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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번째 레인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5월
평점 :
⭐️이 서평은 모도(@knitting79books )서평단 자격으로 다산책방(@dasanbooks )으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엄마와 어린 동생 이다를 돌보아야만 하는 주인공 틸다. 그녀는 매일 수영장에서 스물 두번의 레인을 돌고, 수학문제를 풀고,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런데 어느날 베를린에서 박사과정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고 틸다의 마음에 자그마한 틈이 생긴다. 이 작은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과 이다를 엄마와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불안.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빅토르의 존재는 그동안 틸다가 포기하고 체념했던 것들을 욕심내게 만든다.
🏷틸다는 여타 다른 또래들처럼 베를린으로 훌쩍 떠나버리거나, 마음이 가는대로 사랑에 빠질 수 없다. 틸다가 너무 어린 나이에 책임감을 느끼게 되어 마음이 아프다. 또래들이 모두 자신의 삶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날 때 이 곳에 남아있어야만 하는 틸다의 마음을 생각하면 슬프다. 그래서 틸다는 매일 수영장에 가서 스물 두번의 레인을 돈다. 물 속에 잠수하면 모든 소음이 멀어지고 동떨어진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틸다는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소설 속 세계와 수영장 물 속으로 떠나 잠시나마 자신을 되찾는다.
그런데 베를린에서 온 박사 제안은, 틸다에게 처음으로 삶에 대한 욕심을 내게 만들었다. 틸다는 자신이 없는 미래에 이다가 엄마를 감당할 수 있도록 대비시키려고 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엄마는 수도 없이 망가지고, 틸다가 베를린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은 더 많아진다.
그리고 빅토르가 있다. 틸다가 무너질 때 그 순간을 함께 한 빅토르. 그의 가족들은 5년 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 중 한 명인 이반은 틸다의 소중한 친구였다. 빅토르가 어릴 때 살던 고층건물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볼 때, 틸다와 빅토르는 작별이 아니라 서로에게 향하는 도착으로 그 순간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틸다만의 이야기가 아닌 이다의 이야기, 그리고 두 자매의 느리지만 단단한 성장 소설 이야기이다. 가족은 반쪽일 수 있지만 자매로선 100%인. 이다는 틸다의 예상보다 더 강한 아이이다. 이제 이다는 식당에서 주문을 걸고, 수영강습을 받고, 엄마를 챙겨 식사와 집안일도 야무지게 해낼 수 있다. (여담이지만 틸다가 써온 분홍색 선글라스를 끼고 틸다의 제안에 제안 수락함, 제안 거절함으로 대답하는 이다가 너무 귀엽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온걸 보는 느낌🥹)
평범하개 흘러가는 쳇바퀴 같은 일상은, 소도시의 자연풍경과 어우러져 이따금씩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틸다가 빅토르를 뒤에 두고 시골길을 걸을 때 느껴지는 밤의 정취, 해가 쨍한 여름날 수영튜브에 늘어져 하늘을 보는 것들이 그렇다. 그리고 틸다가 감내해야만 했던 감정들이나 마찬가지로 조숙하게 큰 이다가 속으로 삼켰던 감정들은 세차게 내리는 비와 폭풍우로 더욱 더 극대화된다. 또 빅토르와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을 나비에서 살찐 잠자리로 표현하는 것도 좋다!
무언가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들이 이 모든 것과 어우러져 더 묵직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처음엔 결말이 여기서 끝난다고? 싶었는데, 여운을 곱씹다 보니 지금은 이 결말도 마음에 든다. 왜냐면 이다는 앞으로도 잘 해낼거고, 틸다가 자신의 꿈을 찾아 가리란 걸 아니까. 엄마는 나아질 가능성이 없지만 두 자매가 이젠 희망이란 감정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걸 생각하니 결말도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작별에 익숙한 내가 느끼기에 이것은 진짜 마지막
이다. 나는 작별하기의 진정한 전문가다. 자녀들이 넓은 세상으로 나가 그곳에서 성장하는 동안 고향에 남은 엄마, 할머니가 되었는데 손주들이 어느 도시에 사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여인처럼.(p.104)
🔖대학 도서관 유리창 너머로 잔디밭에 눕거나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볼 때면 내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의 감정을 나도 아주 잠깐이라도 느껴보고 싶다. 어쨌든 우리사이에 놓인 것이 유리창만은 아니다.(p.137)
🔖안전하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책은 남는다는 것, 아무도 이 이야기를, 다시 말해서 내가 도망칠 수 있는 이 세계를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키고 상처 입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빌어먹을 일들이 아무리 많이 닥쳐와도 얼마간의 이 행복은 아무도 빼앗아 갈수 없다는 사실은 알았다.(p.149)
🔖나는 슬프면서도 행복해서, 행복보다 슬픔이 더 큰지 아니면 슬픔보다 행복이 더 큰지 모른다. 두 가지 감정이 아름답고, 고통스럽고, 도수가 높은 각테일처럼 뒤섞여 내 몸 전체를 꽉 채워서 분간할 수 없다.(p.167)
🔖모든 것이 지금처럼 조용하고 온 세상이 잠든 듯한 오늘 같은 밤을 위해 살아야 할 텐데. 모두가 입을 다문 밤, 귀뚤귀뚤 소리를 내는 귀뚜라미밖에 없는 밤, 그리고 공기 중에 아주 많은 약속이 떠 있는 밤.(p.187)
🔖나는 잠자리를 세어보려고 필사적으로 애쓰지만 불가능하다. 너무 많다. 이렇게 충격적이면서도 놀랍도록 아름다운 느낌은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다.(p.257)
🔖나:이건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고 내가 말했잖아.
이다: 그건 살인 피해자가 범행 현장에서 "이건 범죄 이야기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p.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