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지음, 이상원.조금선 옮김 / 황소자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나도 일종의 시간관리에 대한 자기계발서로 알고 이 책을 구입했다. 하지만 책의 내용 중에서 사실 시간 관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시간을 일일히 측정하고 통계를 낸 일기를 썼다는 것을 간단히 기술하는 외에는 그 시간측정법을 특별히 자세하게 소개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선택에 비교적 만족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류비세프의 시간 관리법보다는 오히려 그 시간관리법을 창안해 내게 된 류비세프의 지적 열정에 더 흥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류비세프는 내가 평소에 추구하던 목표를 실제 삶으로 살아낸 사람이었다. 본문에서 류비세프는 자신을 딜레탕트, 즉 지적 전문가가 아니라 지식을 마치 음식 맛보듯이 음미하는 지(知)도락가로 인식하고 있다.

인간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면 한 분야에 대한 깊은지식을 가지는 전문가, 스페셜리스트와 다양한 분야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또 그러려고 노력하는 제너럴리스트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간 사회는 전문가를 원하고 어느 한 분야에서 성공한 인물을 칭송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단지 지식에 대한 욕구, 어느 한 분야의 지식이 아닌 인류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모든 지식에 대한 욕구가 항상 샘솟는 인간형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나는 류비세프가 바로 이러한 인간형이라고 생각한다. 류비세프도 자신의 전문분야인 곤충분류학에서 성공하고 싶었을 것이고 자신을 앞서가는 소위 전문가 친구들을 보며 시샘의 감정도 가졌음 직하다. 하지만 류비세프에게 인류가 쌓아놓은 지식은 모두가 경외의 대상이었고 류비세프의 지적 호기심을 항상 자극하는 충동의 근원이었다. 이는 칸트의 철학에 대해서 류비세프가 100쪽 이상의 논문을 써놓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류비세프는 염소자리다. 별자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류비세프의 철저함을 해석할 방식을 찾다 보니 그의 태양별자리와 직관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염소자리의 철저함을 지닌 류비세프가 쌍둥이자리적 딜레탕티즘을 선호할 때 나올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전문가적 딜레탕티즘이다. 철학과 문학을 포함해서 인류가 남긴 거의 모든 지적 유산을 탐사하되 단지 뷔페식 맛보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전문가 수준으로 탐사하자는 것이다.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 지인들과 나눈 편지의 대화가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작가가 밝히듯이 류비세프는 소위 천재가 아니었다. 물론 류비세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여기에서 류비세프는 그냥 평범한 곤충분류학자로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류비세프는 자신의 무한정한 지적 열정에 굴복했고 전문가적 철저함과 딜레탕트적 전방위성을 조화시킬 대안을 내놓았다. 그것이 바로 류비세프의 시간통계 기법이다. 류비세프의 철저한 시간통계 기법은 바로 이러한 지적 열정과 철저함의 조화를 위한 그의 고육책인 셈이다.

세상에는 지적 딜레탕트가 많지만 단지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인정하긴 싫지만 나도 이런 류에서 아직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딜레탕티즘을 철저하게 실천한 류비세프의 열정적 삶은 나의 오래된 의문을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흥미롭지만 본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삶의 예로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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