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오, 나의 미오>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의 여운은 정말 굉장해서 한 동안 ‘머나먼 나라’에서 헤어 나오기가 정말 힘들었다. 이 책은 주인공인 아홉 살 소년 보 빌헬름 올손이 사라져 버린 어느 가을 저녁에서 시작된다. 독자들도 이 시점부터 이 소년과 긴 여정을 함께하게 된다. <미오, 나의 미오>는 그 표현들이 굉장히 섬세하고 현실적이어서 단순히 책으로서 읽히는 것이라기보다는 소년의 곁에서 그의 모험을 지켜보는 듯한 묘한 느낌에 빠지게 된다. 또 눈앞에 떠오르는 생생한 장면들은 실제로 내가 그 장소에 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지금의 웬만한 SF영화만큼이나 기발한 마법들은 끊임없이 나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윰윰, 미라미스가 구름 위를 달릴 수 있어!”

“그거 몰랐니?”

윰윰은 미라미스가 그럴 수 있다는 게 하나도 별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물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늘을 날아다녔고, 미라미스는 작고 하얀 구름들 위를 뛰어넘었다. 아주 신나고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만 땅으로 내려가고 싶어졌다. 미라미스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섰다. 우리는 바다 맞은편 땅으로 온 것이었다.

 

‘머나먼 나라’의 모든 것은 아름답고 따뜻하게 그려진다. 어쩌면 양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불행한 고아 소년 보쎄의 삶과는 완전히 달라진 미오의 삶이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머나먼 나라’에서의 생활이다. ‘머나먼 나라’는 누가 보아도 가장 이상적인 나라로 그려진다. 나는 이 점이 너무 안타까웠다. 미오가 머나먼 나라에서 정말로 잘 살고 있다는 작가의 마지막 강조는 옮긴이의 말처럼 테그너 공원의 외로운 보쎄를 너무 많이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초반에 아름답던 ‘머나먼 나라’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죽음의 숲’은 보쎄가 마냥 이상적인 미오에서 보다 성숙한 보쎄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정말로 보쎄가 ‘머나먼 나라’에서 미오로 잘 살아가고 있는 거라면 오랜 여운은 느끼지 못 했을 것이다.

 

그 애는 머나먼 나라에 있어, 하고 나는 말한다. 그 애는 백양버들이 살랑거리고……, 밤이면 환하고 따뜻한 불이 있고……, 배고픔을 달래주는 빵이 있고……, 그 애를 너무나 사랑하고 그 애도 너무나 사랑하는 임금님인 그 애 아빠가 있는, 그 곳에 있다.

그래, 그렇게 된 거다. 보 빌헬름 올손은 머나먼 나라에 살면서 임금님인 그 애 아빠와 함께 정말로 잘 지내고 있는 거다.

 

여전히 보쎄가 우플란츠 거리에서 양부모에게 사랑 받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하여도 ‘죽음의 숲’을 지나온 그 소년은 미오보다도 훨씬 멋진 소년이 되어가는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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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예술 작품들을 ‘감상’한다는 것의 의미가 단순히 눈으로 ‘본다’, 또는 마음으로 ‘느낀다’에 국한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 작품은 ‘배운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배움이 지나치게 과해져서 본래 작품만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는 정도가 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하다고는 볼 수 없겠다. 그러나 예술 작품 감상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정보와 지식은 꼭 필요한 것이며, 그로 인해 더 깊은 감상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서해문집의 다양한 미술서적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작품 감상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미술의 불복종> 또한 그 중 하나이다. 이 책은 다양한 종류의 미술 작품들이 사회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이런 방식으로 그리는 이유는 내가 기계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무엇을 하든지 기계처럼 한다는 것을 느끼며,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분야는 팝아트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 동안은 그냥 막연히 앤디워홀의 작품들이 팝아트를 대표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 왔다면, 이젠 그의 예술에 대한 독특한 철학과 정신을 파악하고 더욱 깊이 있게 그의 작품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난 여전히 팝아트가 기존의 순수한 예술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팝아트들은 이미 창조된 작품들을 복사하거나, 대중적 기호들을 나열한 것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 독특한 예술 세계 또한 그 동안 누구도 창조해내지 못했던 참신한 것이기에 그들의 작품들은 그들의 예술 세계 안에서 진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

 

어두운 방 안에 머리를 관객 쪽으로 두고 누워 있는 홀로페르네스와 그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그리고 그 뒤로 홀로페르네스의 몸을 누르고 있는 유디트의 하녀가 보인다. 바로크 미술 특유의 밀착된 원근법은 이 사건이 관객과 불과 1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벌어진 것 같은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한 가지 더, 미술사에 있어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전에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책에서는 여성 미술가들이 하나의 주체적 미술가로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들려주고 있다. 또한 오노 요코, 캐롤 슈네만 등 영향력 있는 여성 미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미술계에 있어서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더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남성에 위협적이고 반항하며 길들여지지 않는 여성들을 팜므 파탈로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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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희망을>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두 주인공인 줄무늬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는 어딘가 익숙하고 낯설지 않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포장된 우리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인다.

 

“아, 배고파라.”

애벌레는 자기의 보금자리가 있었던 그 잎새를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또한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땐 보금자리인 가정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게 되지만 사춘기를 겪으며, 어찌 보면 보금자리를 갉아먹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매일 먹기만 하면서 피둥피둥 살찌는 거 말고 더 값진 삶이 있을 거야.”

줄무늬 애벌레는 뭔가 더 나은 것을 찾아 떠났습니다.

 

자신이 완벽히 성숙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우리는 보금자리를 벗어나 더 흥미로운 것을 찾아 떠나게 된다. 그리곤 줄무늬 애벌레처럼 ‘큰 기둥’의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거대한 행렬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이 ‘큰 기둥’과 ‘꼭대기’는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큰 기둥의 꼭대기가 구름에 가려져 있어, 무엇을 향한 기둥인지 확인할 길이 없는 것처럼 보금자리를 떠나온 미성숙한 우리는 얼떨결에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거대한 행렬에 합류하게 된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기둥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 기둥을 오르는 동안 우리는 곁의 누군가를 외면하는 법을 배운다. 마음 약해지지 않기 위해 눈을 맞추지 않고 독하게 ‘위’로 향하는 법을 배운다. 그 누군가는 절친한 친구일 수 도 있고,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썼습니다. 서로의 눈빛이 얼마나 그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노랑 애벌레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마음이 약해지거나 딴생각이 나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는 이 어린 애벌레는 묘한 동질감과 함께 안타까움을 불러왔다. 그러나 노랑 애벌레와 줄무늬 애벌레가 나란히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장면으로 하여금 많은 이들은 또 한편으로 위로 받고, 마음 한 편에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애벌레들이 고치 안에서 인내의 시간을 버텨내고, 나비가 되어 날아갈 수 있다면 그 길이 목적지를 알 수 없는 큰 기둥에 목숨을 내거는 것보다 더 많은 ‘꽃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이 곳을 한 번 거쳐가면 다시는 애벌레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큰 변화를 겪는 곳이란다.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에 살짝 엿보면 너나 다른 사람들의 눈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거야.”

“다만 아주 천천히 만들어질 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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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주떼>의 작가는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너무 담담해서 나는 읽으면서도 줄곧 내가 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또 어린 시절의 주인공이 곧이곧대로 서술하는 당시의 기분과 상태는 더욱 그녀를 안타깝고 안쓰럽게 느껴지게끔 만들었다. 그녀의 담담한 설명은 나까지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게 하곤 했다.

 

고모는 내 어깨를 붙들고 있던 손을 스스로 뿌리치듯 떼어내며 나를 밀쳤다. 그러고는 마치 거대한 괴물을 마주친 것과도 같은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치를 떨었다. 나는 태어나 처음 보는 고모의 얼굴에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조용히 오지. 대체 왜, 왜 그랬어……이제……이제 여기서 어떻게 살아……

 

<그랑주떼>를 읽는 중에 계속 든 생각이 있다면, 모든 인물들이 제각기 살아가기 바빠 보인다는 것이었다. 마치 ‘공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모든 이야기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사실 있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고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말한다. 누구에게나 가슴 속에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라고. 그 크기가 제각기 다를 뿐, 누구나 아픈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랑주떼>의 어른들은 어찌된 일인지 하나같이 이 아이의 아픔에 무관심하다. 어쩌면 우리가 품고 살아가는 아픔들은 누군가로부터 치료받지 못해서 꾸역꾸역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모두에게는 뚜렷한 직장이 없으므로 이렇다 할 동료나 선후배도 당연히 없었다. 회식이나 단합대회 같은 게 없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일하며 생기는 고민이나 스트레스들을 털어놓을 상대 또한 전혀 없이 모든 것을 혼자서 감내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글의 주인공이 억지로 행복한 척 하지 않아서 좋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여전히 치료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훌쩍 자라서 성인이 된 주인공은 여전히 어린 소녀같이 느껴져서 위로해주고 싶었다. 소녀의 아픔에 무력했던 그 때의 어른들도 언젠가 소녀와 같은 아픔을 공유했던 것은 아닐까. 그들도 아직 치료 받지 못 한 것이 아닐까. 담담하게 오래 전 가슴 속에 묻어뒀던 이야기를 꺼내준 소녀에게 너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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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그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에 얽힌 뒷이야기에 대해 듣는 것을 흥미로워했던 나로서는 이 책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특히 미술사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흐름에 따라 장황하게 늘어놓는 구성이 아니라서 좋았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크게 12점의 그림을 선정한 후, 그들 그림을 설명하는 와중에 미술사에 대한 내용이 적절하고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책이었다.

 

‘단절’과 ‘연속’, 이 두 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그의 뒤집어진 캔버스가 놓여 있다. 그의 트롱프뢰유에 깜빡 속은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 상상을 해보라. 저 뒤집어진 캔버스의 앞면에는 뭐가 그려져 있을까?

 

제일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트롱프뢰유에 관한 것이다. 나는 본래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오락적인 것, 참신하고 창의적인 것, 한 마디로 ‘재미’를 많이 추구하고 그런 작품들에 많이 끌리는 편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트롱프뢰유는 나에게 신선한 재미를 주었다. 코르넬리스 노르베르투스 기스브레히츠의 작품 <뒤집어진 캔버스>는 한 마디로 캔버스의 뒷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숫자가 쓰인 메모지가 붙어있는 캔버스, 즉 예술 시장에 매물로 나온 캔버스의 뒷면을 마치 진짜처럼 그려놓은 것이다. 고객들은 이 캔버스를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캔버스를 뒤집어 보았을 것이고, 그와 동시에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기발한 발상인가. 정물화가 그 동안 비교적 미술사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트롱프뢰유를 통해 세상 밖으로 조금 더 나아설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느낀 바가 있다면 그것은 예술 분야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재미 혹은 흥미’라는 요소가 배제할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이었다. 몇 몇 이들은 예술성과 작품에 담겨있는 심오한 의미,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등을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며 오락성을 하위요소로써 가볍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라 하여 무조건적으로 예술성만을 강요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흥미로운 요소를 지닌 작품의 오락성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웃음 지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그 작품의 임무는 완수된 것이며, 메시지 또한 전달된 것이라고 본다.

 

어느 미술사학자가 세어보니 이제까지 이 작품에 대해 내려진 해석이 무려 스물여덟 가지란다. 작품을 놓고 해석이 갈리는 일은 종종 있다. 하지만 그것도 두세 가지의 충돌이지, 무려 스물여덟 가지 해석이 난무하는 경우가 또 있던가? 누구 말대로 이 작품은 미술사의 “괴물스러운 작품들 중에서 가장 괴물스러운” 작품이다.

 

위의 설명은 조르조네의 <폭풍우>라는 그림에 대한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미술 작품의 뒷이야기, 혹은 여러 가지 해석들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다. 때문에 미술책을 고를 때도 그런 숨어있는 1인치에 관한 책들을 주로 관심 있게 살펴보게 되는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수대 위의 까치> 중 ‘해석의 바벨탑’ 부분은 가장 흥미로웠다. 하나의 그림에서 스물여덟가지의 해석이 난무할 수 있다는 점은 그림이 매력적인 이유를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듯하다.

그림은 느끼는 것이지만 읽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림을 감상한 후, 그 그림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는다. ‘비제재’와 ‘반제재’, ‘신화’와 ‘성경’ 등 그 기반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도 다양하다. 이렇듯 그림은 그 실체가 완성되었다고 해서 그 가치 또한 함께 완성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후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의미를 부여 받음으로써 그 진정한 가치가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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