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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주체 - 정치적 존재론의 부재하는 중심 ㅣ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5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4월
평점 :
1. "비록 이 책이 기본적 취지에서 철학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정치적 개입이며, 범역적 자본주의와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보충물인 자유민주주의적 다문화주의 시대에 어떻게 좌파적, 반자본주의적 정치적 기획을 재정식화할 것인가라는 화급한 물음을 던진다." 까다로운 주체, 서문 중에서.
2. 제목이 말해주듯, 이 책은 주체 혹은 Cogito의 이면에 은폐된 어떤 차원을 불러낸다. 라캉과 헤겔을 모체로 칸트, 하이데거, 발리바르, 랑시에르, 라클라우, 그리고 주디스 버틀러가 공통적으로 가진 한계와 그로 인해, 혹은 그 한계의 원인으로서 은폐된 어떤 것 - 객관과 주관 사이의 불가능한 간극 - 이 있음을 폭로한다. 그래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철학적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철학적 논변들을 아직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3. 그래서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은 것은 4장 - 정치적 주체화와 그것의 부침 - 과 6장 - 오이디푸스는 어디로? - 이다. 정치라는 말이 우스꽝스러운 관용어로 통용되는 - 혹은 지젝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적인 것을 효과적으로 '폐제'하는 - 이 시기에, "과연 무엇이 진정한 정치행위인가"라는 질문은 분명히 적절할 뿐만 아니라 유효한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시대착오적, 혹은 구시대적 유물이라는 조롱을 정면에서 반박하며, 지젝은 "고유의 정치"를 옹호한다. 그는 "근본주의와 후근대적 다원적 정체성 정치 사이의 대립은 궁극적으로 속임수이며, 심층적 연대(혹은,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사변적 동일성)를 은폐하고 있다"며 "고유의 정치"란 "구체적인 기존의 보편적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질서의 증상을, 즉 기존의 보편적 질서에 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서 안에서 어떠한 '제자리'도 갖지 못하는 부분(예컨대 우리 사회의 불법 이주자들이나 노숙자들)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정치적 기획을 실현하는 것의 모든 결과들을 아무리 불유쾌한 것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결국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란, 좋아 보이는 것들의 덫에 빠져 - 혹은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해서 - "궁극적 선택은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영웅적 혁명가는 자신이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악행들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진 폭력에 대한 자동적인 반감은 선입관인 것이며, 폭력에도 나쁨과 더 나쁨이 있음을 구별하라고 주문한다, 혹은 "스탈린주의의 정치적 공포에 대한 끔찍한 경험 때문에 공포의 원리 자체를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 우리는 한층 더 엄중하게 '선한 공포'를 탐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욕망을 타협하지 않는 윤리적 영웅성에 대해 요청한다.
4. 재미있는 것은, 특히 6장에서, 상당히 비약적으로 논리를 전개한다는 느낌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꽤 정교하게 계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글을 읽는 동안, 내가 생각했던 문장의 의미는 계속해서 - 그것도 한 문장을 읽는 동안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 다음 문장에서 - "옳지 않은" 혹은 "아닌"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그가 말하는 것들을 순진하게 혹은 의심없이 따른다면 그 속에서 충분히 근거지워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아들이기엔 꽤나 힘겨운 이야기들 - 본래적 행위, 윤리적 영웅성, 폭력에 대한 재해석 등 - 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논조는 단호하다. 그것의 토대는 아마도 한국에서 살아온 나 -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 - 로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공산주의 국가의 역사를 경험해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초월성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5. 이 책의 결론 혹은 추구하는 목표에 대해서, 나는 아직 동의도 반대도 결정하지 못했다. 4장과 6장을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불가능하리라는, 다른 장들에 연관되어 있는 의미들이 더 많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철학이 현실과 만나는 접점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이 책은, 그래서 더욱 면밀하고 섬세하게 읽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데올로기와 라캉을, 사회와 정신분석학을 연결시키는 저자가 결론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개인의 영웅적 결단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반자본주의라는 거대 담론이 개인적 결단으로 화하는 순간 느껴지는 그 어찌할 수 없는 당혹감. 물론 정신분석학이 가진 내재적 한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긍정적으로 해석해서 대안적 기획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망설이는, 도피하는 행위자 개개인들의 각성을 요청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섭섭함은 남는다.
6. 이 책을 덮으며, 눈이 간 것은 얼마전 빌려온 - 그러나 아직 몇 페이지 밖에 읽지 않은, 그대로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 -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이다. 과연 이 기묘한 연관성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