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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 양정무의 명작 읽기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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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무 교수의 책을 읽으면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어진다. 에피소드 중심의 미술사 책이 흥미를 자극하는 데 멈춘다면 양정무 교수의 '난처한 미술' 시리즈 등은 비전공 일반인에게 수월히 다가가는 글쓰기임에도 더 깊은 인문학의 세계를 의식하게 만든다. 아마도 수많은 대중강연의 경험 덕 아닐까.


이 책은 양정무 교수의 그런 장점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미술과 아름다움을 대중 강연에서 풀어낼 때의 어려움을 털어놓으며 미술과 미술사에 대한 광범위한 오해를 진지하게 접근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는 미를 선과 등치시키는 오랜 선미이론이나 그 흔한 '미학' 개념은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대신 자신이 고등학교 수학여행에서 만난 석굴암의 충격적 인상을 소재로 우리 또한 겪었을지도 모르는 미술적 경험을 끌어내고자 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석굴암 본존불의 뒷모습은 완벽히 마감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음을,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에서 슥슥 밑그림과 달리 채색한 부분이 오히려 동세를 박진감 있게 만들고 있음을 밝히는 식이다. 양정무 교수의 예전 강연 첫 슬라이드가 인류 최초의 손바닥 자국이었음을 아는 이들은 유발 하라리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첫 장면도 똑같이 시작한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누구나 마네와 모네를 헛갈려하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비잔틴 회화에서 르네상스 회화의 변모 과정과 각각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도 있다. 실제로 당시 파리 작가들조차 살롱전에 출품한 모네의 서명을 잘못 읽고 마네에게 축하를 건넸다지 않나. 시작은 미약했어도 양정무 교수의 책이 있기에 우리는 음미되는 미술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백남준이 쓴 책이 한 권 있다. ‘말에서 크리스토까지‘라는 제목으로 여러 에세이를 묶어놓은 책인데, 거기에 절친한 작가 크리스토에게 헌정하는 에세이가 들어 있다. 그 에세이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텔레비전 시대에는 한국이 세계를 주도할 것이다." 1980년에 쓴 글이다. 이런 이야기를 단 몇 년 전에 누가 말했다면 소위 섣부른 ‘국뽕‘이라고 손가락질당했을 터이다. 하지만 최근 ott나 영상 콘텐츠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을 떠올려보면 대체 백남준의 통찰력은 어디까지인가 생각하게 된다. -6장 20세기 한국의 명작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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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술의 역사 시공아트 67
조앤 스탠리베이커 지음, 강민기 옮김 / 시공아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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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일본미술사 책. 시중의 중국미술사 출판 편중을 해소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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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없다 - 다시는 못 볼 아주 작은 추억 이야기
도종환 외 17인 지음,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엮음 / 학고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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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잘 헤어지는 방법은 뭘까? 

그리고 지난해 오월 우리는 어찌 

 그리 많은 이들이 한데 모여 눈물을 흘리고 풍선을 날렸을까. 

 우리 안의 선한 의지를 일깨워 준 사람 ,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글을 모아 예쁘게 만든 책이다. 

그를 '잘' 보내는 방법을 조금은 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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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좌절 - 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
노무현 지음 / 학고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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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해지는 책이다. 역사는 이렇듯 냉정한 것인가. 죽고나서야 평가된다는 것...

 

<근조> 내가 만난 대통령 노무현

  권력기관을 국민의 품으로

내가 노무현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6년전 참여정부 첫 국세청장으로 임명장을 받을 때였다. 참여정부가 출범 하던 때에 나는 관세청장으로 재직 중이었지만 국세청장 자리는 생각지도 못했다. 새 정부가 들어섰으므로 모든 청장들이 바뀔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고 있어서 물러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특히 나는 새 정부와 아무런 끈이나 연결고리가 없었으므로 1년여의 관세청장직을 마무리 중에 있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국세청장 자리가 운명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2003 년 3월 3일, 이른 아침부터 TV 자막에는 참여정부 첫 국세청장으로 내 이름이 나오고 있었다. 10시에는 공식발표가 있었다. 나는 국세청장 자리를 희망하지도 않았고 나에게 의사를 물어온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국세청장으로 발탁되었을까? 과거 기준으로 보면 국세청장자리는 대통령과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측근중의 측근이 가는 자리였다. 지금 이명박 정부에서 국세청장자리를 4개월이 넘도록 임명하지 못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을 만큼 중요한 자리인 것이다. 

구체적인 발탁 배경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틀 전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서 그 이유를 대강은 찾을 수 있었다. 

“정권을 위해 봉사하던 권력기관은 국민의 기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참여정부는 더 이상 권력기관에 의존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 시 청와대는 나를 발탁한 이유로 세금에 대한 전문성과 관세청장 시절 보여준 개혁성을 꼽았다. 대통령과 고향도 한참 다르고 학교 선후배 관계도 아니고 다른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을 선택한 것을 보면 권력에 충성하는 측근 보다 국민신뢰를 더 중시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아가 참여정부는 4대 권력기관장(국가정보원, 검찰청, 국세청, 경찰청)에 대해 대통령의 인사권을 제약하는 국회 인사청문회제도까지 도입하였다. 

대 통령께서는 탈권력의 힘든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권력기관들을 앞세워 통치하면 반대세력들을 견제해 국정운영을 더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민주주의 발전을 더 소중한 가치로 삼은 것이다. 특권을 스스로 버리고 권력기관들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퇴임후 1년도 못되어 권력기관들이 다시 통치권력의 시녀로 복귀해버린 지금의 상황을 바라본 노대통령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청탁인사하면 안됩니다. 

임명장을 받을 때 처음 뵙고 나서 대통령과의 첫 번째 접촉이 이루어진 것은 전화를 통해서였다. 내가 국세청장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1급 세 자리 인사였다. 청장으로서 신뢰받는 첫걸음은 공정하고 투명한 인사라고 생각했기에 외부청탁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적임자를 찾기 위한 모든 궁리를 짜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생전에 처음 받아보는 대통령의 전화였다. 대통령께서 대뜸 말씀하셨다.

“L씨를 차장으로 임명한다고 하는 데 로비나 부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청탁인사하면 안 됩니다.”

저는 누구의 인사 부탁도 듣지 않습니다.”

“허허, 그래요. 알았습니다.” 

이 것이 통화 내용의 전부였다. 갑작스럽게 즉석에서 답변한 내용이었지만, 내 소신이었고 나는 그 소신을 2년 내내 지켰다. 내가 국세청장 시절 외부 부탁에 흔들리지 않고 국세청 논리만으로 소신껏 인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의 인사 철학이 크게 작용하였다. 청와대가 인사부탁을 하면 아무리 소신 있는 기관장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국세청장 재임 2년 동안 대통령으로부터 단 1건의 인사 관여도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어줄까? 그러나 엄연한 사실이다.

타고난 혁신가

 

2005 년 3월 11일 국세청장직에서 물러났다. 아름답고 명예롭게 퇴진하게 되어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러나 나는 국세청장직을 떠난지 46일만인 2005년 4월 26일 청와대 초대 혁신관리수석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대통령께서는 정부혁신 없이 국가 발전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정부혁신을 총괄하기 위해 대통령비서실에 혁신관리수석을 신설한 것이다.

참 여정부 5년을 관통하는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혁신’이다. 노무현대통령은 어떤 대통령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혁신대통령’이었다고 답할 것이다. 대통령은 정치인보다는 타고난 혁신가였다. 혁신의 아픔이나 고통은 바로 오지만 혁신의 열매는 서서히 나타난다. 따라서 현재의 유권자들로부터 표를 받아야 하는 정치인에게 혁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러나 혁신대통령 노무현은 5년 임기 내내 「눈앞의 일보다는 미래를 준비하는 일, 쉽고 편한 일보다는 어렵고 힘든 일, 인기 있는 일보다는 가치 있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러다보니 조용한 날이 별로 없었고 국민도 많이 힘들어했지만 사회 투명성 제고, 정경유착 단절, 돈안드는 선거, 제왕적 대통령의 포기, 국민소득 2만불 달성, 민주주의의 성숙, 남북관계 진전‘ 등 적지 않은 역사적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지난 1년 동안에 이러한 성과의 상당 부분이 과거로 회귀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2006 년 3월 2일, 청와대는 4개 부처의 개각을 단행하면서 나를 행정자치부 장관 내정자로 발표하였다. 공직생활 32년 만에 모든 공무원들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국무위원이 된 것이다. 다음날 대통령과 오찬을 함께 하게 되었다.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내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연입니다.”

오찬자리에서 전날 발표된 장관 내정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자 대통령께서 빙긋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면서 던지신 첫마디이다. 대통령 말씀이 이어졌다.

“ 정부혁신은 매우 중요한 국가적 과제입니다. 행정자치부가 정부혁신을 선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혁신관리수석을 행정자치부장관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잘해야 합니다.”

오찬이 끝나고 헤어질 때 대통령의 마지막 당부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혁신으로 맺은 우리의 인연이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좋은 성과를 내십시오.”

소위 잘 나간 내 관운의 실체는 따지고 보면 혁신으로 맺어진 대통령과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연고문화와 지역주의 타파에 앞장선 풍운아

대 통령께서는 학연이나 지연과 같은 연고에 의해서 자기 뜻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으면 고통이 수반되는 혁신은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려 쉽게 극복되기 어려운 비합리적인 연고주의 병폐를 짧은 기간 동안에 없애려다보니 무리도 있었고 반발도 컸다. 학벌주의 병폐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이 잘 드러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2007. 4. 28, 고향 함평에 성묘를 다녀와 피곤해서 한숨자고 일어나 TV를 켰다. 리모컨을 돌리다보니 대통령이 EBS에서 ‘3불정책’(三不政策)에 대한 특강을 하고 계셨다. 조금 듣다보니 내 얘기를 꺼내시는 것이 아닌가. 강의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았다.

“ 지금 저도 인사를 해보지만 역시 서울대, 연대, 고대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방대학 출신들, 지금 쟁쟁한 자리에 다 있습니다. 지금 건설교통부 장관 하는 분은 국세청장 했는데, 국세청장 하고 청와대 혁신수석 하다가 거기서 또 일 잘해 가지고 행정자치부 장관 갔다가 거기서 또 일 잘해 가지고 자기 임기도 못 채우고 건설교통부로 또 발탁되지 않았습니까? 

사 람이 성실하고 항상 창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끊임없이 불편을 해소해 나가려는 그런 창의적, 창조적 자세, 도전적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요, 설사 대학교 좀 이름 없는 데 가도요,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어요.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또 한 노무현대통령은 지역주의 타파를 몸으로 실천한 정치인이었다. 호남유권자들은 지난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지역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노무현을 선택했고 이것은 우리 사회 비주류의 대통령당선이라고 하는 기적과 같은 결과를 창출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쉬운 곳을 버리고 고집스럽게 부산을 선택했다. 이곳에서 연거푸 떨어진 이유는 순전히 김대중이 이끄는 호남당 후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바보 노무현은 정면으로 항변했다.

“도대체 호남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그리 잘못했습니까? 왜 전라도 사람은 항상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영남선거에서 호남편견에 맞서 이처럼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맞선 정치인이 누가 있었는가? 지역차별 때문에 고난의 긴 터널을 겪어야 했던 호남인들에게 노무현은 그냥 정치인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떠나시고...

 

대 통령과 맺은 6년여의 속세 인연은 참으로 애절하게 마무리되었다. 많은 혜택만 받고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해 너무 가슴 아프다. 오죽하면 이 길을 택했을까.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까. 국민이 뽑았던 일국의 대통령을 표적하여 온가족까지 소환해 마라톤 중계방송하는 식으로 시도 때도 없이 망신과 모멸감을 주고, 주변 사람들을 모조리 전방위로 조사해 구속해대니 ’명예, 청렴, 가치‘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던 분으로서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그 런데도 이런 참혹한 사태를 미리 예측하지 못한 나의 무능과 무리한 정치 보복 수사를 온몸으로 막지 못한 비겁함에 심한 자괴감을 느낀다. 누구 때문에 이지경이 됐는데 아직도 반성하지 못한체 고인의 뜻을 받들어 화합을 도모하자는 빈말만 해대면서 시민의 공간인 ‘서울 광장’도 개방하지 않는 후안무치의 집권세력을 보면서 갈 길이 너무나 멀다는 생각을 한다.

노무현 대통령님!

우리에게 당신은 여전히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청렴한 서민대통령입니다. 모든 평가는 역사에 맡기고 편히 가십시오.

당신께서 꿈꾸던 ‘선하고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우대 받는 사회, 법과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강해지는 사회, 변화하고 혁신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남아 있는 우리들이 더 용기 있고 지혜로워지겠습니다.

 



 

2009년 5월 27일 국회의원 이용섭



<출처 : 선영아 사랑해, 마이클럽 www.miclu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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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남자를 사랑하다 - 꽃다운 소년에 열광한 중국 근세의 남색 이야기
우춘춘 지음, 이월영 옮김 / 학고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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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시대만큼, 아니 좀더 노골적이고 광범위하게 동성애가 넘쳐났던 명청시대를 다루었다. 저자의 관점 중에 동성애의 권력적, 착취적 성격이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이 한 구절에서 포복절도한다. 연합뉴스 송광호 기자의 리뷰다.

.....이러한 남색 풍조는 청대로 접어들면서 본격화했다. 예컨대, 건륭제 시기 서화의 대가였던 정판교(鄭板橋.1693~1765)는 "형법을 고쳐 엉덩이 치는 태형을 등을 치는 방법으로 고치고 싶다"고 말해 회자됐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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