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령의 시간 ㅣ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평점 :
무력으로 무기력해지는 경험을 해 본 적도, 전쟁의 상흔으로 뼈가 시려 본 적도 없는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나이가 들어가며 감히 공감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어 간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시간들.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상상 속에서나마 허공에 손짓하듯 그려볼 수 있는 그 세월을 견뎌 온 이전 세대의 고백을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역사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가까운 시대의 경험을 온 몸으로 받아 냈던 그 이야기가 소재로 오를 때마다 부모가 되고 나이 들어간다는 핑계로 감히 눈물짓게 만듭니다.
* 아버지의 이름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희생적인 부모님의 모습. 우리의 근현대사를 지나온 부모님의 모습은 그 어떤 시대보다 더 가슴이 아릿해져 오게 보여집니다. 그래도 그 세월을 내 자식들이 겪지 않고 내가 겪어 다행하다 했던 ‘국제시장’ 속 주인공의 대사가 아버지로서의 이 세월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늘 하는데요.
이섭도 아버지이기에 말 없이 그 시간들을 견뎌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결과들이 나의 전부인 가족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은 온전히 내가 겪어 내는 고통보다 더할 것이라는 건 너무 명백합니다. 그렇기에 아버지로서 한없이 미안해서 죄인처럼 살아가는 삶을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고 이유를 분명하게 따져 물을 수도 없는 지난 세월을 그냥 가슴에 뭍어 두는 삶일 것입니다. 과거의 선택이 시대가 만든 부산물이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고쳐낼 수 없는 과거의 나를 원망하게 되는 아버지로서의 마음이 느껴져 읽으면서 같은 부모로서 마음이 많이 시큰했습니다.
* 가족의 이름으로
만남보다는 헤어지는 경험이 더 많아지는 인생의 변곡점을 지나고 나면 허함을 느끼는 순간도 많아집니다. 세월에 따라 자연스럽게 헤어짐을 경험하는 것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데 노력이 필요한데 시대와 사상의 영향으로 갑작스런 이별을 맞닥뜨리면 더할 나위 없이 큰 상심으로 무너지는 경험을 할 것 같습니다. 내 눈 앞에서 포탄으로 사라진 남편과 나의 선택으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나의 아내와 자식들. 미자와 이섭이 말 없이 공감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부부로 살 수 있었던 건 지나간 시간에 대한 벌일 수도 보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야 하는 벌과 그래도 또 내 팔 한 아름 껴안을 수 있는 가족을 다시 만들어 살아간다는 보상. 두 가지의 역설적인 결과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래도 가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 있었으나 없었던 시간
미완의 자서전을 가족에게 남기고 가고 싶었던 이섭은 ‘유령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어떤 말을 남기고 싶었을까요? 자식을 키우며 나의 이야기를 내 자식에게 꼭 들려주고 가고 싶다는 생각은 저 역시 공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크게 잘난 인생이 아니었어도 크게 내세울 게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도 내 남은 가족들이 나를 기억해 줬으면 하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써 내려 가고 싶었던 자신의 지난 시간을 ‘유령’이라고 표현한 것은 나 자신으로 온전하게는 살아본 적 없는 이섭의 세월을 잘 보여주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불리우는 이름은 있으나 실체가 없이 살아온 것 같은 자신의 삶을, 처음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글이라는 것을 써서 들려주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요?
시대극을 좋아하고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글을 사랑하는 제가 또 다른 느낌의 최애작을 만난 기분입니다. 내가 내 삶을 사랑하고 조금은 덜 성긴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가족의 눈을 잠시라도 가만히 들여다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