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에게 희망을>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두 주인공인 줄무늬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는 어딘가 익숙하고 낯설지 않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포장된 우리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인다.
“아, 배고파라.”
애벌레는 자기의 보금자리가 있었던 그 잎새를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또한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땐 보금자리인 가정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게 되지만 사춘기를 겪으며, 어찌 보면 보금자리를 갉아먹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매일 먹기만 하면서 피둥피둥 살찌는 거 말고 더 값진 삶이 있을 거야.”
…
줄무늬 애벌레는 뭔가 더 나은 것을 찾아 떠났습니다.
자신이 완벽히 성숙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우리는 보금자리를 벗어나 더 흥미로운 것을 찾아 떠나게 된다. 그리곤 줄무늬 애벌레처럼 ‘큰 기둥’의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거대한 행렬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이 ‘큰 기둥’과 ‘꼭대기’는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큰 기둥의 꼭대기가 구름에 가려져 있어, 무엇을 향한 기둥인지 확인할 길이 없는 것처럼 보금자리를 떠나온 미성숙한 우리는 얼떨결에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거대한 행렬에 합류하게 된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기둥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 기둥을 오르는 동안 우리는 곁의 누군가를 외면하는 법을 배운다. 마음 약해지지 않기 위해 눈을 맞추지 않고 독하게 ‘위’로 향하는 법을 배운다. 그 누군가는 절친한 친구일 수 도 있고,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썼습니다. 서로의 눈빛이 얼마나 그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노랑 애벌레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마음이 약해지거나 딴생각이 나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는 이 어린 애벌레는 묘한 동질감과 함께 안타까움을 불러왔다. 그러나 노랑 애벌레와 줄무늬 애벌레가 나란히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장면으로 하여금 많은 이들은 또 한편으로 위로 받고, 마음 한 편에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애벌레들이 고치 안에서 인내의 시간을 버텨내고, 나비가 되어 날아갈 수 있다면 그 길이 목적지를 알 수 없는 큰 기둥에 목숨을 내거는 것보다 더 많은 ‘꽃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이 곳을 한 번 거쳐가면 다시는 애벌레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큰 변화를 겪는 곳이란다.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에 살짝 엿보면 너나 다른 사람들의 눈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거야.”
“다만 아주 천천히 만들어질 뿐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