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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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구성상의 특징은 주제와 어떻게 연결될까? 옥희도, 황태수, 옥희도의 아내에 대한 이경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 가지의 선택은 최선/차선/차악/최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태수와의 결혼은 ‘최선’이었다. 12장 이전(*12장은 서사의 분기점이 된다.)까지는 옥희도와 태수의 이야기가 핑퐁으로 진행된다. 옥희도와 태수는 짝패로, 서로가 서로를 비출 때만 의미가 존재하며, 언제나 쌍으로 존재한다. 황태수와 옥희도가 핑퐁으로 진행되면서도, 옥희도가 중심인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경의 시점이 옥희도에게 중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경은 이러한 지점에서 믿을 수 없는 서술자(1인칭 주인공 시점)에 해당한다. 

11장에서는 옥희도가 장난감을 선물하였으며, 12장에서는 조와 호텔을 들어가며, 이경의 트라우마가 유발된다. 조의 경우에는 전쟁기의 미군으로, 이경은 일탈로 일종의 매춘을 하게 된다. 조는 기능적 인물로 인해, ‘조’가 가진 섹슈얼리티는 왕자로 변할 수 없는 야수의 형상만을 가지고 있다. 성장소설은 섹슈얼리티와 죽음이 중심이다. 섹슈얼리티는 본능적인 것 같지만, 충만/금기적인 것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위반을 어떻게 넘기어 충만한 것으로 만드는 지가 섹슈얼리티의 핵심이다. 옥희도와 태수는 섹슈얼리티의 상징이 아니나, 조는 섹슈얼리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전쟁으로 일상이 무너진 이경에게 예술가적인 삶(부유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옥희도는 ‘동경’의 존재이다. 옥희도는 신기와 동경의 존재로, 일상의 존재는 아니다. 이경에게 시민적이며 노동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태수는 ‘생활’의 존재이다. 이경은 부르주아의 경제/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고가가 무너지게 된다. 오빠들의 죽음, 폭격 등으로 인해 안온하고 부르주아적인 삶이 전부 날아가버린다. 즉, 이경은 전쟁으로 가족이 울타리가 되어주는 제도의 삶이 완전히 무너졌으며, 본인이 누려온 일상적인 삶의 믿음이 붕괴되었다. 전쟁으로 “생활”(일상)을 잃은 이경에게 옥희도가 줄 수 없는데 태수가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일상이다.

왜 이경은 시간이 흐른 뒤 옥희도가 그린 나무를 ‘고목’이 아닌 ‘나목’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는 감각하는 자아와 해석하는 자아로 나뉘어진다. 17장 이전까지 이경은 ‘감각하는 자아’이고, 17장의 이경은 ‘해석하는 자아’로 삶의 경험에 위상을 매긴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히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대하며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음을 뿐임을 깨닫는다.

전쟁의 폐허(PX)속에서 옥희도가 그린 나무를 이경은 시간이 지난 뒤, 죽음만을 기다리는 고목이 아니라, 겨울(전쟁 속에서의 삶)을 견디는 나목으로 인식하게 된다. 10년 전의 이경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대신할 녹음이 필요하였기에, 겨울 견디던 옥희도에게 푸른 녹음 기다리며 서성거렸다. 이를 깨닫은 이경은 망연함을 느꼈으며, 태수의 말로 인해 일상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훼손된 일상이 태수와의 결혼으로 인해 회복이 되며, 순간이 아닌 지속적인 삶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이경은 “살아남았으며”, 살아남은 사람인 이경 눈에 ‘고목’이 ‘나목’으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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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뜰 오정희 컬렉션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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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전체적인 플롯/정서/분위기

「중국인 거리」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현재적 이야기가 전개된다. 9살 때 이사오는 광경에 대한 묘사에서 시작해, 초경을 시작하며 소설이 마무리된다. 위 소설의 플롯을 통해 여성의 생물학적인 성장이 전면화되고 있다. 또한, 소설은 겨울에서 시작되며, 1950년대 전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기본적인 정조는 스산하고 추우며, 석탄재가 날리는 지저분하고 누추한 분위기이다.

여성들의 삶이 연령대별로 등장하는데, 이 인물들은 모두 죽음과 섹슈얼리티를 가진 존재이다. 이 소설에서는 죽음과 섹슈얼리티로 연결되는 여성의 계보를 보여주며, 여성의 성장에 있어서 성과 죽음을 주제로 하고 있다.

할머니 : 출산하지 못함, 죽음을 맞이함.

엄마 : 끝없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함.

수녀 : 임신할 수 없는 사람.

매기언니 : 양공주, 남성폭력으로 인해 죽음.

나와 치옥이

“노오란 목소리”, “온통 노란빛의 회오리”, “노란빛의 냄새” 등 이 소설에서 노란색이 의미하는 것은?

그래도 메스꺼움은 가라앉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해인초의 거품도, 조개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도, 해조와 뒤섞이는 석회의 냄새도 온통 노란빛의 회오리였다. (100쪽)

노란색은 회충약과 해인초의 냄새로, 가난과 황폐한 색을 의미한다. 이는 전쟁 직후 폐허된 상태에서 굶주리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보여준다. 소설 속 “내가 이 시와 나눈 최초의 악수였으며 공감이었던 그 노란빛의 냄새”(100쪽) 묘사는 이사 왔을 때 주인공이 낯설지 않게 해준 것은 노란색으로, 황폐한 어린 시절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또한, 허기의 색으로 비이성과 비합리의 색에 해당한다.

중국인 남성이 ‘나’에게 준 선물이 의미하는 것은? ‘나’는 왜 그것을 빈 항아리 속에 넣었을까?

우리는 그들과 전혀 접촉이 없었음에도, 언덕 위의 이층집,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한없이 상상과 호기심의 효모였다. (108쪽)

『중국인 거리』에서 중국인 남성은 ‘이국적이고 낯선’ 존재로 호기심과 두려움을 상징한다. 모든 성장의 모티프는 금기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며 시작하며, 아이들의 금기의 대상은 성과 죽음이다. 중국인 남성은 ‘언덕 위의 이층집’에 살고 있는데, 가깝게 손닿는 곳이 아니라 약간 멀리 있는 곳에 살고 있기에 주인공에게 호기심과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집 앞에 이르러 언덕 위의 이층집 열린 덧창을 바라보았다. 그가 창으로 상체르 내밀어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내가 끌리듯 언덕 위를 올라가자 그는 창문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닫힌 대문을 무겁게 밀고 나왔다. 코허리가 낮고 누른빛의 얼굴에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내게 종이꾸러미를 내밀었다. 내가 받아 들자 그는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으로 어둡고 좁은, 안채로 들어가는 통로와 갑자기 나타나는 볕바를 마당과, 걸음을 옮길 때마다 투명한 맨발에 찰랑대며 묻어 오르는 햇빛을 보았다.

나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근 뒤 종이뭉치를 끌렀다. 속에 든 것은 중국인들이 명절 때 먹는 세 가지 색의 물감을 들인 빵과, 용이 장식된 엄지손가락만한 등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금이 가서 쓰지 않는 빈 항아리 속에 넣었다. 안방에서는 어머니가 산고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나 나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숨바꼭질을 할 때처럼 몰래 벽장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한낮이어도 벽장 속은 한 점의 빛도 들이지 않아 어두었다. 나는 차라리 죽여줘라고 부르짖는 어머니의 비명과 언제부터인가 울리기 시작한 종소리를 들으며 죽음과도 같은 낮잠에 빠져 들어갔다.

내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머니는 지독한 난산이었지만 여덟 번째 아이를 밀어 내었다. 어두운 벽장 속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절망감과 막막함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옷 속에 손을 넣어 거미줄처럼 온몸을 끈끈하게 죄고 있는 후덥덥한 열기를, 그 열기의 정체를 찾아내었다.

초조였다. (125~126쪽)

마지막 장면에서 멀리 있던/낯설고/이국적인 중국인 남성과 접촉한다. 중국인 남성은 ‘나’에게 “명절 때 먹는 세 가지 색의 물감을 들인 빵과, 용이 장식된 엄지손가락만한 등”을 선물해준다. 이는 맛있는 빵과 예쁜 장식품을 선물해준 것으로, 중국인 남성에게 ‘나’가 성적으로 구별되는 ‘여성’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선물을 동생들에게 자랑하지 않고, 혼자 열어보았으며, “금이 가서 쓰지 않는 빈 항아리” 속에 감춘다. 나’는 몰래 벽장으로 숨어 들어가, 어머니의 산고의 비명과 수녀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낮잠에 빠져 들어간다. 이 ‘벽장’은 가부장제, 여성으로서 성적 억압을 의미한다. ‘나’는 성과 죽음을 둘러싼 여성들의 존재를 보며, 자신도 성적 대상이 된 여성임을 인식하였다. 낮잠은 일종의 시간을 통과하였음을 보여주며, 낮잠에서 깼을 때 ‘나’가 느낀 ‘절망감과 막막함’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아이가 인식하는 세상이다.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머니는 여덟 번째 아이를 출산하였으며, ‘나’는 월경을 시작하였다. 월경이 시작하였다는 점은 임신이 가능한 나이에 들어섰음을 보여주었으며, ‘나’ 역시 할머니-어머니-매기언니의 계보로 들어왔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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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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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구성/시점은 강주룡의 삶을 서사화하는 데에 어떤 역할을 할까?

『체공녀 강주룡』은 프롤로그인 「병」으로 시작한다. 이는 소설 기법 상으로 서스펜스에 해당한다. 을밀대 위로 올라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강주룡은 투옥해서 죽을 때까지 투쟁을 지속하였다는 점은 사실 투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소설은 혼례 올리는 날에서 시작해, 죽는 날로 끝이 난다. 『체공녀 강주룡』은 ‘겪고-각성하고-성장하는’ 단편적인 구조를 띠고 있지 않으며, 강주룡이 어떠한 성격의 변화를 겪지 않는다. 강주룡은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최전빈을 새끼토끼 돌보듯이 하였으며, 옥이와 삼이로 인해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되었다. 강주룡은 남성을 통해 ‘각성’하지 않았으며, 본래 가진 성격이 일반적인 통념에 순응하는 사람이 아니다. 강주룡은 자신이 아닌 타인들을 위해 계속 나아갔으며, 강주룡의 ‘개인적인’ 면들은 ‘사회적인’ 면과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영향을 주었다.

현재시제의 서술과 마지막 문장이 함의하는 바는?

현재시제의 서술은 강주룡이 역사성보다 현재성을 가진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현재시점 유지 위해 초점화자를 주룡으로 유지하고 있다. 「역」에서는 초점화자가 달헌이다. 이는 주룡이 죽고 난 다음의 이야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현재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이다. 마지막 장의 제목 「역」은 되감기의 ‘逆’으로, 되감기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마지막 문장인 ‘저기 사람이 있다’는 용산 참사와 포크레인 위에서 시위 등 ‘체공농성’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는 노동문제, 노동투쟁, 단식, 체공농성이 현재진행 중이라는 점을 가리키며, 소설의 현재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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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쏜살 문고
강경애 지음, 심진경 엮음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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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염어미는 민족 착취, 성 착취, 계급 착취가 중층적으로 압축되어있다. 첫 번째로 ‘젖유모’ 노동은 성차가 개입되는 노동이다. 두 번째로 소금팔러가는 일은 남성이 하는 일로 여겨지는 성별화된 노동이었다. 봉염어미는 살기 위해서 여성의 신체로서 남성이 하는 일에 개입하였다. 봉염어미의 서사에는 모성애/모성 신화가 담겨져 있다.

봉염어미는 아버지와 아들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여성해방의 주체적인 인식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 교조주의적 페미니즘측에 균열을 일으켰다. 봉염어미는 서벌턴(하위주체,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되고 억압을 당하는 사람)에 해당한다. 『서벌턴은 말할 수 있는가?-서벌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에서는 글을 쓸 수 없으며/자신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발화할 수 없는 주체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유사하게 『제인에어』의 버사는 발화할 수 없었다. 『제인 에어』의 제인과 『몫』과는 대조적으로 봉염어미는 글을 알지 못하기에 3인칭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금』은 봉염어미에게만 초점화되어, 내면에서 외면을 보는 프리징으로 전개되어진다.

봉염어미는 무엇인가를 먹고 싶어하고, 돈을 벌려고 한다. 이는 살고자하는 본능이 앞서는 모습이다. 봉염어미는 젖유모 일을 하며 돈을 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식의 은유도, 상징도 없다. 이는 여성 신체의 섹슈얼리티한 측면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의’ 물질성을 그리고 있다. 또한, 난민 여성이 처할 수 밖에 없는 착취적/억압적 상황을 드러낸다.

봉염어미가 가정, 남편에게 의존적인 모습은 봉염 어미의 생존 조건이 남편과 가정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봉염어미’라는 자리가 봉염어미게에는 생존의 조건이었다. 즉, 『소금』에서는 봉염어미의 생존 조건에 대한 리얼한 재현이 드러난다. 『소금』은 민족/계급/젠더적 착취가 교차되어 있으며, 서벌턴(난민 여성)이 처한 곤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에서 ‘소금’이라는 소재가 함의하는 바는?

‘소금’은 젠더적으로 한정된 생존의 조건-소금밀수-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소금은 삶에 있어서 필수적 성분으로, 삶에 있어서 필요한 은유를 뜻한다. 소금은 마치 돈과 같은데, 이를 공산당이 지켜준다. 공산당이 지켜주는 모습은 공산당이 봉염어미에게 중요하다는 계급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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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크아웃 11
최은영 지음, 손은경 그림 / 미메시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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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몫」의 구성

「몫」은 1996년을 배경으로 설정해두고 있다. 이 시기는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이자, 여대에서 집단폭력의 수위가 매우 높았던 시기이다. 즉, 작가는 90년대 대학 내 젠더폭력과 여성혐오를 보여주기 위해 1996년이라는 특정시기를 배경으로 설정하였다. 

「몫」에서는 정치적 변혁/대의 위해 움직이는 시위의 현장도 젠더화되어있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8~90년대 정치적 움직임을 재현할 때, 즉 옳은 일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졌으며, 조직 안에서 강간, 성추행은 ‘대의를 위해서’ 해결을 미루었다. ‘강간은 미국에서’라는 구호는 한국 여성이 아니면 강간은 해도 된다는 뜻으로 보여지며, 여성을 “조국의 모습”, “조국의 자궁”으로 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몫」의 주인공

소설의 핵심 인물은 정윤(사학95), 해진(언어학96), 희영(사회학96)이다. 「몫」은 해진을 주인공으로만(해진의 성장담) 읽어서는 안되며, 해진, 정윤, 희영 세 명을 모두 주인공으로 읽어야 한다. 해진에게 있어 정윤은 글쓰기의 출발점이다. 해진은 정윤의 “A여자대학교에서의 집단 폭력, 일부 학생들의 문제인가” 글을 통해 정윤을 알게 되었다. 초점화자[서술하고 느끼는 화자]인 해진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윤은 해진에게 있어서 글쓰기의 초심에 해당한다.

반면, 해진에게 있어서 희영은 검열관이자, 거울같은 초자아적인 존재이다. 희영은 펜을 사용해 글을 작성하며, 문제의식 중심의 발제를 해오는 중심이 뚜렷한 인물이다. 이에 반해 희영은 연필로 글을 쓰며, 요약발제를 하는 자신이 없고/머뭇거리며/본인보다 타인에게 더 집중하는 인물이다.


2인칭 시점의 특징이나 효과는 무엇일까? 왜 이 소설의 제목은 ‘몫’일까?

‘몫’은 세 가지의 층위를 가진다. 첫 번째는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희영의 윤리이다. 두 번째는 이 글을 서술하는 서술자, 해진의 윤리로 이어진다. 서술자인 해진은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아서 기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마지막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의 윤리로 이어진다. 작가는 타인의 삶을 재현할 때 함부로 재현해서는 안 되며, 재현했다는 것만으로 끝나면 안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소설 제목인 ‘몫’은 텍스트 둘러싸고 있는 등장인물(희영, 정윤, 해진), 독자, 작가, 사회의 몫을 묻고 있다. 「몫」은 2인칭으로 진행이 되어서, 서술자가 호명하는 사람은 “해진”이자 “독자”이다. 즉, 이 소설은 청유형 기법인 2인칭 기법을 사용해 독자의 윤리를 묻고 있는 작품이다.

그때 당신과 희영의 뒤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범죄는 모국에서! 그러자 누군가 조금 작은 소리로 따라 외쳤다. 강간은 미국에서! (중략) 한참은 지나고 나서야 희영은 이야기했다. 그 구호보다도, 주변에서 옅게 퍼지던 웃음소리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강간이라는 말이 집회에 활기를 주던 그 순간을 잊을 수는 없을 것 같다고. - P143

글쓰기가 막히고, 질리고, 어떤 의미도 없다고 느껴질 때 희영의 글을 읽으면 환기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당신은 희영의 글에서 힘을 받았다.
- P140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거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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