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수영 > 바벨탑 : 꿈 속의 건축물

플랑드르의 화가 대 피터 브뢰겔 Pieter Bruegel the Elder(1525~1569)의 작품 중에는 '눈 속의 사냥꾼', '반역 천사의 타락'등 좋아하는 작품이 많지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역시 이것이다.


 

 

 

 

 

 

 

 

 

 


대 피터 브뢰겔Pieter the Elder Bruegel (1525-1569)
바벨탑The Tower of Babel
Oil on oak, 1563
44.88 x 61.02 inches [114 x 155 cm]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브뢰겔은 이 주제로 또 하나의 그림을 그렸는데 크기가 작아 보통 '작은 바벨탑'으로 불린다.

대 피터 브뢰겔 Pieter the Elder Bruegel (1525-1569)
"작은"바벨탑The "Little" Tower of Babel
Oil on panel, 1563
23.62 x 29.33 inches [60 x 74.5 cm]
Museum Boymans-van Beuningen, Rotterdam


바벨탑의 전설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데, 노아의 후손들이 하늘에 닿는 거대한 탑을 지으려고 했고 그것 때문에 야훼의 노여움을 사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여러 다른 언어의 기원 전설로 잘 알려져 있다.
바벨탑의 모델이 되 것은 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 세워진 지구라트Ziggurat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신을 모시기 위한 일종의 제단으로 브뢰겔의 그림과는 달리 사각형 기단 위에 좀 더 작은 사각형이 쌓아 올려진, 남미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우르Ur(지금의 이라크 남부에 있는 수메르의 고대 도시)에 남아 있는 지구라트의 유적과 그 복원도

이런 지구라트의 꼭대기에는 신전이 있었고 거기서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러니 성서에 나와 있는 것과는 달리 사실 이것은 신에 맞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을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신이 야훼는 아니었을 테니 야훼의 분노 또한 정당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브뢰겔은 원래 건조한 사막 지대에 있었을 이 탑을 자신이 살던 플랑드르의 바닷가에 세워 놓았다. 탑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꼭대기는 이미 구름에 가려 있고 발 밑의 집들을 완전히 압도하는 거대함을 자랑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이 탑은 자연적인 바위산을 토대로 삼고 있는데 전면에 보이는 비탈의 바위, 그보다 좀 올라가 오른쪽에 건물을 뚫고 나와 있는 바위를 보면 화가는 이 산의 자연적 비탈을 이용해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려 한 것 같다.
화면의 가장 앞쪽에는 왕인 듯 보이는 사람이 그의 군인들을 이끌고 나와 있다. 아마도 시찰하러 온 모양이다. 석재가 흩어져 있는 가운데 몇 명의 인부들이 엎드려 무언가 애원하고 있다. 부역이 너무 과중하다고 호소하는 것인지, 더 이상 높이 쌓기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건축 사업으로 인한 세금 부담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공사를 빨리 진척시키지 못함을 탓하는 권력자에게 한번만 봐주십사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건물을 보자. 곳곳에 비계가 설치되어 있고 사람들이 오르락 내리락 분주히 일하는 건축현장이 보인다. 탑은 위로 가면서 좁아진다는 점을 빼고는 앞에서 본 지구라트와 닮은 점이 별로 없다. 연속되는 아치가 층을 이루며 쌓인 원형 건물 - 이렇게 보면 오히려 로마 콜로세움과의 유사성이 더 두드러진다. 브뢰겔은 외벽이 다 완성되지 않은 부분을 통해 탑의 내부 구조 또한 보여준다. 거대한 건물은 마치 바퀴살처럼 뻗어 있는 내부의 버팀벽을 통해 지지된다. 버팀벽 또한 아치로 연속되면서 건물 내부의 회랑을 만든다. 마치 고딕 건축의 플라잉 버트리스Flying Butress를 건물 내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양이다.
'작은 바벨탑'을 보면 주변의 풍경도 거의 없이 화면 전체를 이 건물의 위압적인 존재로 가득 채우고 있다. 탑은 먼저 본 그림보다 더 많이 지어져 있다. 짙은 구름이건물의 3분의 2정도 되는 부분에 걸려 있고 외벽도 이미 지어진 부분까지는 거의 덮여 있다. 아치형 입구와 창문의 검은 동공은 거의 무시무시할 정도이다. 탑은 불안정하게 좀 기울어져 있다.
왜 이 그림이 내게 그렇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까를 최근까지도 잘 알지 못했었다. 얼마 전 꿈을 꾸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꿈은 엘리베이터, 이상한 계단, 끝없는 복도들이 이어지는 규모를 알 수 없는 건물을 빠져나가야 하는 내용이었는데, 이런 거대하고 기묘한 건물이 등장하는 꿈을 나는 자주 꾼다. 어쨌든 이 꿈을 꾸고 나서 나는 며칠 전에 본 브뢰겔의 바벨탑 그림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이 그림이 그토록이나 매혹적이었던 것은 내 꿈 속의 건물들과 닮아서였다는 것을 말이다. 저 아치 문 중 하나로 들어가면 꿈 속에서 자주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해 쫓겨 다니던 어두컴컴한 복도, 막다른 골목, 예상치 못한 곳에 위치한 문들, 계단과 사다리, 그리고 브뢰겔은 아마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엘리베이터 들이 있을 것만 같다. 내 꿈 속의 엘리베이터들은 자주 엄청난 층수를 오르내린다. 백 층이 넘는 숫자들... 그것 역시 이 환상적인 건물과 닮아 있다.
꿈 속에서 나는 건물의 외부를 보는 적이 거의 없다. 나는 언제나 짐작할 수 없는 크기를 가진, 미로 같은 복도가 있는 건물의 속을 헤맬 뿐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마 그 건물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 건물의 이미지는 나에게만 인상적인 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특히 16세기의 플랑드르에서는 이런 그림들이 많이 그려진 듯 하다. 몇 개만 감상해 보자.


알려지지 않은 플랑드르 대가Unknown Flemish Master, 16세기
바벨탑The Tower of  Babel
시에나 국립미술관Pinacoteca Nazionale, Sienna


헨드릭 반 클레베Hendrick Van Cleve, 16세기
바벨탑의 건설The Construction of Tower of Babel
크뢸러 뮐러 박물관Kroller Muller Museum, Otterlo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e(1832~1883)
 바벨탑


 
물론 어느 것도 브뢰겔이 주는 신비로움을 능가하진 못하지만 이 건물들 역시 환상적이다. 특히 헨드릭 반 클레브의 작품은 지구라트처럼 사각형의 기단부를 갖고 있으며 건물의 1층과 연결되는 일종의 고가로를 건설해 놓은 점이 독특하다. 이 바벨탑 역시 약간 기울어 있는데 이것은 인간 오만성의 상징인 이 건물이 머지 않아 붕괴될 운명이라는 것을 나타내려 함인 것 같다.
시에나의 국립미술관에 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그린 바벨탑은 마치 소라 껍질처럼 오른쪽 위로 향하는 나선형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후대의 판화가, 삽화가인 구스타브 도레의 바벨탑 이미지와 유사하다. 도레의 바벨탑은 총안처럼 좁은 창문만 나 있어서 마치 감옥이나 요새처럼 보인다. 전혀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는, 음울한 건물이다.


마지막으로, 바벨탑과는 상관이 없지만 H. R. 기거가 뉴욕을 주제로 그린 연작 시리즈 중 한 점을 보자. 이 스위스 태생 화가는 에일리언 시리즈의 비주얼을 창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H.R. Giger
뉴욕 시티 XI-엑조틱New York City XI-Exotic


그는 뉴욕의 마천루를 자신의 독특한 이미지들과 결합시켜 뉴욕 시리즈를 그렸다. 이런 거대한 건물들은 사람을 위압하고 길을 잃게 만들며 우리가 영화 속에서, 혹은 실제로 경험하듯이 재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위로 치솟은 이 거대한 건물들에는 괴물적인 무언가가 있다.

 

 브뢰겔 -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 시공 아트 026 | 원제 Bruegel

월터 S. 기브슨 (지은이), 김숙 (옮긴이) | 시공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TexTan > 엘리아데-안트로포스의 힘[수정]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어떤 계기로 인도로 가 켈커타 대학에서 다스굽타(Dasgupta)에게 인도철학을 배운다. 또한 히말라야 리쉬케쉬(Rishikesh)에서 직접 요가를 수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이 <요가>라는 책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인도 사상, 요가, 탄트라, 연금술 등 고금을 넘나드는 방대한 자료들이 그의 멋진 초점 역할을 통해 훌륭하게 한 권의 책에 투사되고 있다. 이 책은 예전에 우리나라에도 고려원(다르마 총서6)을 통해 잘 번역되어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절판 상태이다.      

 

 <요가(Yoga : Immortality and Freedom)>, 이 책과 중복되는 내용이 프랑스 세이유 출판사에서 나온 [성자  시리즈]  <파탄잘리(Patanjali)>에 일부분 담겨 있다. 이 책도 예전에 대원사에서 나왔는데, 역시 아쉽게도 지금은 구하기 어렵다.

언뜻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요가-불멸성과 자유-> 이 책이 내년에 재출간 된다는 얘기도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기다려 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다행히 나는 '요가'와 '파탄잘리' 두 권을 다 가지고 있다)

엘리아데의 책들 중에서 유명한 것은 <요가>는 물론 <성과 속>, <영원회귀의 신화>, <샤마니즘>, <이미지와 상징> 그리고 마지막 저작에 속하는 <세계종교사상>'까지 굵직한 것들이 많다.

 

 

 

 

 

                                                    종교형태론                                                성과 속:종교의 본질

 <성과 속(thr Sacred and the Profane)>에서 성(聖)과 속(俗)은 궁극적으로 이원적인 차원은 아니라고 엘리아데는 본다. 특히 과거 동양 종교나 원시 문화에서 일상의 생활과 성스러운 것이 일치됨에서 그 본보기를 들고 있다. 이것은 바로 탈신성화된 현대사회에 대한 우려가 깃든 시각일 수 있겠다. 또한 이 책에서는 신성한 것의 드러남이라는 '히에로파니(聖顯, Hierophany)'로 새롭게 역사를 읽으려는 모습도 볼 수  있다(이 책은 두 출판사 한길사, 학민사에서 번역되어 나와 있다). <영원회귀의 신화>'낙원에의 향수(The Nostalgia for Paradise)'라는 '회귀와 반복'의 힘이 맥박처럼 담긴 책이다. 부제로 '"역사철학 입문"을 넣고 싶었다고 엘리아데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데,  기존 역사철학에서의 직선적 시간관과는 다른 것을 시도하고자  했음이다. 그러나 책은 너무도 얇고, 치밀하고 논리적인 근거로 무거운 이탈을 하기보다는, 하나의 은유를 담듯이 부드럽게 나아갈 뿐이다. 엘리아데의 문학적 스타일은 그래서 때에 따라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괴테의 형태학(형태학의 원리는 연금술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엘리아데는 괴테에게도 좋은 자극을 받은 거 같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종교형태론>이란 책이 있다. <샤마니즘>은 <요가>와 더불어 하나의 주제를 가진, 거기다가 꽤 두터운 책에 속한다. 전에 이 책을 사자마자, 샤마니즘에 관한 책이니 우리나라 부분도 있겠지 싶어 찾아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딱 두 군데 총 몇줄로만 다뤄져서 괜히 서운했다. 잘 모르는 멀고 생소한 장소들의 이야기들이 많아 지루하지만, 엘리아데의 역량이 보이는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엘리아데의 아버지에 대한 헌사로 시작하는(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인 1952녀에 나온 책이다.) <이미지와 상징>은 그의 장기인 '상징'을 적당한 두께에 담아 놓은 책이다. 뒤메질의 서문에 이어지는 상징들은 요약하면 '중심', '시간과 영원(인도와 관련)', '매듭(결박)', '조개(그리고 진주)'이다. 내 느낌엔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서인지, 엘리아데 특유의 부드러움은 없고 좀 딱딱하게 읽었던 거 같다.

<세계종교사상사>는 정말 탐나는 책이다. 3권에 걸쳐 다루는 내용이 입을 벌어지게 만든다. 정말 있어야 할 책인데, 당장 사기엔 부담이 가는 가격이다. 더 관심이 가는 권부터 차근 차근 모아야 할 거 같다. <세계종교사상사 1 >는 '석기시대에서부터 엘레우시스의 비의까지' 부제가 달렸는데, 메소포타미아와 히타이트 그리고 차라투스트라 부분에 관심이 간다. <세계종교사상사 2>는 '고타마 붓다에서부터 기독교의승리까지'로 도교와 연금술,  켈트족 그리고 피타고라스와 오르페우스가 개인적으로 흥미를 돋군다. '무함마드에서부터 종교개혁의 시대까지'라는 부제의  <세계종교사상사 3>은 유목민의 종교, 성상 파괴 운동, 헤르메스의 전통 그리고 티베트 부분이 관심을 끈다. 그러고 보니 어느 권 하나도 떨치기 힘든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두꺼운 책들은 인터넷 주문보다는 직접 가서 사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가끔 받아 본 책들 중에 제본이 잘못 됐는지, 펼치면 중간 어딘가 쫙 갈라져서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제목도 범상치 않으면서, 나의 호기심을 독려하는 책들도 있는데,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이 그것이다.  뭔가 노골적으로 양성의 겹침과 융해, 그리고 신비주의 지식을 드러내는 제목이다.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는 책표지도 그렇고, 처음엔 엘리아데의 소설책인줄 알았다.  이 책은 분량은 적지만, 다른 책들에 분산되어 있는 엘리아데의 원초적인 관심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연금술'만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다. 야금술에서부터 바빌로니아, 중국, 인도 등 연금술의 궤적을 그려내고 있다. 정말 흥미로운 주제의 책이 아닐 수 없다.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은 책표지부터 범상치 않다.  메피스토펠레스를 대극의 합일을 염두해 두고, '음'의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살피는 그의 입장은 융의 심리학과 닮아 보인다(윗글에서 엘리아데가 괴테에서 받은 영향을 말했었는데, 융하고도 다정히 찍은 사진도 있는 것으로 봐선 꽤 교류가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괴테의 파우스트의 모습과 다른 메피스토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은 음지의 욕구를 자극한다. 엘리아데, 융 그리고 '양성인(androgyny)'에 대한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존 카메론 미첼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헤드윅(Hedwig)]에서는 원초적 형태의 양성의 행복한 결합체를 바라는 심정을 애니메이션 장면으로 매우 잘 묘사한다.

 

<융 심리학과 동양종교>는 '티벳 사자의 서', '요가' '易經' 등 융의 눈으로 동양 종교의 핵이 들춰진다. 융은 동양에 접근하는 수준 높은 노하우가 있지만, 엘리아데와는 달리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엘리아데는 단일한 주제를 가지고 책 한권을 쓰기도 하지만, 여러 곳에 낸 짧은 글들이나, 혹은 시기적으로 분산된 글들을 한데 모아서 출간하기도 한다.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도 그런 성격의 글로 보이고, <상징 신성 예술>, <신화 꿈 신비> 등도 그러하다.

 

  <신화. 꿈. 신비>이 책의 표지가 심상치 않다. 서양과 동양 신비주의의 '심  볼'들이 층을 쌓아 거대한 축을 짓고 있다. '샤머니즘'이라는 책과 '영원회귀의 신화'와 비슷한 괘를 이루는 모음집으로 보인다.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가 누구지? 왠 일본인.. <상징, 신성, 예술> 이 책의 헌사 "시간을 초월하는 예술 세계를 지닌 이사무 노구치에게"를 보고 떠오른 생각이었다. 찾아보니 일본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조각가라 한다. 여기까지는 아 그렇구나! 정도였는데, 브랑쿠시(Constatin Brancusi)의 제자였음을 알고는 약간 놀랐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 좀 다른 맛을 내는데, 예술(회화, 조각, 사원, 문학 등)에 관한 엘리아데의 미학관을 살필 수 있는 책이다. 다만 표지가 너무 단순하고 밋밋한게 아쉽다.

 

 

 

 

 

우리나라 학자의 책 중에서 엘리아데에게 빌려 온 시선이 느껴지는 책 두 권이 눈에 띈다. <엘리아데.신화.종교>는 독문학 교수의 책으로 앞부분은 신화의 일반성을 살핀다면, 뒤로 갈수록 엘리아데의 사상을 비평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보인다. 는 엘리아데의 <우주의 역사 : 영원회귀의 신화>라는 책을 전에 번역하기도 했던 정진홍 교수의 책이다. 종교학자로 우리나라에서 많이 알려진 분인데, 이 책은 엘리아데의 주요 개념을 간략하게 집어내고 있다. 독자적인 저술 활동도 활발한데, '종교문화'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보여준다. 특히 우리 사회 현실과도 연관짓는 실천적인 태도도 엿볼 수 있다.

내 책장엔 엘리아데의 책이 제법 많이 꽂혀 있다. 첵에 주술을 부렸는지 당장 읽을 것도 아닌데, 그의 이름만 보고 산 책도 여러 권이다. 그 남자의 글에선 왠지 여성적인 아우라마저 느껴질 때가 있다. 글의 굴곡이 크지 않은 편이라 그 단조로움이 여러 심도 깊은 빛깔을 얌전하게 품고 있으면서도, 살며시 앉아 있는 듯이 보이기에 지루함마저 주기도 한다. 하지만 별거 아닌 내용이나 소재를 가지고 문체의 화려함으로 독자를 희롱하는 글보다 차분하게 곱씹으면서 그 단조로움 안에 깃든 빛나는 것들을 끄집어내길 기다리는 책들도 있을 것이다. 엘리아데의 책을 담금질 하듯 읽다보면 그런 연성효과가 나오지 않을까?

엘리아데는 소설도 꽤 많이 썼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아마 <만툴리사 거리>, <벵갈의 밤> 정도가 소개된 거 같다. 그런데 이마저도 절판, 품절이라 구하기 어렵다(만툴리사 거리>는 대형 인터넷 서점에 아예 정보조차 뜨질 않는다). 그의 소설들도 번역되거나 재출간되어서 어떤 문학의 맛을 가졌는지 알려주길 바래 본다.   

 며칠 전에 엘리아데의 나라인 루마니아 영화를 봤다. 루시안 핀틸리에(Lucian Pintilie) 감독의 '떡갈나무(Balanta'1992)'라는 영환데, 우리한테 익숙한 유럽 영화하고도 뭔가 좀 느낌이 달랐다.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슬픔은 우연한 사건들(편집이 강약 조절 하듯 불규칙한 맛도 나는데, 그것이 이 영화에 생기를 주는 효과도 있다)에 의해 오히려 해학적으로 분산되면서도 결국은 어떤 하나의 과정(아버지를 위한 딸의 여정)은 끝마친다. 약간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감독 영화와 비슷한 느낌도 나는 거 같다. 어떻게 보면 엉뚱한 것들이 끼어들어 영화의 흐름을 산만하게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묘하게 하나의 활력에 이끌리듯 고비를 넘긴다. 대사 중에 흥미로웠던 건, 시골 마을에서 저녁에 주민들이 TV에서 해주는 한국 영화를 보러 온다는 부분이다. 엘리아데의 루마니아 그리고 한국이 겨우 겨우 하나의 점으로 만난 사소하지만 신선한 장면이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리쾨르 철학의 결산

지난번 <번역론>(철학과현실사, 2006)에 이어서,작년에 세상을 뜬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1913-2005)의 책이 한권 더 출간됐다.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동문선, 2006). 이번 책은 <번역론> 같은 팜플렛 분량이 아니라 500쪽에 육박하는 주저이다. 리쾨르 전공자인 윤성우 교수가 <해석의 갈등>(살림, 2005)에 적어놓은 바에 따르면, "리쾨르 스스로가 자신의 모든 철학적 작업의 결산 내지 종합이라고 규정한 저작"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니까 '단 한권의 리쾨르'를 꼽으라면 꼽을 수 있는 책인 것!

 

 

 

 

왜 그런가? 윤교수의 설명을 조금 더 따라가면, "이 저작은 저자가 그간 보여준 의지의 문제, 상징과 텍스트의 문제, 윤리의 문제, 존재론의 문제 등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며, 인간의 자기 이해와 해석이 거쳐야 할 단계와 과정을 점진적으로 그리고 다른 인문학의 연구 성과와 대화를 통해 통찰력 있게 보여준다. 우리는 이 저작을 통해 리쾨르가 가진 현대 철학 전반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과 해결에의 노력과 시도를 만나게 된다. 가장 먼저 번역되어야 할 책으로 평가되지만 아직 국내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해석의 갈등>, 189쪽)

하지만 이제 그 '사정'이 달라지게 된 셈. 번역의 성패와 무관하게 일단의 역자의 노고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바라는 건 역자의 '대표작'이 되었으면 한다). 어쨌든 '결산'이란 말이 나온 김에 리쾨르의 저자들을 연대순으로 한번 되짚어보도록 한다. 서지는 위키피디어의 리쾨르 항목에서 옮겨왔다(인용부호 안의 말은 윤성우 교수의 해제에서 따온 것이다). 주로 영역본 제명으로 돼 있는데, 괄호안의 연도가 불어본이 처음 출간된 해이다.

-Gabriel Marcel and Karl Jaspers. Philosophie du mystère et philosophie du paradoxe. Paris: Temps Présent, 1948.

-Freedom and Nature: The Voluntary and the Involuntary, trans. Erazim Kohak.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66 (1950).(*리쾨르의 박사학위논문이자 첫번째 주저. <의지의 철학1: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이라 흔히 옮겨지는데, "프랑스 반성철학의 중요한 철학적 문제인 자유의지, 죽음, 생명, 신체, 무의식, 탄생 등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저작"으로서 "리쾨르 철학을 알기 위한 필독서이고, 프랑스 철학의 입문을 위한 핵심적 저작".) 

 

 

 

 

-History and Truth, trans. Charles A. Kelbley.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65 (1955).(*국역본: <역사와 진리>(솔로몬, 2002). 참고로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Fallible Man, trans. with an introduction by Walter J. Lowe,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86 (1960)(*<악의 상징>과 함께 <의지의 철학2>를 구성하는 책.)

 

 

 

 

-The Symbolism of Evil, trans. Emerson Buchanan. New York: Harper and Row, 1967 (1960).(*국역본: <악의 상징>[문학과지성사, 1994/1999]) 

-Freud and Philosophy: An Essay on Interpretation, trans. Denis Savag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0 (1965).(*원제는 <해석에 관하여: 프로이트 시론>이며, "<악의 상징>과 함께 해석학자로서의 리쾨르의 진면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저작." 라캉의 적대적인 비평 때문에 리쾨르에게 상처를 안겨다준 책이기도 하다.)

 

 

 

 

-The Conflict of Interpretations: Essays in Hermeneutics, ed. Don Ihde, trans. Willis Domingo et al.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4 (1969).(*국역본: <해석의 갈등>[아카넷, 2001]. 자타가 공인하는 리쾨르 해석학의 주저.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과 흔히 비교된다.)

-Political and Social Essays, ed. David Stewart and Joseph Bien, trans. Donald Stewart et al. Athens: Ohio University Press, 1974.

-The Rule of Metaphor: Multi-Disciplinary Studies in the Creation of Meaning in Language, trans. Robert Czerny with Kathleen McLaughlin and John Costello, S. J.,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78 (1975).(*원제는 <살아있는 은유> 혹은 <생생한 은유>. 예전에 번역스터디를 한 경험도 있어서 개인적으로 출간을 가장 고대하는 책 두어 권 중의 하나이다.)

 

 

 

 

-Interpretation Theory: Discourse and the Surplus of Meaning. Fort Worth: Texas Christian Press, 1976. (*국역본: <해석이론>[서광사, 1998])

-The Philosophy of Paul Ricœur: An Anthology of his Work, ed. Charles E. Reagan and David Stewart. Boston: Beacon Press, 1978.(*영어본 리쾨르 선집)

-Theology after Ricouer, Dan Stiver, Westminster: John Knox Press.(* 이 책은 왜 들어가 있나?)

 

 

 

 

-Essays on Biblical Interpretati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0)(*리쾨르의 성서 해석에 대해서는 앙드레 라콕과 함께 쓴 <성서의 새로운 이해>(살림, 2006)을 참조할 수 있겠다.)

 

 

 

 

-Hermeneutics and the Human Sciences: Essays on Language, Action and Interpretation, ed., trans. John B. Thomps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국역본: <해석학과 인문사회과학>[서광사, 2003])

 

 

 

 

-Time and Narrative (Temps et Récit), 3 vols. trans. Kathleen McLaughlin and David Pellaue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 1985, 1988 (1983, 1984, 1985).(*리쾨르가 일흔의 나이에 출간하기 시작한 후기 대표작. 국역본은 1999-2004년에 완간되었다. 우리의 자기인식과 세계인식에 있어서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각인시켜준 책. 하이데거를 비틀어서 말하자면 인간은 '이야기-내-존재'이다. 참고로, 러시아어본은 2권까지 출간돼 있다)

-Lectures on Ideology and Utopia, ed., trans. George H. Taylo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5.(*리쾨르의 정치철학을 재구성해볼 수 있는 강의록. 대표적인 이데올로기 이론가들을 독해하면서 그들과 대결한다.)

 

 

 

 

-From Text to Action: Essays in Hermeneutics II, trans. Kathleen Blamey and John B. Thompson.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1 (1986).(*국역본: <텍스트에서 행동으로>(아카넷, 2003). <해석의 갈등> 속편. 완역되지 않은 것이 유감스럽다.)

-À l'école de la philosophie. Paris: J. Vrin, 1986.

-Le mal: Un défi à la philosophie et à la théologie. Geneva: Labor et Fides, 1986.

-Oneself as Another (Soi-même comme un autre), trans. Kathleen Blame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1990).(*이번에 나온 책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국역본을 주문해놓고 나는 오래전에 구해놓은 영역본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있다.)

-A Ricœur Reader: Reflection and Imagination, ed. Mario J. Valdes.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1.(*영어본 리쾨르 선집. 두툼하다.)

-Lectures I: Autour du politique. Paris: Seuil, 1991.

-Lectures II: La Contrée des philosophes. Paris: Seuil, 1992.

-Lectures III: Aux frontières de la philosophie. Paris: Seuil, 1994.

-The Philosophy of Paul Ricoeur, ed. Lewis E. Hahn (The Library of Living Philosophers 22) (Chicago; La Salle: Open Court, 1995)(*리쾨르의 철학을 조명하고 있는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논문모음집. 리쾨르가 자신에 대한 비평들에 직접 답하고 있다.) 

-The Just, trans. David Pellaue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1995).(*리쾨르의 정의론. 비교적 얇은 분량.) 

-Critique and Conviction, trans. Kathleen Blame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1995).(*대담집. 리쾨르 입문서로 유용하고 유익한 책.) 

-La mémoire, l'histoire, l'oubli. Paris: Seuil, 2000.(*리쾨르의 마지막 주저 <기억, 역사, 망각>. 지난 2004년에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이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바 있고 나는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다. 리쾨르의 '역사철학'이라 할 만한데, 일부가 재작년인가 계간 <세계의 문학>에 번역/소개된 적이 있다. 어쩌면 조만간 국역본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Le Juste II. Paris: Esprit, 2001.(*<정의2>. 이후에 리쾨르가 출간한 책이 <번역론>(2003)과 <인정의 여정>(2004) 등이다.)

06. 08. 16-17.

 

 

 

 

P.S. 리쾨르에 관한 국내 연구서로는 윤성우 교수의 책들을 비롯해서 김종걸, 정기철 교수 등의 책이 나와 있다. 한국해석학회의 논문집들에도 리쾨르에 관한 논문들은 여럿 찾아볼 수 있지만, 일반 독자라면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겠다. 대신에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에 실린 리처드 커니와의 대담을 추천한다.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한울, 1997)에도 리처드 커니의 개관이 실려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번역이 조야하다(원저의 2판도 나와 있는 만큼 개정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늙어가는 느릅나무들

재작년 8월말에 '번역의 속도에 대하여'란 모스크바 통신문에서 다루었던 내용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읽기에 앞서서 몇 마디 주절거린 것인데, 내용상 독립적이기에 아예 따로 떼놓으면서 제목을 따로 붙여둔다. '늙어가는 느릅나무들'은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자작시의 제목이다.

“신은 죽었다!”란 선언이 니체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 있지만, 알다시피 그때의 ‘신’이 뜻하는 것은 어떤 인격체가 아니라 초월적 의미(=기의)인바 우리에게 주어진 것, 즉 ‘이 삶’을 넘어서는, 혹은 ‘이 삶’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신은 죽었다!”라는 그 선언에는 함축돼 있다(“이게 다예요!”). 아무것도 없는 대신에 도대체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힘에의 의지’인바, 생물학 교과서적인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Eat, Survive, Reproduce”(먹고 살아남아서 자손을 퍼뜨리는 일) 외에는 따로 일이 없는 존재들이다(우리는 교량일 뿐이다). 그 ESR이 우리의 존재근거이자 원리이다. 너무도 단순하지만, 너무도 이해되고 있지 않은!



“자연은 잔인하기보다는 단지 무자비하고 냉담할 뿐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내용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선의도 악의도 없고, 잔인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으며, 단지 냉담할 뿐인 어떤 사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사람의 뇌 속에는 목적이 가득 들어있다. 어떤 사물을 보면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는 그것을 만든 동기나 이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목적에 대한 강박관념이 병적인 상태로 발전하면 그것을 편집증이라 부른다. 즉 실제로는 우연한 불운일 뿐인데도 그 속에 어떤 악의가 있지 않나 하고 의심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것은 목적이 있다는 생각에 깊이 사로잡힌 존재이기 때문이다.”(R. 도킨스, <에덴 밖의 강>, *<에덴의 강>으로 재출간됨)



하여간에 나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결코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우리의 몰이해 또한 ‘냉담한 무관심’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이다(진실 혹은 냉담!).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니체의 철학을 ‘아줌마 철학’이라고 부른바 있다(아줌마는 가족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가족 바깥은 없다!”). 니체는 자신을 경계로 하여, 철학사를 니체 이전과 니체 이후로 구분했는데, 그러한 구분을 조금 비틀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아줌마 철학을 경계로, 아줌마 철학을 문턱으로 하여 양분된다고. 아줌마 철학은 무엇과 경쟁하며, 무엇을 부정하고 거부하는가? 그건 형이상학으로서의 ‘이데아 철학’이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이데아 철학은 (유클리드)기하학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리고 기하학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우리 주변에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것들이다.

가령, 점이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한 도형으로서 점은 “위치만 있고 크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이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표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관념 속에만 있다. 우리가 종이나 칠판에 찍는 점은 모두 그러한 가상(=이데아)의 유사물이고 복사물일 뿐이다. 선이란 무엇인가? “한 점이 연속적으로 움직여 이루어진 자취”가 선인바, 그것은 “길이와 위치는 있으나 넓이와 두께는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런 선을 우리가 도대체 어디에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현실에서 그릴 수 있는 것은 고작 이데아적 선의 (넓이와 두께를 갖는) 유사물, 복사물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모든 도형이 본질상 가상적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이데아를 본질로서, 실재로서 전제할 때, 현실은 그 복사물이고, 복사물의 복사물이다. 그리고, 가장 어리석은 일은 이러한 복사물 내지는 복사물의 복사물을 진본(=오리지널)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동굴의 우화’는 바로 그러한 착각에 대한 우화이다.

 

 

 



진정한 어떤 것이, 현실 너머에 있다는 관념. 진정한 삶은 지상의 삶 이후에 온다는 관념. 그것이 바로 형이상학(=메타피지카)적 사유의 요체인바, 모든 것은 메타(meta), 즉 이것 ‘너머에’ 있고, 이것 ‘다음에’ 있다. “이게 다가 아니야!” 그것이 이데아 철학의 구호이다. 하지만, 다시 반복하자면, 아줌마 철학은 “이게 다예요!”라고 말하는 철학이다(그것이 여전히 철학이라면). 어째서 이게 다인가? ‘메타’라는 건 가상이고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즉, ‘메타’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캉 버전으로는 “메타언어란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필요하지도 않다. 이미 현실은 그 자체만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메타란 것은 (모자라는) 현실에다가 무엇을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고르지 않지만 충만한 현실을 대패로 깎아내서 판판하게(그래서 모자라게) 만드는 것이다. 곱슬머리를 다리미로 펴듯이.

 

 

 



칸트의 ‘보편 철학’과 니체의 ‘가치 철학’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칸트적 보편성은 차이를 지우고 개별성을 깎아냄으로써 얻어진다. 그에겐 남성과 여성이 철학적 주체로서 아무런 차이를 갖지 않는다. 실상 시계에 맞춘 듯이 똑같이 반복되던 그의 하루하루가 아무런 차이를 갖지 않는 ‘보편성’이었다. 하지만, 니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세상엔 고급하고 고귀한 존재들이 있는 반면에 저급하고 저속한 존재들이 있다고. 이 ‘적대적’ 차이는 결코 극복되거나 지양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성이란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일 따름이다. 존재하는 건 고르지 않은 차이들(=시점들)이고, 각각에 충만한 현실뿐이다.

니체 철학의 핵심은 철학에 ‘의미(Sens)’와 ‘가치’를 도입한 데 있다고 들뢰즈가 규정할 때, ‘도입’이란 말은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져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편)철학이 삶에서 깎아낸 의미와 가치를 다시 회복시킨다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시점의 변경 혹은 도약이 있다. 혹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다. 가령, 현대 물리학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칸트 대 니체'는 '뉴턴 대 아인슈타인'이다. 즉 철학에 의미와 가치를 도입한다는 것은 뉴턴의 절대적 시/공간 대신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시공간(=크로노토프)을 도입하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에 곡률을 도입함으로써 유클리드적 공간을 상대화함과 동시에 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하는 것, 그것에 견줄 수 있는 것이 니체 철학이 칸트 철학에 대해서 수행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때도 ‘도입’이란 것은 어떤 편의성 때문에 직선으로 간주(=계산)되었던 세상의 곡률이 회복되는 것이지,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적어도 상대성 이론이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면).

요컨대, 현실은 이미 의미-담지적이며, 세상은 이미 곡률-의존적이다(유클리드적-평면적 세계란 보편성의 세계가 아니라, 곡률=0인 특수성의 세계이다). 그러한 사정에 대해서 우리가 의미를 도입하고, 곡률을 도입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은 편의상의 이유에서일 뿐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 자체로 전부인 현실이란 무엇인가?

“모든 생명체가 자연이 갖고 있는 유전자 모두를 성공한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기 때문에 성공적인 유전자를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장차 조상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조상이 된다는 것은 살아남아 자손을 남긴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생물들이 훌륭하게 설계된 기계를 만드는 유전자를 물려받는 경향이 있는 이유이다. 그것은 바로 새는 왜 잘 나는가, 물고기는 왜 헤엄을 잘 치는가, 원숭이는 왜 나무를 잘 타는가, 바이러스는 왜 잘 번식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그것이 바로 왜 우리가 삶을 사랑하고 섹스를 좋아하며 아이를 사랑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이 세상은 장차 조상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다위니즘(Darwinism)이다.”(R. 도킨스, <에덴 밖의 강>)

 

 



 

반복하자면, 우리는 “Eat, Survive, Reproduce”(먹고 살아남아서 자손을 퍼뜨리는 일) 외에는 따로 일이 없는 존재들이다(우리는 교량일 뿐이다). 그 ESR이 우리의 존재근거이자 원리이다. 인간이 ‘의미의 질병’을 앓는 동물인 것은, 그러한 ESR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는 이걸 우리의 대뇌가 급속하게/불완전하게 진화한 결과로 본다(보다 근본적인 건 언어 때문이다. 언어는 ‘의미의 질병’을 낳는 산파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그건 상당히 덩치가 큰 문제이기 때문에).

니체의 표현대로, 우리의 위장을 닮은 대뇌가 해야 할 일은 위장과 마찬가지로 ‘소화작용’일 뿐이며, 그러한 작용으로써 우리를 생존하게 하고 기운 나게 하는 것뿐이지만, 이 대뇌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소화해낼 수 없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는바, 그것은 “What’s it all about?”(이게 다 무슨 수작일까? 혹은,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에의 물음이다.

알다시피 형이상학의 표준적인 물음은 “What is it?”, “그것은 무엇인가?”이다(WIT라고 부르자). 그 물음은 ‘무엇을 넘어선 무엇’에 대한 물음이다. 이것은 달리 목구멍에 걸리는 물음(=뼈다귀)인바, 이 물음을 떠안게 되면서부터, 혹은 이 물음(=뼈다귀) 자체로부터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병든 인간’이다. 즉 그 물음으로부터 인간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인간은 ‘무엇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엇을 넘어선 무엇들의 세계’에 살게 된 것. 즉 그는 양다리를 걸치기 시작한 것이다. “삶은 다른 여자에게 있다!”).



생각건대, 모두가 ESR에 몰두할 때, 어느 날 문득 이 물음을 처음으로 던진 인간은 위트 있는 인간이었음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병적인 인간이었다. 문제는 이 WIT가 상당한 전염성을 갖고 있다는 것(역시 언어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일본의 ‘이모 원숭이’가 모래 섞인 모이를 바닷물에 던져서 모이만을 골라내는 방법을 ‘발견’한 이후에 이것이 원숭이 사회에 ‘문화’로 전파되었던 것처럼. 한 ‘위트 있는 이모’가 발견했을 이 물음은 인간의 문화를 병든 문화, 병적인 문화로 변모시켰다(종교사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역사이면서 동시에 병리학사 아닌가? 모든 종교의 전제는 삶=질병이라는 것이니까. 그래서 치료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하다는).

 

 

 



그리하여 ‘병든 인간’은 ‘병든 인간들’이 되었고, 언젠가부터 인간 자체가 돼 버렸고, 인간 자체의 존재방식이 돼 버렸다. 해서, 원래의 병들지 않은 인간, 위트에 물들지 않은 인간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에 붙여진 이름이 초인(=위버멘쉬)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인간은 인간을 극복함으로써만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호모 로쿠엔스가 극복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하지만, 그건 오직 언어를 통해서일 것이다!), 이젠. 초인(=위버멘쉬)에 대한 구구한 설들이 있지만, 내가 이해하는 바의 초인은 병들지 않은 인간, 건강한 인간, 그래서 ‘현재의 이 삶’을, ‘이 모양’을 긍정하는 인간이다. 즉 그에게 다른 삶은 없다(“삶은 다른 곳에 없다.”). 모든 남자는 ‘이 남자’이고, 모든 여자는 ‘이 여자’이다(해서 “세상에 옛 애인이란 없어요!”).

헤겔의 말을 비틀면, 초인, 그는 “현실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이며, 긍정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아무런 부정도, 비판도 않는 니체는 보수적인가? 결코 아니다. 역시 헤겔의 예를 따라서, 니체 우파가 “현실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면(이들의 구호는 “이대로!”이다), 니체 좌파는 “긍정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즉,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현실이 아니며, 현실은 긍정적인 것일 때 비로소 ‘현실’이다)이라고 주장한다. 니체는 현실에 맞서는 어떠한 가상(illusion)도 거부하는바, 진정한 빛은 현실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발하는 빛이다.

요컨대, 인간과 초인, 혹은 병들고 나약한 인간과 씩씩하고 건강한 인간이 있다. 전자가 중언부언하면서 수사적으로 말한다면, 후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동어반복적으로 말한다. “나는 나야!”라고. 먹는 건 먹는 거고, 싸는 건 싸는 거고, 싸지르는 건 싸지르는 거라고.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자들은 부득이 위트를 섞어서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우리 사는 날들이 전부는 아닐 거라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당신은 어느 쪽인가, ESR의 편인가, WIT의 편인가?(혹은 생각 없는 편인가, 생각만 많은 편인가?)



두서없는 말이 많았는데, 요점은 니체 철학의 의의이며 니체를 읽을 필요성이다. 니체를 읽는 재미는 정신의 스트립 쇼를 보는 재미이다. 그는 고상한 체하는 우리의 정신을 발가벗긴다. 그리고 말한다. “이거예요, 이게 다예요!” 그런 점에서 니체는 유머러스하다고 말하고 싶다(이때의 유머는 형이상학의 ‘위트’와 대조되는 것이다). 이 유머는 니힐리즘의 유머이다. 니힐리즘에서 니힐(nihil), 즉 무(無)가 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더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가치나 권위도 니힐리즘은 부정하는바, 그것은 그러한 가치/권위가 부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존재 혹은 사실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더불어,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그러니까 어떤 존재가 고귀해지는 것이 아니라(고귀한 의미를 부여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고귀한 존재가 있는 것이다. 어떤 존재가 저속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저속한 존재가 있는 것이다. 그건 당신이 머리를 싸맬 일이 아닌 것. 그냥, 멍게가 있고 해삼이 있듯이(멍게적인 해삼과 해삼적인 멍게가 있는 게 아니라), 쏘가리가 있고 왜가리가 있듯이(거기에는 물론 매운탕도 있다), 제법 있는 것들이 있고, 또 없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찬 것들이 있고, 빈 것들이 있는 것이다(“빨간 우산, 노란 우산, 찢어진 우산…”).

중요한 건, 그걸 당신이 긍정하느냐 마느냐이다(기독교 버전으로는, 보기에 좋으냐 싫으냐). 긍정? 그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정도의 긍정을 말한다(다시 태어나도 이 남자/이 여자를?!). 그러니까 그럭저럭 보기에 괜찮은 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에 이르는 여정(“높다란 학교길”)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닌 것이다(그런 생각만 하면 나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어쨌든 그런 확정/판결(“나는 나다!”)을 통해서, 우리는 제 자리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다. 인간이란 가면을 벗어 던지고, 혹은 양의 탈을 벗어 던지고, 늑대에서부터 성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같은 놈’이란 딱지를 떼고서 정말로 무엇임을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그레고르 잠자처럼 말이다). 나-말미잘, 나-촌닭, 나-너구리를 거쳐서, 나-거머리, 나-하이에나, 나-청소부, 나-나폴레옹, 나-아저씨, 나-아줌마, 나-세컨드, 나-어리버리에 이르기까지. 왜 동물성뿐이겠는가? 나-콩알, 나-잡초, 나-호박, 나-해바라기, 나-물망초, 나-도깨비풀, 나-옥수수, 나-고목나무, 나-가여운 풀벌레 등등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이들의 쟁투이고 합창이다(“우산 셋이 나란히, 티격태격 걸어갑니다”). 그런 세상에 대한 ‘인식’을 나는 예전에 몇 편의 시들로 옮긴 적이 있다. '늙어가는 느릅나무들'은 그 중 하나이다.

 

 

 



느릅나무는 다형질적이다, 다형질적 조합이다.
여럿이 나란히 도열한 느릅나무들, 은
제각각 나이를 먹는다, 나눠먹지 않는다. 어릴 적
느릅나무는 무얼 모르는 느릅나무, 물정에
눈을 부릅뜨면서 느릅나무 뿌리가 조금씩 굵어지면서
느릅나무는 다혈질적이다, 다혈질적 조합이다.
여럿이 나란히 도열한 느릅나무들, 은
제각각 느릅나무를 꿈꾼다, 꿈으로 무장한다.
극좌와 극우의 곁가지들을 모두 가지치기한
중도적인 느릅나무, 중도좌파적인, 중도우파적인
느릅나무, 옆에 다소곳이 신파적인 느릅나무,
신좌파적인, 신우파적인 느릅나무, 들
저마다 한 그루의 느릅나무 이상을 꿈꾼다.
느릅나무의 극복을 꿈꾼다. 꿈꾸며
아, 이 겸손한 느릅나무들! 물길을 찾고
햇빛을 쬐고 탄산가스를 마시며 부지런히
동화작용한다, 작용하며 늙어간다. 어릴 적
여럿이 나란히 뿌리내린 그 자리들에서
제각각 비틀리고 말라가며 쪼그라진다.
곧 느릅나무 조합에서 제명된다.

느릅나무는 다형질적이다, 다형질적 조합이다.
여럿이 나란히 제각각 살아남는 느릅나무들-



다시 반복하자면, “모든 생명체가 자연이 갖고 있는 유전자 모두를 성공한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기 때문에 성공적인 유전자를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쩔 건가요?” 우리가 목적이 아니라 교량이고, 과정이며 몰락이라는데(도킨스 버전으로는 ‘유전자 운반체’), 어쩔 건가요? “어쩌긴요, 더없이 유머러스한 일인 걸요! 어쩜 그럴 수가!..”

06. 06. 08.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arlee4 2015-01-1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입체적인..줌이 살~아있네.ㅎ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52)

비가 제법 많이 내리는, 어느덧 9월의 마지막날이다. 지난번 연재의 글을 쓴 게 '그 여름의 끝'이었는데, 그 새 한달이 지난 것. 10월의 마지막 날(정확히는 '밤')만큼 운치가 있거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9월의 마지막 날을 '기념'해서 몇 권의 책을 꼽아본다. 사실 지난 한달은 지난 2월에 귀국한 이래 나의 취향에  맞는 책이 가장 적게 출간된 달이기도 하다. 해서, 이 연재가 다소 늦어진 것은 나의 게으름과 무관하다는 걸 미리 알려드린다(소수의 애독자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첫손가락에 꼽고 싶은 책은 브라이언 매기의 <트리스탄 코드>(심산)이다. '바그너와 철학'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데, 소개에 따르면 "바그너의 음악에 미친 철학의 영향"을 주로 밝히면서 "그 영향이 그의 오페라 -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파르지팔', 그리고 특히 '니벨룽의 반지' - 에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보여준다." 계속 옮겨오자면, "또한 지은이는 예술적 천재인 바그너뿐만이 아니라 역겨울 정도로 심한 편집증과 이기주의 성향을 지닌 바그너까지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바그너가 어린 니체와 나눈 길고도 친밀한 친교와 영향 관계도 다루고 있다. 그 다음으로 저자는 바그너가 가장 크게 오해받는 나치와의 연관이 허상이라는 해명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다."

알다시피 지난 토요일부터 어제까지 러시아의 거장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가 국내 초연되었다(4부작의 18시간짜리 공연).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규모나 지명도로 봐서는 '올해의 공연'으로 꼽힐 만한 대작이다. 이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이 달에는 바그너와 그의 오페라에 관련된 책들이 몇 권 출간됐고, <트린스탄 코드>도 그 중 하나이다. 일단 시의성이 있는 책. 게다가 나로선 저자의 책들을 읽어본 경험이 있어서 친숙하고 또 600쪽이 넘는 분량도 미덥기 때문에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게 된다.

저자인 브라이언 매기는 전형적인 옥스포드 철학자라는 인상을 주는데, 내가 읽어본 그의 책은 <현대 철학의 쟁점들은 무엇인가>(심설당, 1989)란 두툼한 책과 <칼 포퍼>(문학과지성사, 1982)란 얇은 책이다(내가 읽지 않았지만, 철학입문서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시공사, 2002)도 나와 있다. 원제는 '철학 이야기'). <현대 철학의 쟁점>은, 기억에 여러 철학자/작가들과 나눈 방송대담인데, '철학과 문학'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영국 최고의 지성파 여성작가 아이리스 머독과 나눈 대담을 기록하고 있다. 철학입문서로 추천할 만하다.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서 문외한이기 때문에, 니체와의 관련(<바그너의 경우>)을 제외하면 바그너란 이름이 내게 떠올려주는 이는 대학 1학년때 교양영어를 강의하신 시인-교수님이다. 교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이 괴물-천재 음악가 바그너에 관한 에세이였고, 그걸 빌미로 해서 바그너와 그의 음악세계에 대해 귀동냥을 했던 것이 바그너에 대한 나의 상식/교양의 8할을 차지한다. 나머지 2할?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주제음악(바그너와 영화음악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단골 레퍼토리이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바그너'의 거의 전부인바, 작년에 나는 이 영화의 러시아판 비디오CD(감독판)를 사서 보기도 했다. 혹 10년쯤 후엔 <니벨룽의 반지>를 '경험'하고픈 욕심과 여유를 갖게 될는지 모를 일이다.(한편, 1952년에 독어본이 나왔던 아도르노의 바그너론이 <바그너를 찾아서(In Search of Wagner)>란 제목으로 1981년에 영역됐었고, 올해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의 서문은 '오페라광' 슬라보예 지젝이 쓰고 있다).  

 

두번째 책은 미술에 관한 것이다. 스티븐 컨의 <문학과 예술의 문화사 1840-1900>(휴머니스트). 원제는 '사랑의 눈길들: 1840-1900년 영국과 프랑스의 회화와 소설에 나타난 시선'이다. 원제는 책의 내용과 주제에 대해서 대부분을 이미 말해주는데, 작년에 나온 같은 저자의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휴머니스트)와 짝을 이루는 책이다. 저자는 "19세기 문화의 중심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회화와 문학 속 '남녀의 시선'에 주목"하며,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에서와 마찬가지로 "19세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고 전방위적으로 조명하는 솜씨를 보여준"다고.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조지 엘리엇, 토머스 하디, 샬럿 브론테 등의 시와 소설, 그리고 130여 점의 고갱, 르누아르, 드가, 마네, 밀레이, 로세티, 티소, 번 존스 등의 회화 작품들이 풍성하게 등장"한단다. 그러니 19세기 문화사 도감으로라도 서가에 꽂아둘 만하지 않은가? 참고로 20세기 프랑스 철학에서의 시선의 문제를 다룬 책으론 마틴 제이의  <내리깐 시선(Downcast eyes : the denigration of vision in twentieth-century French thought)>(1993, 632쪽)이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일종의 지성사. 마틴 제이는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1950>(돌베개, 1981)의 저자이다.

 

 

 

 

세번째 책은 세 권의 시집이다. <유랑시인>(한길사)은 "우크라니아의 역사와 시정(詩情)을 탁월하게 묘사해 우크라이나의 국민시인으로 추앙받는 타라스 셰브첸코의 대표 장시(長詩) 21편을 엄선해 묶은 책. 맑고 순수한 개인적 정서를 노래한 서정시나 환상적 담시뿐만 아니라,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는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현실을 소재로 삼거나 억압적 정치 체제와 농노제를 반대하는 혁명적 정치사상을 담고 있는 주요 시들을 싣고 있다." 더불어 꽤 많은 분량의 충실한 해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평전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고. 작년인 2004년 겨울 '오렌지 혁명'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우크라이나는 얼마전 유센코(유시첸코) 대통령이 혁명의 동지이자 상징이었던 티모센코 총리와 갈라섬으로써 다시금 외신란에 오르내렸는데(정치의 꽃 또한 '화무십일홍'이다), <유랑시인>은 좀 다른 역사적 맥락과 시각에서 우크라이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줄 듯하다.

 

 

 

 

 

참고로, 우크라이나 출신의 가장 위대한 작가는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이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썼다. 그는 우크라이나 민속과 민담을 소재로 한 <지칸카 근촌 야화>(8편의 이야기 가운데, 6편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절판됐다)로 러시아문단에 데뷔하게 되며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대장 불바(불리바)>를 쓰기도 했다(우리에겐 주로 '아동물'로 소개돼 있다). 드라마작가로서의 그의 대표작은 <검찰관>(1836)인바, 이 책은 얼마전에 새 번역본이 출간됐다(조주관 역, 민음사). 그리고 이 작품은 10월에 러시아의 저명한 연출가 발레리 포킨이 이끄는 알렉산드린스키 극단에 의해 '(수원)경기도문화의전당'과 '(서울)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다. 포킨의 <검찰관>은 1910-20년대 혁신적인 연출가 메이에르홀드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메이에르홀드의 <검찰관> 초연은 지난 1926년 겨울에 있었고, 벤야민은 그 공연을 직접 본 소감을 <모스크바 일기>(그린비)에 간단히 적고 있다(이 '전설적인' 공연에 대해서 벤야민이나 당대 관객들은 다소 불만이었는데, 배우였던 메이에르홀드의 아내가 너무 '설쳤다'는 것도 불만의 한 이유였다). 나는 오늘 포킨의 공연을 예매했다. 

 

 

 

 

두번째 시집은 한국계 러시아 음유시인 율리 김의 내한공연에 맞춰 출간된 <율리 김, 자유를 노래하다>(뿌쉬낀하우스)이다. 공연은 10월말로 예정돼 있는데, 이번에 나온 시집에는 그의 음반 2장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율리 김이란 이름을 나는 작년에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처음 듣게 되었는데, 한국계 가수로는 대중가요를 부르는 '아니타 최'(빅토르 최와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이름 자체는 빅토르 최를 연상시킨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요절한 로커 빅토르 최는 러시안 록의 '전설'이다)와 함께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후반 러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음유시인은 아르바트거리에 동상이 세워져 있기도 한 오쿠자바(아꾸자바)이다. 그의 시집은 <나의 사랑, 나의 인생>(새미, 2001)으로 번역/소개돼 있다. 오쿠자바가 서정적이라면 내가 TV에서 자주 들은 율리 김의 노래는 경쾌하면서도 서정적이고 유머러스했다. 동시대 러시아 음유시인의 계보를 한국계 러시아인이 잇고 있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일이다.

 

 

 

 

세번째 시집은 평론가를 겸하고 있는 권혁웅 시인의 <마징가 계보학>(창비)이다. 오늘자 한겨레의 북리뷰란에서 크게 소개된바 있으므로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겠다. 그 리뷰는 '산동네의 추억, 아픔 삭인 너스레'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요즘시의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하는 '추의 미학' 혹은 '엽기시'로부터 그의 시들이 한 걸음 떨어져 있다는 걸 암시받을 수 있다. 최재봉 기자의 연상대로, 시집은 유하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같은 시집들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권혁웅은 '성북구 삼선동' 키드쯤 된다. 삼선동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70년대말 서울 산동네의 풍경이라는 것은 어림짐작할 수 있는 바다. 산동네 이야기라는 점에서 최기자는 이번 시집을 요절 작가 김소진의 <장석조네 사람들>의 시적 버전이라고도 평한다. 아무려나 그 시절, 그 동네의 얘기가 마음을 잡아끌 만한 독자들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 권혁웅보다 내게 익숙한 건 평론가, 혹은 문학연구자 권혁웅이다. 나는 그의 학위논문이기도 한 <한국 현대시의 시작방법 연구>(깊은샘, 2001)를 좀 읽어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은유, 환유, 제유라는 세 가지 수사학(적 전략)으로 한국 현대시작법의 계통을 세우려고 시도했다. 적어도 나의 견문으론 우리시 연구에서 시의 의미론이나 주제론 이전에 통사론에 주목하고 이를 자세하게 분석해 들어가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것이 전문연구서들을 그닥 많이 들여다보는 편이 아니면서도 그의 책을 사서 읽어본 이유이다.(한편으로 얼마전 나는 한 술자리에서 이 시인-평론가와 몇 마디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엽기시' 계열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푸근하고 마음씨 좋은 시인이었다. 단, '고스톱에 관한 보고서' 같은 제목의 시들로 미루어보건대, 그와 고스톱을 치는 것만은 삼가해야 할 듯. 짐작에 그는 마음좋게 피박, 광박 다 덮어씌울 '실력자'이므로).  

 

 

 

 

 

다시 책얘기로 돌아와서, 네번째 책은 원로 철학자 박이문 선생의 <논어의 논리>(문학과지성사)이다. 그의 <노장사상>(문학과지성사, 2004, 개정판)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번의 '논어 이야기'에도 눈길이 갈 만하다. 저자가 비록 서양철학 전공자이긴 하나 글에서 논리(로고스)를 끌어내는 일에서 동서양의 분별은 사소하다. 고려대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는 이승환 교수는 "나 자신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거울을 필요로 한다. 때로 거울은 내가 모르고 지내던 나의 모습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박이문 교수의 <논어의 논리>는 정작 우리 자신이 모르고 지내던 <논어>의 가치를 새롭게 드러내주는 거울과도 같은 책이다."라고 추천하고 있기도 하다. 너무도 많은 '논어'들 가운데, 분량이 가장 컴팩트하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우리도 때로는 얇고 투명한 책들을 읽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논리'를 다룬 책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김경만 교수의 <담론과 해방>(궁리). '비판이론이 해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국내에서 나온 책으론 드물게도 서구 사회학 이론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지식인이 이론적 비판을 통해 사회.정치.문화적 변동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믿음'이 강조되어 왔다고 지적하고, 이렇게 우리가 당연시하는 지식인들의 사회적.정치적 역할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상정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의 말을 좀더 옮기면, "우리는 이제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적 논의를 사회나 정치개혁에 도움이 안 된다는 구실로 외면하면서 하버마스 같이 평생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을 추구해 온 이론가들을 한편으로는 존경하고 대접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버려야 할 때가 됐다" 더불어, "독자적 한국사회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서양의 이론에 의존해왔다는 자성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그들 이론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그들과의 '비판적 대화'를 유도해냄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비판적 대화'의 시도인 셈.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출간된 이 책에 대한 반응은 뜨거운 듯하다. 단적으로 대가급 철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의 추천사는 이렇다(바우만의 책들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김경만은 <담론과 해방>에서 우리 시대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이 극복하려고 했던 장애물들, 즉 그들이 제기했지만 결국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던 문제들, 또한 그들의 저작에서 제기되었어야 했지만 그들이 피하거나 간과했던 문제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폭넓게 분석하고 있다. 지식이 가지는 윤리적 영향력과 지식이 인간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진 어느 누구도 김경민의 분석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를 풀려는 미래의 모든 시도는 이 책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비판적 대화'의 물꼬는 트인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만 교수의 다른 책으론 작년초에 나온 <과학지식과 사회이론>(한길사)과 번역서 <지식과 사회의 상>(한길사, 2000)이 있다. 그런 '전력'에서 알 수 있지만, 저자는 과학/이론 사회학에 정통한, 한국에서는 좀 희귀한 사회학자이다. 참고로,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도전적인 자세로 '이론 다시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책으론 두달쯤 전에 나온 산본마쓰의 <탈근대군주론>(갈무리)도 기억해둘 만하다. 나는 이 책의 번역서가 나오자마자 원서를 도서관에 주문해놓았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마도 겨울쯤에나 읽어보게 될 듯하다. 그래, 그렇게 또 겨울이 올 것이다. 이 가을이 지나가면...

05. 09. 30.

 

 

 

 

P.S. 다섯 권에 꼽지는 않았지만, 눈에 띄는 책 중의 하나는 로베르 마조리의 <동물원에서 사라진 철학자>(마티)이다.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는 책으론 좀 특이한데, "책에 실린 33개 항목들은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이나 촌극을 찍은 즉석사진과도 같다. 그 안에서 철학자는 특정 동물들에 대해 말하는데, 때로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어리석은 소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새나 개나 옴벌레를 묘사하면서 사상의 본질을 몇 마디 우화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힐데가르트는 고래를, 칸트는 코끼리를 전설의 동물처럼 생각했다. 디오게네스는 낙지를 먹다가 개에게 물려죽었다는 일화가 있고, 루소는 오랑우탄을 일종의 유사 인류로 보았다. 소크라테스의 전기가오리나 니체의 사자는 그들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호라 할 만하다. 저자는 농담을 하는 척하면서, 한 철학자의 사상 세계를 슬쩍 일별하게 한다."(저자에 따르면, 들뢰즈/가타리는 '진드기', 데리다는 '고양이'와 짝지을 수 있다.) 

재치가 돋보이는 경쾌한 책인데, 프랑스에서 2005년 2월에 발간된 이 책은 2004년 7월 19일부터 8월 28일까지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 시옹'에 여름 특집으로 연재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얇은 분량이긴 해도) 굉장히 빨리 번역/소개되는 셈. 특별히 이 책이 눈에 띈 것은 책의 몇 장을 몇 달 전에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인즉슨, '저명한' 역자께서 몇몇 장의 검토를 의뢰해오셨기 때문인데, 돌이켜 생각하면 과분한 일이었다. 내가 의견을 덧붙일 만한 여지가 없는 깔끔한 번역이었기에...

그나저나 '동물원에서 사라진 철학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건가? 이들을 다시 데려와야 하나? 이젠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수의학도 배워야 하는 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