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신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영역
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이 상상력이다. 아이들은 뭉게구름에서 호랑이와 토끼의 형상을 읽는다. 존재하는 구름에서 존재하지 않는 호랑이와 토끼를 만들어내는 것이 상상력이다. 일상은 존재하는 것의 영역이다. 그러나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상상력의 영역이다.
 
『신화의 힘』의 저자, 조셉 캠벨은 말한다.
 
자동차는 벌써 신화가 되었어요. 이미 우리의 꿈이 되었으니까요. 이제 비행기도 우리의 상상력을 섬기는 존재가 되었어요. 가령 비행기가 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새가 상징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지요.
 
조셉 캠벨은 신화는 인간의 꿈이 구현된 것으로 본다. 단군신화에서의 웅녀의 곰으로부터의 인간으로의 변모 또한 삶의 질적인 변환을 소망하는 인간의 꿈이 구현된 결과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성춘향의 결합, 심청전에서 심봉사의 개안(開眼), 모두 현실에서는 달성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달성되기 힘들다 해서 인간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도저히 물리적인 힘으로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낸다. 바로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진 현실이 곧 환상이다.
 
조셈 캠벨은 말한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예전에는 대학의 캠퍼스 하면 일종의 철저하게 열린 사회였지요. 그래서 내면적 삶이, 우리가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분들, 말하자면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불릴 수 있는 분들인 플라톤, 공자, 석가, 괴테 등 우리 삶의 중심과 관련된 영원한 가치를 좇으라고 한 분들에 대한 관심과 상충되지 않았어요. 나이를 먹어 나날의 삶에 대한 관심에 심드렁해지면, 사람은 내면적 삶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 내면적인 삶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 참 곤란한 일이지요.(중략) 우리는 바로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조셉 캠벨은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일상적인 일들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내면적 삶에 눈을 돌려야 하며, 신화는 내면적 삶의 지표를 제시해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일상적인 것에 매달려 있다. 어떻게 하면 성적을 올릴까,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을 얻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지위에 오를까를 고민한다. 이 일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라는 것이 조셉 캠벨의 충고다.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하면 성적을 올릴까 하는 고민은 일상적이고 외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진정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고 묻는 것은 성장의 본질을 묻는 지극히 내면적인 물음이다. 신화는 그 내면적인 물음에 지침을 준다.
 
성경은 예수의 신화를 기록한 책이고, 불경은 석가모니의 신화를 기록한 책이다. 그 책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진정한 행복과 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말해준다. 그러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사, 곰이 변하여 웅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라. 신화는 일상의 논리로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신화를 ‘사이비 진술’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처녀의 몸에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은 육체의 삶의 시작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인 태어남을 상징한다는 것이 조셉 캠벨의 설명이다. 그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이라고 조셉 캠벨을 덧붙인다.
 
조셉 캠벨은 신화가 고통의 의미를 가르친다고 말한다.
 
살면서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곰이 웅녀가 되기까지의 시련,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의 시련,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기까지의 시련....한 인간이 고통과 대면하여 그것을 어떻게 초극하는가를 웅장하게 보여준다.
 
『축제와 문명』의 저자 장 뒤비뇨는 말한다.
 
축제 때는 용인되었던 모든 기호들이 변조되고 뒤집어지고 파괴되며, 쾌락 속에서 혼미스러우면서도 즐겁게 신과 인간, 신과 나 사이의 짝지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축제 때는 용인되었던 모든 기호들이 변조되고 뒤집어지고 파괴’된다는 구절을 학교 축제의 예를 들어 주목해보자. 학교 축제에서 선생님들을 풍자하는 연극을 연출했다고 하자. 그 연극에서 선생님이 학생역할을 맡고 학생이 선생님의 역할을 맡았다고 하면 연극의 상연장은 완전히 웃음바다가 될 것이다. 교사의 권위는 연극을 통해 풍자와 해학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바로 이것이 뒤비뇨가 말하는 ‘모든 기호들이 변조되고 뒤집어지고 파괴’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파괴는 파괴로 끝나지 않는다. 축제를 통하여 우리의 일상은 다시금 활력을 얻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축제의 비일상성은 이렇게 우리의 일상에 반성적인 활력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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