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쟁과 파시즘, 격동으로 가득찬 시대 속에서 온 몸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던 조각가와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삶과 죽음에 이르는 긴 서사를 이렇게 아름답고 초연하게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아직도 오렌지나무에 찬연한 빛이 들이치는 풍경이 보이고, 어디선가 미모사 향이 풍겨오는 듯 하다.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비밀스러운 사크라 수도원에서 천재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가 곧 죽음을 맞이하는데서 시작한다. 이 수도원에는 아무도 볼 수 없게 지하에 봉인된 <피에타>가 있다. 왜 바티칸이 이 석상을 꽁꽁 감추어 두었는지 알려면 조각가 미모와 그의 우주적 쌍둥이인 비올라에 대해 알아야 한다.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 미모라 불리는 주인공은 왜소증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고난 뒤 그는 피에트라달바에 있는 치오 알베르토의 공방에 맡겨진다. 그 곳엔 오르시니 가문이 있었고, 그 가문에는 한 번 읽고 본 모든 것을 기억하는 막내딸 비올라가 있었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모든 억압을 떨쳐내고 하늘을 날고자 했던 비올라와 왜소증을 가지고 태어나 조각가가 되고자 했던 미모는, 서로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 전쟁이 벌어지고, 파시즘이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다시 무너지기까지, 파란만장한 시대배경 속에서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낸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님이 영화감독이라더니, 책장을 넘길때마다 영화 속 장면들이 펼쳐지는 듯 하다. 사크라 수도원장 파드라 빈첸초가 비밀스럽게 피에타를 보러 내려가는 장면이나, 피렌체에서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을 마주한 순간, 미모가 조각한 아름다운 조각상들, 그리고 오렌지나무가 흐드러지게 핀 오르시니 가문의 재배지 풍경이 그렇다. 비올라가 말해주는 바람의 이름이나 미모가 피렌체에서 술집을 배회할때 들은 노래들은 소설의 서정적이고 쓸쓸한 풍경을 더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미모와 비올라의 타오르는 듯한 영혼이다. 미모는 왜소증을 타고나 평생 조롱거리의 대상이었지만 조각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파첼리 주교가 주문한 석상에서도, 파시즘 정부의 주문에도 꼭 자신의 독창적인 예술성을 넣어 석상을 조각한다. 반면에 비올라는 어떠한가? 그녀는 명망있고 부유한 귀족의 막내딸로 태어났으나, 너무나도 똑똑한 두뇌는 그녀에게 있어 독약이나 다름없었다. 비올라는 자신에게 미모도 고칠 수 없는 비정상성이 있으며, 그건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 시대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녀가 다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 날아오르려고 할 때, 다시 또 가족들과 주변의 외압에 의해 막히는 순간이 안타까웠다.

두 인물의 출발점은 매우 다르다. 하지만 결국 미모는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정도로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었고, 마지막 피에타를 제작할때까지 '미모 비탈리아니' 자신으로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비올라가 620여쪽이나 되는 이 길고 긴 소설에서, 언제 비올라 본인으로서 삶을 살아낼 수 있었는지 생각하면 슬프다. 비올라는 항상 비올라였으나,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아내진 못했기 때문에..

언제나 그랬듯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그 정도로 감동과 여운이 엄청난 책이고, 맘에 든 문장들도 너무 많아서 포스트잇을 엄청 붙여두었다. 또 미모가 피에타에 대한 비밀을 풀어주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충격과 감동, 강렬함 그 자체이다.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풍경과 한 사람의 생애를 높은 밀도로 다룬 책을 보고 싶다면 강력하게 추천! (맘에 들었던 문장들은 댓글에 계속!)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이상하다. 나는 불행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내가 젊었고, 나의 하루하루가 아름다워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한낮의 아름다움이 밤의 예지에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나는 오늘에서야 헤아린다.(p.42)
🔖트라몬타나, 시로코, 리베치오, 포넨테, 미스트랄 나는 이 모든 바람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아, 코르누토, 코르누토! 우리에게 출발에 대해 말해 줘. 다 같이 노래한곡 뽑자고!
번개가 칠 때 그 빛에 드러나는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들을 꼭보기를. (p.619)

*출판사의 도서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