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사랑의 단상
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무슨 일이세요? 당신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군요"
  --아니예요, 전 행복해요, 하지만 슬퍼요.
              -- 메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중에서  

 라디오를 틀어놓으면 채 십분이 되기도 전에 우린 사랑을 운운하는 수많은 노랫말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담론의 양적인 결과에 비해 그 실질과 내용은 왜소해 보인다. 사랑의 담론이 이렇게 부실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그것들이 삶과 사물에 대한 사려 깊은 통찰과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의 자기 증식 원리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마아케팅 차원에서의 사랑의 담론은 시장의 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을 채 가지기 힘들다.

 통속적인 사랑의 담론들이 범람하고 있다.통속적이라는 것은 무반성적이라는 것이다. 대중들은 사랑의 담론들을 기계적으로 수용한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아주 미세한 뉘앙스가 결여되어 있다. 연인들이란 지극히 섬세한 어떤 것들을 쉴 사이 없이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랴. 하나하나의 느낌들이 극도로 민감해지는, 그래서 쉽게 깨어지기 쉬운 영혼들, 바로 그들이 우리가 연인들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이 아니랴.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에서 비롯된다'라고 작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이 책의 문체는 롤랑 바르트를 마르크스주의자, 구조주의자 라는 기존의 인식틀에서 제외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대단히 아름다운 산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미리 이데올로기화, 정치화 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저 깊이 느낄 자세만 갖추면 된다. 약간의 심호흡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역자 김희영은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이게 된  이 사랑의 담론을, 상상적인 것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의 자리를 제공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라고

 이 책은 그러므로 기특한 책이다.

 남들에게 공개하기 아까운, 그래서 혼자 몰래 간직하고 싶기만한 이 책을 열어 보자. 이 책은 제 몸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를 열어 우리와 대화하게 될 것이다.나는 내가 밑줄친 그곳을 열어 보이겠다.(바슐라르 읽기에서 고정된 나의 이런 어투는 고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약간의 주석을 달겠다. 그 주석들은 언제나 그 책들이 나에게 촉발시킨 몽상과 사유의 흔적들이다.

 참고로 이 책은 괴에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대상으로 행해진 강의의 결과임을 밝혀두자. 이 책엔 치열한 사랑의 담론들이 등장한다. 그것의 대부분은 베르테르의 담론이다. 하지만 더 정확히는 사랑을 하는 모든 연인들의 담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의 담론이다.

               # 표시는 본문의 내용 그 아래는 감상적 주석

  #장미빛과 신비로운 푸른빛이 어우러진 어느날 저녁, 우리는 하나의 유일한 섬광을 교환하겠지. 모든 것은 긴 오열처럼 작별 인사로 가득한 채   ---보들레르

 그와 내가 나누는 섬광은 무엇일까? 입맞춤, 아니면 어떤 느낌의 홍수, 아니면 부딪히는 눈빛들, 눈물에 반짝이는 불빛들....

  #죽음을 사랑하는 것일까? 키츠의 말처럼 반쯤은 그런 마음도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편안한 죽음을 반쯤은 사랑했거니 half in love with easeful death) 죽는 것으로부터 해방된죽음. 나는 이런 환상을 해본다. 내 육체의 어느곳에서도 피가 흐르지 않는 부드러운 출혈, 채 사라지기 저에 고통을 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계산된 거의 즉각적인 소모. 나는 잠시나마 죽음의 뒤틀린 상념 속에 머무른다.

  어떤 구렁텅이에 빠지고 싶은 열망이 사납게 가슴 속에서 자라난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격렬한 감정들. 즉각적으로 소모되고 싶은 이상한 충동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선 삶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가 매우 부조리한 존재임을 말해준다. 사랑 속에서 사람들은 부조리하다. 아픔의 본질은 그 부조리에 있다. 부조리를 넘어서려는 이성의 안간힘은 창백한 얼굴을 가진다. 그 창백함을 바라보는 존재는 초라하면서도 그 부조리함을 견디는 존재는 한편으론 위대하다.

 #그의 천직은 철새, 사라지는 자이다. 그런데 사랑하고 있는 나의 천직은 그 반대로 칩거자, 그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않고 미결 상태로 앉아 있는, 마치 역 한 구석에 내팽개쳐진 수화물마냥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 앞에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그 사람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과연 나를 위해 행복한 처분을 내려줄 수 있을까. 스스로 팔 뻗지 못하는 그런 기다림의 수동성이 존재를 달뜨게 한다. 다가설 수 없음이 부재를 향하여 맹렬하게 손을 뻗친다. 그의 부재가 확실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기다림의 자리는 뜨겁다.

 #하나의 단어가 육체로부터 우러나와 부재의 감동을 말해준다.즉, 갈망하다란 단어가...입김을 불 때마다 그 불완전한 입김이 서로 상대방의 입김에 섞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두 개의 이미지를 하나로 녹이는 것으로서의 포옹의 이미지. 그러나 사랑의 부재에서의 나는 서글프게 누렇게 메마르고 오그라든, 떨어진 이미지이다.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다. 이 존재의 감옥에서 나는 행복한 유폐자다. 그러나 '행복한'이란 말은 한정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아픈 행복이기에. 사랑의 찰과상이 주는 아픈 행복들.

 #일생을 통하여 나는 수백만의 육체와 만나며 그 중에서 수백개의 육체를 욕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백개의 육체 중에서 오로지 나는 하나만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말해준다...수많은 사람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우연과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필요했던가. 

 사랑엔 멀티태스킹이 있을 수 없다. 내 욕망은 놀랍게도 오직 하나만을 요구한다. 둘은 희미하다. 오직 하나만이 강렬하다. 하나는 둘보다 강하고, 셋보다 격렬하다. 나는 무리중에서 오직 그만을 구별해낸다. 하나가 없는 모든 다수는 안중에도 없다. 그를 돌려다오.

 #나는 내 광기의 유일한 증인이다. 사랑이 내게서 노출시키는 것은 에너지이다.
 
 나는 타오르는 나를 본다. 그 불이 나를 바라보는 나의 눈길마저 태운다. 롤랑바르트는 말한다. '왜 지속되는 것이 타오르는 것보다 더 낫다는 말인가?'  이성은 정열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그런 우열이 정당한가?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그 앞잡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과 욕망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연인들은 현명해질 수 있을까? 욕망은 대상을 수중(手中)에 두려고 한다. 대상이 저항할 때, 그 저항이 불가항력적일 때 욕망은 스스로를 자학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나는 인생을 헛되이 살았다고. 그때 욕망의 큰구렁에 자학의 늪이 고인다. 욕망은 단지 큰구멍이다. 거기에 무언가를 채워야만 욕망은 편안하다. 그러나 그 구멍은 점점 둘레를 넓혀 간다. 욕망은 확장적이다. 더 깊은 곳을 찾아서 손을 뻗친다.

 #자신의 불행을 재현함으로써 그를 감동시키려 할 때,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징계하는 어떤 고행의 행위를 시도한다.(생활방식이나 옷차림 등에서)

 그는 격렬한 동작으로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는 세상을 버린 듯 멀리 있는 것들, 천문학과 해양학에 몰두하기도 한다.그는 은둔자처럼 허름하게 옷을 입기도 하고 그녀는 머리를 자르고 평소에 입지도 않던 스커트를 입기도 한다. 도발적으로, 그녀는 태우지도 않던 담배를 입에 문다. 그들은 변화하고 싶은 것이다. 표면의 변화가 내적이고도 화학적 변화를 가져오기를 갈망하고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세계가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그들의 행위엔 하염없는 융합에의 욕구가 스며 있다. 세계가 변화하여 그와 내가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는, 그 터무니없는,불가능을 꿈꾸는, 슬프고도 미묘한, 달콤쌉싸름한 초콜렛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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