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의 시칠리아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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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책이었다.

워낙 <여행의 이유>에 빠져있어서였을까? 이 책은 관광안내서같은 책이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시칠리아'라는 하나의 도시에 대해 이렇게 섬세하고 감동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니, 역시 김영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는 계획대로 움직이는 '관광'이 아니라 그야말로 '여행'이란 무엇인지를 이 한권의 책으로 보여주었다.

 

시칠리아는 영화 <대부>의 도시였고, '메두사'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 도시였고, 오디세우스의 그리스가 두려워한 땅이었으며,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죽음을 기억하라, 현재를 즐기라)의 지역이었다. 

그가 표현한 '시스템'이라고는 없는 시칠리아는 나에게 1990년대의 중국, 나의 20대에 무작정 나섰던 숱한 중국 지역 여행들을 떠올리게 했고, 그 1990년대의 중국도, 나의 20,30대도 사라져버렸음을, 내가 사실은 너무나 사랑한 시절이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시칠리아의 숱한 지역에 대한 이야기와 묘사는 김영하가 훌륭한 소설가임을 인증해주었고, 분명 소설가인데 어쩐지 내 주변의 가까운 지인처럼 느껴지게도 해준 책이었다.

 

그리스, 시칠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와 지중해

그의 말처럼 이 책이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약속 같은 책"이 되어주길 간절히 바란다.   

향수
저격수는 멈춰있는 대상을 노린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표적을 지켜보다 조용히 한방.
향수 역시 머물러 있는 여행자를 노린다.
이 부드러운 목소리의 위험한 저격수를 피하기 위해 신중한 여행자는 어지럽고 분주히 움직이며 향수가 공격할 틈을 주지 않는다.
방심한 여행자가 일단 향수의 표적이 되면 움직이기 어려워진다.
그럴수록 그는 더더욱 한곳에 머물러 있고자 하며 마냥 깊은 우물만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속에 자기가 찾는 모든 것이 있다는 듯이.
그러나 세상의 모든 우물이 그렇듯 그곳은 비어 있다. - P145

신전이라는 말에는 태생적으로 아이러니가 있다.
신전은 신이 사는 집이지만 실은 인간이 지은 것이다. 신전은 인간 스스로가 상상해낸, 크고 위대한 어떤 존재를 위해 지은 집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어올렸기에 이 집들은 끝내 돌무더기로 변해버린다. 세월이 지나면 무너진다는 것, 폐허가 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전이라는 건축물의 운명이다.
그렇게 무너진 신전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중으로 쓸쓸한 일이다. 제우스나 헤라, 포세이돈 같은 신들이 상상 속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이 세운 높고 위태로운 것은 마침내 쓰러진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명이 사라지면 그 문명이 상상했던 것들까지도 함께 소멸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곳에 살았던 일군의 인간들이 자신을 닮은 어떤 존재들을 한때 진지하게 믿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우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슈퍼히어로에 열광하듯......
그들은 강하고 지혜롭고 유쾌한 신들을 만들었고 거대한 신전을 지어 그들에게 바쳤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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