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역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는 박쥐같은 한 해를 보냈다. 이걸 하자니 저걸 잘 못 하겠고, 저걸 하자니 이쪽에 있는 것이 눈에 밟혀 마음이 석연치 않다. 저놈 저러니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지 하며 내 주변 어른들만 속을 썩으셨을 거다. 대여섯 어린 동생에게도 그런 말을 듣고는 아이고 정말 헛살았나 싶었지만 남들이 보는 삶의 주기와 내가 생각하는 삶의 주기가 다르니 별 수 없는 일이다. 하고 싶은 일보다 맡겨진 일에 먼저 충실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지만 지나간 일이다. 그 시절에는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나만의 사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 존중’이라는 것을 크게 깨달은 한 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나는 왜 글을 쓸때 자꾸 의문형일까. 왜 자꾸만 질문을 하고 싶지? 하하하) 이것 역시 개인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비판은 확실히 하되 시선만은 언제나 따뜻할 것. 그러면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전우용 선생의 글투가 참으로 그렇다. 다루는 주제가 근대사인 만큼 오욕의 역사가 대부분인데 이걸 장점은 장점으로, 단점은 단점으로 나누고 비평점을 나중에 정리하는 식이다. 책에 나온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자.
우리나라에 전차가 개통된 것은 1899년 5월 4일의 일이다. 시민들은 ‘신문명의 이기’에 환호했다. 일본에도 교토에만 있던 것이 근대화에 한참 뒤진 경성에 들어선 것이다. 그만큼 고종 황제세력은 문명화를 서둘러 근대국가로 발돋움한 우리 모습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전차는 이런 모습을 세계만방에 알리기도 전에 6살 아이를 치어 죽인 살해 죄목이 붙어 태형과 화형에 처해진다. 환호하던 시민들은 성난 군중으로 돌변해 동대문 전차 차고에까지 불을 지르려 했다. 당시 일반 시민들은 새로운 것을 무조건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거니와 이것이 아이를 치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민감한 사항이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다음날 각 신문에 실린 광고는 죽은 아이의 명복을 빌거나 시민들의 주의를 구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단체 유람 특별열차’ 운행을 알리는 광고였다. 새로워서 어색하지만 나라의 일이라 박수쳤던 사람들에게 문명의 이름은 이렇게 비인격적이고 잔인했다.
전우용 선생은 이 사실에 역사의 서술이 승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과 대한제국이 근대문물을 도입한 이유, 당시 일반 민중의 신문물에 대한 생각을 섞어서 들려준다. 무리하지 않으면서 일반인이 사건 파악에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주변 이야기로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냐’ 라는 질문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천히 따져보면 전체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반 시민들은 새로운 것을 무조건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1899년 5월 4일에는 환호하던 사람들이 1899년 5월 26일에 전차를 부수고 불태웠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렵다. 전자가 경성 거리를 활보한 기간은 22일,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기간이었다. 다른 설명들도 이와 같다.
일주일 전쯤 새해에 꼭 하고 싶은 일로 세계사와 한국사의 정리를 꼽았다. 문학작품을 볼 때 시대상보다 작품 자체의 의미를 중요시 하는 편이지만 일단 역사가 없으면 제대로 된 해석이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게다 역사는 정리하지 않으면 배우고 배워도 헛갈리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현재가 안 보이고 미래가 막막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밥벌이를 못하면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지만 사상계는 지속적으로 밥벌이가 안 되는 일을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의 생각을 움직이는 사상은 대개 쓸데없는 것에서 시작했다. 옛날을 돌아보고 비평점을 찾는 일은 확실히 바로 돈이 되는 것이 아니지만 제대로 걷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경제 위기야 말로 기초학문을 든든히 해서 새로운 사회구조를 확립해야 할 때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전엔 이병철 사장이었던 것이 이건희 회장님이고 우리에게 일자리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다. 돈이 없으면 사람 구실을 못하고,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창업을 해도 대기업에 먹히고 마니 중요한 것은 자본을 쥐고 있는 자본의 신이다. 이렇게 살다간 다 같이 망할게 분명하다. 역사를 배워야 한다. 이제 경제로 풀릴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