고, 그는 자기 자신의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이라는 양떼를 끄는 양치기가 되었다."(139쪽에서 '바르트가 쓴 바르트가 쓴 바르트'란 책명은 '바르트에 대한 바르트에 대한 바르트'라는 '리뷰명'으로 바뀌어야 한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나 <사랑의 단상> 같은 책들은 그 대표적인 목록이다. 1977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뒤늦은 명성을 구가하던 바르트도 남모르는 욕심을 품고 있었으니 그건 그가 흠모하던 프루스트 같은(그는 프루스트를 자신의 '수프'라고 말했었다) '진짜 소설'을 써보고 싶어했다는 것. 그러나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불의의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혹시 모를 일이다.

 

언제나 텍스트의 즐거움을 만끽할 줄 알았던 바르트는 '정신적 방탕자'이자 '위대한 화해자'였다. 해서 "그는 비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 감정이 없었다. 그는 늘 불리한 상태에서 유리한 점을 찾았다. 현대 문화비평가들의 고정 주제 중 여럿을 그도 다루지만 종말론적인 관념은 거의 없었다... 그는 극도로 정중하고, 약간 탈세속적이고, 쾌활했다. 그는... 언제나 슬픈 빛을 띤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 쾌락에 관한 그의 말 전체에 무언가 슬픔이 있다... 그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쓰지 못한 책의 목적은, 삶을 찬미하고,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141-2쪽) 그의 '쓰지 못한 책'이란 그가 쓰려고 했던 '소설'을 말한다.

 

 

대략 이런 것이 생전에 "아, 수전, 언제나 충실한 친구(Ah, Suzan. Toujours fidele.)"라고 만날 때면 그녀를 호칭했다는 바르트에게 끝까지 충실하게 남은 손택의 스케치이다. 그리고 이만한 분량으로 바르트에 대한 이보다 더 예리하면서도 정감있는 스케치를 그려낼 수 있는 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그런 손택과 바르트가 만나는 또다른 지점은 바로 '사진'이고 국내에서 출간된 <사진론>(현대미학사, 1994)는 두 사람의 사진론을 묶어놓은 적이 있다(번역은 신뢰할 수 없지만). 각각 따로 읽어야 할 책은 물론 <카메라 루시다>(열화당, 1998)과 <사진에 관하여>(시울, 2005)이다(*<카메라 루시다>는 <밝은 방>으로 재번역돼 나왔다).

 

 

 

 

 

 

 

 

05. 11. 15.

P.S. 분량상 벤야민론, 즉 '토성의 영향 아래'는 다른 자리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한편, 얼마전 '북데일리'란 저널에 <우울한 열정>에 관한 리뷰 기사가 실렸는데(다시 확인해보니 '얼마전'이 아니라 '오늘자' 리뷰이다), '독일 지성 벤야민이 독일어를 몰랐다?"란 제목을 달고 있다. 전반부의 내용은 이렇다.

 

지난해 12월 백혈병으로 타계한 ‘행동하는 지성’ 수전 손택(1933~2004)이 7명의 예술가에 대한 평전 <우울한 열정>(시울. 2005)을 통해 독일 유태계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왕성한 독서가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실천하는 사회운동가, 에세이스트, 소설가, 극작가, 예술평론가였던 그녀는 발터 벤야민에 대해 “그가 쓴 글은 무엇이든 다 재미있다. 쾌활하고, 빠르고, 조밀하고, 날카롭다”고 말하고 “그는 꼼꼼한 독서가였지만 왕성한 독서가는 아니었다”는 독특한 해석을 내린다. 이런 판단은 벤야민이 읽은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 자신의 글 소재로 삼거나 평론을 썼기 때문에, 쓰지 않은 것은 읽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에 근거한다. 수전 손택은 “벤야민이 외국어를 몰랐고, 외국 문학은 번역된 것도 거의 읽지 않았다”고도 말한다. 독서를 하느라 글을 쓰지 못할 정도로 독서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던 사람은 아니며, 오히려 유명세를 즐겼다는 수전 손택의 평가는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극도로 정중하고, 약간 탈세속적이고, 쾌활했다. 그는 폭력을 혐오했다. 언제나 슬픈 빛을 띤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 쾌락에 관한 그의 말 전체에 무언가 슬픔이 있다”

 

짐작하겠지만, 인용문에서 주어 '벤야민'은 전부 '바르트'로 바뀌어야 한다. 무얼 읽고 쓴 리뷰인지는 모르겠지만, 엉뚱한 내용을 받아적은 듯하다. 독일 사람인데다가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벤야민이 독일어를 몰랐다?" 이런 턱도 없는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도 서평지 기자의 목이 아직 붙어 있는 건지, 나로선 그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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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김훈에 관한 단상
내가 읽은 책과 세상 - 김훈의 詩이야기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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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에 관한 단상

 이글은 좀 난삽할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김훈과 관련된 내 사설을 두서없이 풀어 놓을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논리에 기댈 만큼 나는 그닥 여유가 없다. 두서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 것이다.

 어쩌다가 김훈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문학기행>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선택과 옹호>, <풍경과 상처> 그리고 언젠가 그가 쓴 <한영애론>을 읽었다. 아마도 그가 편집장으로 잠시 관계했던 <연예저널>이라는 잡지에서였던 것 같다. 한영애, 그녀는 미지수다. 도대체 그녀를 보고 있으면 한 어린아이 얼굴을 가진 여자 무당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왕창 빨아 들인다. 그녀가 "거기 누구 없소"할 때 나는 '거기에 항상 있다.' 있을뿐더러 조금 감동하고 있다. 흡인력에 있어서는 김훈의 문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적절히 단문과 장문을 구사하며 문체의 소용돌이 속으로 독자를 몰고 간다.

 그는 리포터다. 그런만큼 업무상 그는 세상을 아주 열심히 쏘다닌다. 그러나 그의 글들은 비지니스용의 글로 읽히지 않는다. 그의 표정을 보라.(그는 실제 그의 책에 자신의 사진을 싣기 좋아한다. 그것두 언제나 담배를 삐딱하게 꼬나문 모습, 두 주머니에 깊숙히 손을 찌르고 느릿느릿 걷는 모습....거기다 언제나 콤비를 입고 머플러를 매길 좋아하는 그의 댄디즘) 이런 외관으로 그는 괜찮은 낭만주의자다. 대한민국이 이런 낭만주의자 하나쯤 가지는 것도 문화적으로 그리 험이 되진 않을 듯하다. 우리 문화계에도 이런 뉘앙스 메이커(이건 나의 新造語다.그는 어떤 섬세함을 자꾸 만들어 낸다)가 있다는 거, 더구나 그가 70년대와 80년대를 저널리스트로(그가 한때박래부와 있었던, 한국일보 문화부는 문청들의 꿈이었다) 거치면서도 그의 문체를 잃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무조건 감동한다. 이건 고집이다. 70년대 왠지 구질구질하게 입어야 뭔가 고뇌하는 지식인처럼 보일 때도 콤비를 멋지게 입어제꼈던 그다. 그런 점에서 그는 충분히 강하다. 그러나 이런 찬사의 무의식적 심층엔 <문화부>라는 후광(aura)에 대한 어떤 부러움의 속사정이 감춰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에 대한 문인들의 애정도 어떤 비평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저널리스트에 대한 일종의 屈身은 아니었을까하는 우스운 생각도 든다. (이해하시길 좀 솔직히 써보려고 한다)

 그에겐 아마도 <보여질 것>이란 콤플렉스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그런 콤플렉스가 그의 문체를 만들어내진 않았을까 나는조심스레 진단한다. 리포터는 단순히 보여지기 위한 직업이 아닌가. 그는 얼마나 많은 눈(目)들을 의식했었을까. 그의 문체는 그 눈초리를 의식하는 곳에서 세워졌을 것이다. 깊이를 이루기 위한 집요한 사유의 후견인은 그 무수한 잠재적인 눈초리가 아니었을까.

 그가 <내가 읽은 책과 세상>에서 나해철시인을 두고 <그의 영산포연작은 강가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불행을 이야기하면서도 끝끝내 말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는 언어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의 언어에 대한 집착은 미학적 자기 만족 차원에서 그치는 것처럼 보이질 않는다. 같은 책에서 그는 하재봉을 별로 이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하재봉의 시 속에서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너무도 현란한 이미지와 시어들이, 때로는 중심부를 향하여 조여드는 기색이 없이 난무하고 좌충우돌한다..노련한 시인은 그 구문의장치를 내버리지 않고, 감추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더 노련한 시인이라면 그 감추어진 구문의 장치까지도 시화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이다. 하재봉의 글은 그 구문의 틀이 돌출함으로써 생각의 물결 같은 흐름을 방해하고 그가 그리는 시화의 세계를 괴기스럽게까지 만들어 버린다

  좋은 비평이다. 김훈의 글이 하재봉을 화나게 하지 않고 아프게 만들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말을 어디에선가 읽었다. <좋은 비평은 작가를 화나게 하는 데에 있지 않고 작가를 아프게 하는 데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글은 가끔 미학적 세련이 지나치다. 그땐 좀 찌푸려진다. 세간에 그를 스타일리스트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본데, 난 나쁜 뜻에서 그가 그런 면이 있다는 것, 즉 좀 지나치게 세련됨을 추구할 때가 종종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난 스타일리스트라는 세간의 평에 조금 동의한다. <내가 읽은... ...>에서 기형도를 썼을 때 마지막 문장은 안빼버렸어도 좋았을 것이다.

 김현과 김훈은 모음의 한끝 차이다. 그들은 유사하다. 그 둘은 황지우의 표현을 빌면  <문체로 꼬리친다>. 문체로 꼬리를 친다니! '꼬리를 친다'는 건 한번 붙어보자는 욕망의 표현이 아닐까. 저무는 서해를 말할 때 김훈은 세상을 향해 꼬리 친다. 그는 겉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풍경의 속살을 향해, 아니 그 속의 뼈와 핵심을 향해 비집고 들어 가려고 한다. 비집고 들어가려할 때 그의 언어는 유장해진다. 말이 말의 꼬리를 물고 길어진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시도의 끝에서 그가 만나는 것은 무엇일까. 그속에 무엇이 있는가. 과연 세계의 핵은 그에게 만져지는 에로틱한 실체로서 다가오는 것일까. 과연 세상의 풍경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 없다.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망연자실 서해의 낙조 앞에 서있다.

 그는 일몰의 풍경이다. 그는 깊은 가을의 풍경이다. 그는 언제나 조락한다. 그런데도 그에겐 물기가 많다. 뿐인가 그는 바삭하기조차 하다. 그는 모순이다. 나는 그런 종류의 모순을 언제나 좋아한다. 태양의 아들이면서도 멜랑꼬리한 분위기의 까뮈나 디오니소스적 광기와 아폴론적 명석함의 혼혈아 니이체. 암튼 그의 떠돎은 그의 물기를 말리기 위한 여행, 定處를 얻기 위한 定處없는 여행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물기를 말리기 위해서 햇빛 밝은 곳으로 떠나지 않는다. 설령 그가 봄에 떠나도 그가 도착하는 곳은 가을이다. 설령 그가 아침에 떠나도 그가 도착하는 곳은 저무는 일몰이다.

익어가는 것들의 색깔은 그 완숙의 절정 밑에 조락의 쓸쓸함과 죽음을 수락하는 처연함의 색깔이 깔려 있다. 이룸과 죽음 사이의 구획을 허물고 삼투시켜, 그것들이 합쳐져서 드러나는 삶의 내용을 하나의 색깔이라는 구체적 현존 속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여, 아직 살아서 보는 인간의 눈 앞에 '보이는 것'으로 펼쳐놓은 가을빛의 저 말하여지지 않는 신비를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초월자의 한 성정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터이다.
 
 나는 그가 풍경의 겉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나 침투한다. 그가 풍경의 속살을 헤치고 질료적인 본질과 만나려고 할 때 그는 언제나 허무주의자다. 세상은 비어있는 것이다. 공연히 그 혼자서 용쓰고 유난스레 지랄을 떤 것이다. 그럴 때 언어는 가혹하다. 가혹하게 주인을 물어 뜯는다. 참혹하다. 언어를 버리고 무거움을 버리고, 끈적끈적한 장문들과 호흡들을 버리고 그는 상큼하게 날아 오르고 싶다. 그렇다. 나는 이런 그의 말에 가장 확실한 밑줄을 긋는다.(밑줄을 그을 때 이미 나는 그를 읽기 훨씬 전에  그와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초겨울의 풀들은 가볍다.풍화의 운명이 무겁고 쓰라
      릴수록 그 외양은 저토록 가벼워야 옳으리라.
 
 그러나 그가 생각하고 있는 가벼움은 늙은 가벼움이다. 노련한 가벼움이다. 어린아이의 가벼움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자, 풍화의 운명을 알고 있는 자의 가벼움이다. [헬리콥터와 정현종 생각]은 그같은 가벼움에 대한 작은 예찬의 기록쯤으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헬리콥터에 매달려 가는 탱크. 가벼움이 무거움을 매달고 하늘로 씽씽 날아간다. 정현종이라는 禪士에게 그는 한방 먹는다. 선사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너 뭐하냐?!"

 아, 마흔 일곱살의 그가 이렇게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세계가 세계사에 의하여, 또는 문명이나 논리에 의하여 채워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썰물의 서해는 감당할 수 없는 이 막막한 빈 공간을 안겨다 준다.>  그가 어느덧 마흔하고도 일곱이다.(그는 1948년생이다.) 발빠른 보행과 속도성을 요구하는 리포터라는 직업은, 그의 나이를 실제보다 아랫길로 보게 만든다. 또 그의 짧은 머리칼도 그렇다. 어떤 이는 항상 젊게 보인다. 그렇다. 브레히트는 언제나 젊고 유관순은 언제나 열여섯 살 이상이다. 난 스물 댓살쯤으로 보인다. 이렇게 시시콜콜 그의 구석구석을 대한민국의 이름없는 한 文靑에게 보고당하다니, 그는 성공했다. 그를 보고 있는 눈(目)들을 의식하는 데에 리포터로서 성공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에 전혀 기꺼워 하지 않을 만큼 그는 성공했다.
 이렇게 속물적으로 글을 끝맺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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