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무너지기 쉬운 번역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재영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지젝의 많은 책들이 그간에 오역으로 훼손돼 있다는 건 더이상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닌데, 이 책 또한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된 개정본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류의 책이 대학교재로 지정돼 있다고 하니까 당혹스럽다. 역자서문에는 "여러 가지로 쉽게 생각했다가 번역의 어려움을 경험한 책"이라고 돼 있는데, 그 '어려움'을 왜 애꿎은 독자들까지 나눠가져야 하는지? "이번 번역을 통해서 개인적으로는 지젝의 종교에 대한 논의를 좀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이 번역본으로는 그 '앎'에 동참할 수 없으니 유감이다. 

복사해둔 영역본이 눈에 띄지 않아 예전에 몇 자 써둔 걸 바탕으로 당장은 몇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시작부터 나오는 코미디 같은 오역이 '뉴 에이지(New Age)'를 '뉴 에이즈'(13쪽)로 옮긴 것이다(색인에 있는 '뉴 에이지' 항에 이 쪽수가 빠진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알랭 바두'로 옮겼다. 다 그럴 수 있지만, 무지가 아니라면 역자가 최소한 부주의하거나 불성실하다는 걸 암시해준다.

그냥 넘어갈 만한 페이지가 거의 없지만, 두어 대목만 보도록 한다(원서를 찾는 대로 마저 지적하겠다). 71쪽에서, “전이에 대한 세미나에서 라깡은 외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은 익살스럽게 꼬여 있는 끌로델Claudel의 쿠폰텐Coufontaine의 3부작을 언급하고 있다.” 원문은 "In his seminar on transference, Lacan refers to Claudel"s Coufontaine trilogy, in which Oedipal parricide is given a comical twist."(43)이다.

이 대목에서의 클로델은 아마도 작가인 폴 클로델일 것이다(조각가 카미유 크로델의 동생). 먼저, ‘라깡’이나 ‘끌로델’로 표기하고 있는 이 국역본이 ‘꾸퐁뗀’이라고 하지 않고 ‘쿠폰텐’이라 표기한 것부터가 서툴다. 그런데 결정적인 건, ‘Oedipal parricide’를 ‘오이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으로 번역한 것. 우리말에 ‘어버이’는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를 뜻한다. ‘오이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이라니? 그렇다면, 오이디푸스가 부모를 다 죽였단 말인가? 그럼 그는 누구와 동침을 했단 말인가?!

아주 사소한 사례인 듯싶지만, 역자가 정신분석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드러내준다. 하긴 이 문장에서 꼬여 있는 건 그것만이 아니다. 문장 자체가 비문이다(‘오이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을 받는 ‘술어’가 없다).  다시 옮기면, “전이에 대한 세미나에서 라캉은 클로델의 <쿠퐁텐> 3부작을 언급하는바, 이 3부작에서 오이디푸스의 부친살해는 희극적으로 변형돼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그렇다면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스스로 예술작품의 숭고한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기성의 콜라 병들의 줄 이상이 아니었다는 것은 당연하다.”(65쪽) 원문은 “No wonder, then, that in the work of Andy Warhol, the ready-made everyday object that found itself occupying the sublime Place of a work of art was none other than a row of Coke bottles.”(40)이다.

정말 의아하면서 신기한 것은 우리말 문장이 안 된다는 점이다!(그러니까 오역의 대부분은 대상언어에 대한 무지에서가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한다.) 여기서는 ‘아니었다’가 받는 주어가 빠져 있다. 그 주어가 “the ready-made everyday object”이고, “was none other than a row of Coke bottles”가 술어이다.

컴퓨터 작업 중 엉겨서 문장의 일부가 누락되지 않은 거라면, 이런 식의 비문은 (비록 흔하다 할지라도) 몰상식/몰염치의 산물이다. 성의 없는 번역서가 독자에 대한 무슨 ‘시혜’라도 되는 양 착각하면 안된다. 다시 옮기면, “그렇다면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예술작품의 숭고한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일상적인 레디메이드 오브제가 다름 아닌 일렬로 늘어놓은 콜라병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번역은 놀랍다. 북한의 '김정일'을 지젝의 오기(아마도 'Kim Yong-il'로 표기한 듯)에 따라 '김영일'(59쪽)로 옮긴 것도 웃지 못할 코미디이다(색인에도 '김영일'이다). 김정일의 영어 표기는 'Kim Jong-il'(혹은 'Kim Jung-il')인데, 알다시피 'j'가 연자음일 경우 'y'와 호환된다. 지젝의 오기는 그래서 비롯됐을 것인다. 그리고 역자는 그걸 '충실하게' 옮긴 것이고. 역자가 지젝의 논의를 얼마나 분명하게 알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더불어 역자의 다른 역서들에 대한 신뢰마저 다 무너뜨린다).

이 책의 표지에는 "종교의 본질은 우상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걸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벗겨내는 데 있다."고 적혀 있다. 번역이라는 우상도 마찬가지겠다. 번역 비판의 본질은 이런 우상과 같은 번역을 끊임없이 걸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벗겨내는 데 있다(그런 점에서 번역 비판은 '종교적'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우리 주위엔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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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오스틴 > 드디어 지젝의 주저가 출간되었다
까다로운 주체 - 정치적 존재론의 부재하는 중심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5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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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평가는 다르겠지만, 나는 지젝을 생존하는 사상가 중 최고로 꼽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만큼 제대로 읽히지 않는 사상가도 없는 것 같다.

예컨대, 그는 들뢰즈나 푸코와 같은 유행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저조한 판매지수를 보라!)

그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주로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이들로 한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는 바꿔 말해, 지젝은 주류(속칭 아카데미와 거기서 파생된 연구집단)에게 '까다로운' 사상가이라는

말이 된다. 그들에게 지젝은 '얼치기'나 '사기꾼'으로 비치기는 것 같다. 더구나 그는 정신분석이라는

한국인문학계에서 집단따돌림을 당하는 학문적 기반 위에 서있다.

그러나 데리다가 '프로이트에게 공정하기'를 소리 높여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지젝에게 공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만약 이에 동의한다면, <까다로운 주체>은 그에 대한 근거가 되어줄 저작이다.

이제껏 지젝의 주저로 주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과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이 많이

이야기되어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쓰여진 논문의 편 수에서도 알 수 있듯이(서구권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논의되는 책은 바로 이 <까다로운 주체>다.

다시 말해, 이 책을 읽지 않고 지젝을 읽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말이 된다.

물론, 이 책은 그리 녹녹한 책은 아니다. 말 그대로 '까다로운' 책이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까다로운' 주체를 발견하는(그러나 회피하고마는)

근대철학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의 순간에 함께 입회하길 원하고,

오늘날 우리가 암묵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진실에 한 발 더 다가서길 원하는 이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감히 들뢰즈/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와 비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더구나 지금 오늘날을 사유하는데 있어서도 더 많은 계발적인 논쟁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이제껏 지젝 번역서들이 받아온 수많은 질타 속에서 상당히 자유롭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실은 절반 정도만 읽은 상태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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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까만물고기 > 이쪽에선 피흘리는 머리가..
까다로운 주체 - 정치적 존재론의 부재하는 중심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5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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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왜 지젝이 매력적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지젝은 자신이 자주 인용하는 헤겔의 구절("이런 밤, 여기 실존하는 자연의 내부-순수 자기-는 환영적 표상들 속에서 주변이 온통 밤이며, 그때 이쪽에선 피흘리는 머리가, 저쪽에선 또 다른 하얀 환영이 튀어나왔다가는 또 그렇게 사라진다" 55쪽)에 나오는 언제나 존재하는 내면의 지옥에 관한 통찰을 결코 저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지젝은 우리는 여기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으며(왜냐하면 이는 현실 구성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벗어나서도 안된다고 말한다(왜냐하면 이는 현실 투쟁의 근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젝의 글은 나에겐 마치 너바나를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커트 코베인은 미국사회, 미디어, 자본에 포위당한 상황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 파괴의 운동을 수행하였다. 마약을 하고 마지막 앨범의 타이틀을 "I Hate Myself, And I Want To Die" 으로 하려는가 하면, 마침낸 자살해 버리고야 만다. 그리고 동시에 우린 미디어가 이용한 것이 바로 커트 코베인의 바로 그러한 면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수행했던 그 전투, 그가 전투를 수행한 방식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커트를 듣게 만든다. 그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부정성 속에 머무르면서 동시에 하나의 주체가 되는 것. 앞이 안보이는 자본의 세상에 살며 우리가 머무를 수밖에 없는 그런 부정성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커트 코베인은 정말 열심히 치르었다. 그는 마침내 어떤 정치적 효과를 만들었다.

문제는 이쪽에선 피흘리는 머리가, 저쪽에선 하얀 환영이 나타나는 차원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투쟁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아니, 지젝은 이 차원을 외면하지 않아야만 도대체 주체란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사변적 동일성이란 개념으로 그가 지적하려는 바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동일성 혹은 정체성은 자기 해체의 바로 이러한 차원 자체라는 것. 모순과 분열 없이는 어떤 주체도 사고할 수 없다는 것. 지젝은 그가 논박하는 사상가들이 바로 이러한 주체의 고통스런 성격(정신분석에선 죽음충동이라고 불릴)을 자꾸 없애버리려 하기 때문에 주체를 사고 할 수 없거나 거짓 주체를 내세우게 된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내 맘대로 해석해보자면, 지젝은 세상 속에서 고통받다 마침낸 우울과 냉소에 빠져버린 이들에게 고통을 어떻게 투쟁하는 주체의 탄생으로 연결할 수 있는지 말하려 한다. 그건 물론 내면의 지옥을, 죽음충동을 가장 급진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통이 있을지라도 자신의 열정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개별 사상가들에 대한 지젝의 판단엔 유보적이지만, 너바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전개하는 논변의 이미지가 매력적이긴 하다.

쉬운 문제는 아니며 쉬운 책도 아니다. 하지만 일부러 어렵게 쓴 책은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읽어볼만 하다. 어려운 문제를 쉽게 써버렸다면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만은 그래도 좀 더 쉽게 논의가 파악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래도 지젝은 내가 아는 한에선 사상가들 중에 가장 쉽게 글을 쓰는 편이다. 동의 못하는 부분도 많다. 하지만 그가 뭔가 핵심적인 것을 건드린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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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주체 - 정치적 존재론의 부재하는 중심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5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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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록 이 책이 기본적 취지에서 철학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정치적 개입이며, 범역적 자본주의와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보충물인 자유민주주의적 다문화주의 시대에 어떻게 좌파적, 반자본주의적 정치적 기획을 재정식화할 것인가라는 화급한 물음을 던진다." 까다로운 주체, 서문 중에서.

2. 제목이 말해주듯, 이 책은 주체 혹은 Cogito의 이면에 은폐된 어떤 차원을 불러낸다. 라캉과 헤겔을 모체로 칸트, 하이데거, 발리바르, 랑시에르, 라클라우, 그리고 주디스 버틀러가 공통적으로 가진 한계와 그로 인해, 혹은 그 한계의 원인으로서 은폐된 어떤 것 - 객관과 주관 사이의 불가능한 간극 - 이 있음을 폭로한다. 그래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철학적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철학적 논변들을 아직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3. 그래서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은 것은 4장 - 정치적 주체화와 그것의 부침 - 과 6장 - 오이디푸스는 어디로? - 이다. 정치라는 말이 우스꽝스러운 관용어로 통용되는 - 혹은 지젝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적인 것을 효과적으로 '폐제'하는 - 이 시기에, "과연 무엇이 진정한 정치행위인가"라는 질문은 분명히 적절할 뿐만 아니라 유효한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시대착오적, 혹은 구시대적 유물이라는 조롱을 정면에서 반박하며, 지젝은 "고유의 정치"를 옹호한다. 그는 "근본주의와 후근대적 다원적 정체성 정치 사이의 대립은 궁극적으로 속임수이며, 심층적 연대(혹은,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사변적 동일성)를 은폐하고 있다"며 "고유의 정치"란 "구체적인 기존의 보편적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질서의 증상을, 즉 기존의 보편적 질서에 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서 안에서 어떠한 '제자리'도 갖지 못하는 부분(예컨대 우리 사회의 불법 이주자들이나 노숙자들)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정치적 기획을 실현하는 것의 모든 결과들을 아무리 불유쾌한 것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결국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란, 좋아 보이는 것들의 덫에 빠져 - 혹은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해서 - "궁극적 선택은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영웅적 혁명가는 자신이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악행들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진 폭력에 대한 자동적인 반감은 선입관인 것이며, 폭력에도 나쁨과 더 나쁨이 있음을 구별하라고 주문한다, 혹은 "스탈린주의의 정치적 공포에 대한 끔찍한 경험 때문에 공포의 원리 자체를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 우리는 한층 더 엄중하게 '선한 공포'를 탐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욕망을 타협하지 않는 윤리적 영웅성에 대해 요청한다.

4. 재미있는 것은, 특히 6장에서, 상당히 비약적으로 논리를 전개한다는 느낌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꽤 정교하게 계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글을 읽는 동안, 내가 생각했던 문장의 의미는 계속해서 - 그것도 한 문장을 읽는 동안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 다음 문장에서 - "옳지 않은" 혹은 "아닌"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그가 말하는 것들을 순진하게 혹은 의심없이 따른다면 그 속에서 충분히 근거지워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아들이기엔 꽤나 힘겨운 이야기들 - 본래적 행위, 윤리적 영웅성, 폭력에 대한 재해석 등 - 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논조는 단호하다. 그것의 토대는 아마도 한국에서 살아온 나 -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 - 로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공산주의 국가의 역사를 경험해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초월성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5. 이 책의 결론 혹은 추구하는 목표에 대해서, 나는 아직 동의도 반대도 결정하지 못했다. 4장과 6장을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불가능하리라는, 다른 장들에 연관되어 있는 의미들이 더 많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철학이 현실과 만나는 접점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이 책은, 그래서 더욱 면밀하고 섬세하게 읽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데올로기와 라캉을, 사회와 정신분석학을 연결시키는 저자가 결론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개인의 영웅적 결단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반자본주의라는 거대 담론이 개인적 결단으로 화하는 순간 느껴지는 그 어찌할 수 없는 당혹감. 물론 정신분석학이 가진 내재적 한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긍정적으로 해석해서 대안적 기획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망설이는, 도피하는 행위자 개개인들의 각성을 요청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섭섭함은 남는다.

6. 이 책을 덮으며, 눈이 간 것은 얼마전 빌려온 - 그러나 아직 몇 페이지 밖에 읽지 않은, 그대로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 -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이다. 과연 이 기묘한 연관성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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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지젝에 대해 알고 싶은 몇 가지

봄바람에 먼지나 날릴 만한 3월초순에 '백년만의 폭설'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듯하다. 일기와 관계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로선, 크게 불편한 일도 없고. 대학가의 서점들이 주로 수업교재를 구하려는 학생들로 미어터지는 풍경도 보기에 나쁘지 않다. 두툼한 경제학/경영학 책들과 몇 만원씩은 나갈 듯한 자연계 원서들이 수십 권씩 쌓여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왠지 마음이 젊어지는 듯하다. 분명 나에게 그런 날들은 '과거'이지만, 또 그런 날들은 해마다 '비인칭적으로' 반복된다! 왠지 그런 풍경들 속에 나도 (나를 잊고!) 끼여들었으면!...

하는 기분에, 서점에 자주 들러, 다치바나 다카시의 <뇌를 단련하다>도 괜히 쓰다듬어 보고, 이미 봄호가 나오는 계간지들 서가에서 지난 겨울호들을 뒤적이기도 한다. 두어 주쯤 됐지만, 그러다 발견한 글 두 편. 하나는 <과학사상>(47호)에 실린 이진우의 "생명공학 시대의 '주체' 또는 '탈주체'"이고, 또 하나는 <당대비평>(24호)에 실린 윤평중의 지젝과의 대담, "사유와 실천의 유희는 가능한가>이다. 후자의 부제는 '지젝에 대해 알고 싶은 몇 가지'.

지난 가을 방한시 계명대에서 영어로 발표했던 <유전공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란 강연문의 해제 형식인 이진우 교수의 글은 '유전공학에 관한 지젝의 정신분석학적 계몽'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이미 그 강연문을 읽었던 독자에게라면 새로울 게 전혀 없는 내용이다. 필자가 미주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따르면, "이 글은 그의 철학적 입장에 대한 비판적 논의라기보다는 그의 사상을 이해가능한 수준으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젝 관련 문헌의 하나로 카운트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찾기 어렵다(참고로, 강연문의 번역은 홍준기씨가 맡았었는데, 책으로 낼 수 있을 만한 수준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니 여기서는 '지젝에 대해 알고 싶은 몇 가지"만 알아보면 되겠다. 부지런한 분들은 책을 직접 참조하면 더 좋을 거 같고.전반부에서 슬로베니아와 지젝의 가정환경을 다룬 부분, 미국에 대한 견해 등은 생략하고, 바로 철학에 대한 것. 우선, 그에게서 라캉과 헤겔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라캉과 헤겔이 철학적 문제의식이 자신의 사유에 있어서 주요 화두라는 걸 이전하면서 "라캉 없는 철학은 공허하고 헤겔없는 정신분석학은 방향감각을 결여하고 있다"는 패러디적 문구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물론 이때 그가 주로 참조하는 라캉은 초기의 구조주의적 라캉이 아니라 후기의 라캉이다. 때문에, 그는 '주체의 죽음'이라는 포스트모던적 테제를 라캉과 결부시키는 데 완강하게 반대해왔다. "어쨌든 주체라는 행위자를 설명함에 있어 후기 라캉이 훨씬 적합한 이념적 틀을 제공하지요. 독일 관념론, 특히 헤겔에 대한 저의 집중적인 관심도 주체의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저는 독일 관념론이 주체 문제에 대한 가장 정교하고 역동적인 철학적 설명의 틀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그의 헤겔론은 곧 역간될 예정인 에 집약돼 있다(이 책에서, 헤겔은 들뢰즈 이상의 매력적인 철학자로 탈바꿈해 있다). 다른 자리에서, 그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란 데뷔작의 대성공(!)에 놀라는 만큼이나 뒤이어 나온 이 책의 (흥행)'실패'에 의아해 하는데, 정작 자신이 보기에 더 중요하고 더 훌륭한 책은 이 후자이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 책을 바치고 있다). 그가 새로이 2판을 내면서 100쪽이 넘는 서문을 다시 붙인 것도 그러한 배경을 갖고 있다. 이 역간되면, 지젝에 대한 오해나 비판이 어느 정도 교정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정작 국내에서는 지젝이 그토록 강조하는 혹은 숭배하는 헤겔의 주저, <정신현상학>과 <(대)논리학>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면서 유감스럽다(새로운 번역본이 시급히 나오기를 기대한다). 헌책방들을 뒤지면 한두 권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공포의 04학번 신입생들에게 대철학자 헤겔은 말 그대로 '공갈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해마다 헤겔학회가 열리고 가끔씩 헤겔 연구서가 나오는 건 넌센스가 아닐까? 그들의 헤겔은 독일에만/독일에나 있는 것인지? 딴은, 우리나라는 헤겔로부터 '자유로운' 나라인 것이니까 그다지 나쁠 게 없는 것인지도. 들뢰즈라면 이러한 헤겔의 공백을 반가워했을까?...

어쨌든 지젝이 생각하는 헤겔의 핵심, 혹은 변증법의 핵심: "변증법이 존재계 일반에 대한 이론으로 이해되지 않고 주체의 역동적 자기형성 과정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정적으로 독해된다면 부정의 이념은 자연스럽게 주체가 내외부적으로 실험하는 부정의 부정으로 전화하지요. 즉 부정성은 주체의 자기 관계적 부정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헤겔은 주체의 형성이라는 이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과정 자체를 일반적 차이와 구별하기 위해 절대적 차이라고 명명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윤평중 교수는 "절대정신의 존재론을 설파한 헤겔과 자기 관계적 부정성을 강조한 헤겔 사이에는 건너기 어려운 간극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하지만, 지젝은 바로 그 점이 헤겔의 묘한 매력이 아니겠느냐고 받아넘긴다.

그리고, 영화 <매트릭스>에 대한 얘기와 함께 영화 얘기. 그 많은 영화들을 어떻게 다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많은 사람이 궁금해 하는 대목인데). 지젝의 답변은 기가 차다: "제가 분석하거나 해부하는 영화들의 3분의 1도 보지 않았을 겁니다. 예건대 저는 로셀리니의 작품을 한편도 보지 않았으며, 영화관에 가는 것도 그리 즐겨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극장에 갈 시간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정확하겠네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의 한 장은 바로 로셀리니의 3부작에 바쳐져 있는데, 정작 그는 단 한편의 로셀리니도 보지 않았다니! 이걸 사기라고 해야 할지, 묘기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는 무엇보다도 영화 텍스트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이라는 텍스트의 비밀을 응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서 즐겨 말하고 분석한다고 답한다. 그리고 1/3밖에 못 봤다고 하더라도 그 분량은 우리의 상식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점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네그리/하트의 <제국>에 대한 얘기. 그는 '제2의 자본론' 운운하며, <제국>을 서평한 적이 있었는데, 그 서평은 사실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쓴 것이며, 정작 책은 아주 실망스러웠다고. 이 실망은 그가 다시 쓴 서평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요점은 저자들이 제시하는 대안이라는 게 기대이하라는 것이다. 지젝은 말한다: "저는 지금 이 시점, 그리고 앞으로 전망 가능한 중장기적 지평에서 자본주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지적으로 정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내가 좋아하는 지젝은 이런 말을 하는 지젝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한마디로 저는 선진 자본주의 교육제도의 수혜자이자 지식 특권계급으로서의 서구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라크 문제나 유고 사태를 거론하면서 이들 비서구인들에 대해 취하는 거들먹거림이나 위선에는 이제 신물이 납니다."(짝짝짝!)

그럼, 당신의 대안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저는 어떤 종류의 해답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계의 문제를 풀 해답이 존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그 범위 안에서 꾸준히 할 뿐입니다. 우리네 일상의 무늬와 결에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일성과 균열, 그리고 현대적 삶의 무한한 모순과 복합성을 웅변하는 사례들이 다양하게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그것들을 따져 묻고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으로, 당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음악을 들을 때라고 답한다. 그는 생각을 할 때나 쉴 때나 항상 음악을 듣는다고 말하는데, 덧붙여 자신의 비밀을 문득 털어놓는다: "저는 언젠가는 대작 오페라 한편을 직접 써서, 뉴욕 무대 같은 데에서 직접 연출해 올리는 것을 궁극적 희망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음악미학에 대한 질 높은 연구서, 예컨대 아도르노의 작업에 비견될 만한 책도 펴내고 싶습니다."

이 대담에서 내가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 로셀리니 영화 얘기와 함께 이 음악 얘기이다. 두 이야기는 지젝을 좀더 가깝게 느끼도록 해준다. 대담을 마친, 윤평중 교수의 감상도 흥미로운데, 그는 지젝의 경이로운 통찰력과 감수성, 그리고 에너지에는 근본적으로 어떤 불안정한 데가 있어 보였는데, 그것은 그의 고질병인 '당뇨' 때문에 야기되는 불안한 제스쳐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전형적인 조증(manie) 이 아닐까, 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당연히 그러한 조증에나 울증이 동반된다(니체이 경우처럼). 실상 지젝 자신이 라캉주의자들로부터 정신분석을 받기도 했다(그 자신이 비판적이지만). 그의 결론: "나는 지젝을 니체가 미래 위버멘쉬의 모델로 상정한 '예술가-철학자'의 상에 가장 근접한 인간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어떤 위버멘쉬, 혹은 또 다른 헤겔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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