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리를 불태운다
브루노 야시엔스키 지음, 정보라 옮김 / 김영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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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리를 불태운다>, 브루노 야시엔스키

🏷흑사병이 창궐한 파리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혁명의 모습을 그려낸, 아주 "새빨간" 책이다. 왜 20세기의 문제작이었는지 너무나 잘 알겠고, 정보라 작가님이 왜 이 책을 소개 하고 싶었는지도 이해한다. 단순히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 분쟁을 그리는 것을 떠나, 유토피아란 무엇이고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작가 브루노 야시엔스키가 보여주는 유토피아는 책의 말미에나 아주 짧게 등장할 뿐인데, 자본주의를 엄격하게 비판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강하게 나타낸 것에 비해서는 사뭇 다른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세상의 절반이 싫어하더라도 걸작이다>란 한줄평이 정말 이해가 된다.

이 모든 일은 피에르라는 한 청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동차 공장에서 해고당하고, 석달째 집세를 내지 못해 살던 곳에서도 쫓겨난다. 그렇게 노숙자처럼 길거리를 헤매던 중에 어린시절 알던 친구 르네를 만나 운 좋게 수압관리탑에 일자리를 얻는다. 하지만 피에르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분노하고 증오에 가득차 르네가 일하는 연구소의 세균을 훔쳐 수압관리탑에 살포한다. 그렇게 파리에 흑사병이 창궐하고 파리의 몰락이 시작된다.

프랑스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파리를 봉쇄하게 되고 그 결과 파리안에서 여러 개의 공화국과 정치구역이 생겨난다.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은 황인종 공화국이며, 이후 프롤레타리아들을 위시한 소비에트 공화국, 왕정주의를 부르짖는 카믈로 뒤 루아, 유대인 자치구역, 영미연합령이 뒤이어 만들어진다.

피에르 외에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은 황인종 공화국을 세운 중국인 판창퀘이와 영미연합령에 속하는 미스터 데이비드 링슬레이, 소비에트 공화국의 솔로민 장군이다. 특히 중국의 빈민이었던 판창퀘이가 서양 그리스도교의 지원을 받아 학교에 가고 공산주의 사상에 물드는 얘기가 인상깊었다. 여기에는 서양 열강과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던 중국 역사가 그려져 있다. 판창퀘이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프롤레타리아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야시엔스키가 그려낸 인물 중 가장 영웅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사람 같다.

이 외에 자본주의를 맹렬히 비판하고, 공산주의의 가치를 우위에 두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는데 바로 미스터 링슬레이의 케이스이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파리를 빠져나갈 수 있게 해주는 대신, 미국에 이 유대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자본주의의 화신과도 같았던 미수터 링슬레이는 처음엔 이 제안을 거절했다가, 결국엔 갑판에 오르고 이 배를 포격할 것을 전보로 주문한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다 죽었던 조카 아치의 신념이 있었다. 미스터 링슬레이는 죽음 앞에서 자기도 모르는 새 조카 아치의 이상주의를 가이드처럼 받아들인다.

나는 이제까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야시엔스키는 이 두가지 이념을 경제보다는 삶의 의미를 해석하는 도구로 쓰는 듯 하다. 미스터 링슬레이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고독의 무게를 느낀다. 자본주의가 그에게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제서야 자신의 삶의 의미를 돌아보지만 역시 남는 것이 없다. 하지만 조카 아치나 솔로민 장군의 동싱 세르게이 솔로민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수백명과 함께 연대하고 의지하는 데에서 삶의 목표를 찾는다. 그 둘은 죽었어도 하나의 불꽃으로 남아 미스터 링슬레이의 가슴에, 그리고 다른 동지들의 가슴에 남는다.

여기까지 보면 자본주의는 악에 가까운 이념이고, 모든 답은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인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야시엔스키는 책의 말미에서 원시사회에 가까운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고, 손을 흔들며 미소를 띄는 그런 곳. 소련으로 귀화하여 활동했던 작가의 양력을 생각한다면 조금 의외의 결말이기도 하다.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새로운 이념과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간만에 머리를 너무 써서 읽었던 책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보면 굉장히 딱딱한 책 같지만 실상은 한 문장에 많은 비유와 은유가 들어가 있어서 마치 시를 읽는 느낌이었다. 거의 한 문단이 한 문장인 경우도 있어서 읽기가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정보라 작가님 덕분에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정보라 작가님이 쓴 서평을 볼 수 있는데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를 쓰게 된 계기나 작가의 양력, 이념 등 이 책을 더 깊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공동의 의지로 연대하는 몇백명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모인 세상 모든 제곱킬로미터 넓이의 땅에서 조카는 또다시 살아 있는, 생명을 주는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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