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넬로피아드 -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세계신화총서 2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녀들>의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다시 쓴' 신화 이야기이다. 부제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가 말해주듯이 <오디세이>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와 그녀의 12시녀에게 '발언권'을 주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서 언급된 사실과 인물에 대해 다시 쓰기를 시도한 책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페넬로페의 수의(혹은 거미줄)'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주로 정절과 지혜를 지닌 현모양처로 묘사되어온 페넬로페가 발언권을 가지게 되자, 그녀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를 그저 다리가 '짜리몽당'하고 거짓말에 사기에 능하며, 역마살이 든 여성편력자에 불과한 인물로 묘사하기 시작한다.  

 

페넬로페의 '입'을 빌어 우리는 고대 여성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여성은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태어나면서 버려지거나 혹은 거래의 대상이 된다. 결혼은 아버지와 미래의 남편인 남성들 사이의 거래로 이루어지며, 결혼 이후에는 남편의 소유물이거나 대를 잇는 아들을 낳아야 할 암컷으로의 역할을 요구받는다. 죽음 이후에 명부(冥府)에 도달하고나서야 페넬로페는 "이제 신들과 영웅들과 미녀들의 그늘에 감춰지고 가려졌던 모든 추악할 비밀"을 폭로하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페넬로페처럼 왕가의 공주로 태어나지 못한 '12시녀'의 삶은 더욱 비참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책은 12시녀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기도 하고, 코러스의 형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준다. 12시녀들은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탓하고 변호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주인을 원망하고, 조롱한다. 특히 제10장 <텔레마코스의 탄생>의 코러스는 신분의 차이가 삶을 어떤 식으로 바꾸어놓는지를 보여주는 슬픈 노래이다.

 

일종의 역설과 해학의 방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의 이면을 비틀어보는 통쾌함과 엄숙한 사건과 인물에 대한 풍자적 태도로 인해 시종일관 해학적이다. 그리고 페넬로페와 아들 테레마코스의 대화와 관계는 현대 사춘기 아들과 엄마의 관계를 겹쳐보게도 해준다. 다만 이왕에 '다시쓰는' 이야기라면 페넬로페는 더욱 적극적이고 진보적인 여성이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12명의 시녀들일지도 모른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명예를 더럽힌 그녀들은 "이승에서도, 내세에서도, 그 어떤 생에서도" 오디세우스의 뒤를 따른다. 이 이야기는 바로 12명의 시녀들의 무덤에 바치는 추모의 한잔 술이며, 그녀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추도사인지도 모른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와 <일리아드>,<오디세이>와 같은 책들이 이 시대에 다시 읽혀져야 할 이유가 있다면, 어쩌면 이런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 때문이 아닐까?

헬레네는 한 번도 벌을 받지 않았다. 도대체 이유가 뭔지 알고 싶다. 남들은 훨씬 더 가벼운 잘못을 저지르고도 바다뱀에 휘감겨 질식사하거나 폭풍우 속에서 익사하거나 거미로 변하거나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잡아먹지 말하야 할 소를 잡아먹었다든지, 교만하게 굴었다든지, 뭐 그런 사소한 잘못을 가지고 말이다. 그런데 헬레네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었으니, 최소한 몽둥이찜질이라도 한번 야무지게 당했어야 마땅할 텐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 P44

나는 그들이 나를, 이 오리 아가씨 페넬로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나와 함께 덤으로 주어지는 것들이다. 왕실과의 연줄, 번쩍거리는 한 무더기의 잡동사니들. 나를 향한 사랑 때문에 자살하는 남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 P51

그리하여 나는 마치 고깃덩어리처럼 오디세우스에게 건네졌다. 황금으로 포장한 고깃덩어리...... 말하자면 금박을 입힌 선지 푸딩이라고나 할까. - P63

운명의 여신들에게 물어보아라, 남자들과 여자들의
인생살이 이리저리 엮어 핏빛 혼돈을 만드는 그들,
인생사 어찌 바뀌었을지 그들만이 알리니
우리의 속마음도 그들만이 알리니,
우리는 영원토록 대답하지 않으리라. - P95

그러니까 우리가 겁탈당하고 그후 교살당했다는 것은 어쩌면 달을 숭배하던 모계사회가 아버지신(神)을 받드는 이방인들의 침략으로 무너져버린 사건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방인들의 우두머리, 즉 오디세우스가 유리 교단의 대제사장, 즉 페넬로페와 결혼하여 왕이 되었다는 거죠. - P194

당신이 아무리 변장을 해도 우린 모두 꿰뚫어볼 수 있어요. 낮길을 걸어도, 밤길을 걸어도, 그 어떤 길을 택해도 우리는 당신의 바로 뒤에서 한 가닥 연기처럼, 긴 꼬리처럼, 여자들로 이루어진 꼬리처럼 당신을 졸졸졸 따라 갑니다. 기억처럼 무겁게, 바람처럼 가볍게. 우리는 열 두번의 규탄, 지면을 스치듯 지나가는 발가락들, 등뒤로 묶인 손목들, 길게 빼문 혓바닥들, 툭 튀어나온 눈알들, 목구멍 속에서 막혀버린 노래들.
......
우리는 시녀들, 바로 당신을 대접하는 여자들. 그러니 당신께 합당한 대접을 해드리지요. 우리는 절대로 당신 곁을 떠나지 않고, 그림자처럼 당신에게 달라붙어, 아교처럼 나긋나긋하고 집요하게 따라다닐 거예요. 어여쁜 시녀들, 모두 한 줄로 늘어서서.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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