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그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에 얽힌 뒷이야기에 대해 듣는 것을 흥미로워했던 나로서는 이 책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특히 미술사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흐름에 따라 장황하게 늘어놓는 구성이 아니라서 좋았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크게 12점의 그림을 선정한 후, 그들 그림을 설명하는 와중에 미술사에 대한 내용이 적절하고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책이었다.

 

‘단절’과 ‘연속’, 이 두 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그의 뒤집어진 캔버스가 놓여 있다. 그의 트롱프뢰유에 깜빡 속은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 상상을 해보라. 저 뒤집어진 캔버스의 앞면에는 뭐가 그려져 있을까?

 

제일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트롱프뢰유에 관한 것이다. 나는 본래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오락적인 것, 참신하고 창의적인 것, 한 마디로 ‘재미’를 많이 추구하고 그런 작품들에 많이 끌리는 편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트롱프뢰유는 나에게 신선한 재미를 주었다. 코르넬리스 노르베르투스 기스브레히츠의 작품 <뒤집어진 캔버스>는 한 마디로 캔버스의 뒷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숫자가 쓰인 메모지가 붙어있는 캔버스, 즉 예술 시장에 매물로 나온 캔버스의 뒷면을 마치 진짜처럼 그려놓은 것이다. 고객들은 이 캔버스를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캔버스를 뒤집어 보았을 것이고, 그와 동시에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기발한 발상인가. 정물화가 그 동안 비교적 미술사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트롱프뢰유를 통해 세상 밖으로 조금 더 나아설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느낀 바가 있다면 그것은 예술 분야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재미 혹은 흥미’라는 요소가 배제할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이었다. 몇 몇 이들은 예술성과 작품에 담겨있는 심오한 의미,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등을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며 오락성을 하위요소로써 가볍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라 하여 무조건적으로 예술성만을 강요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흥미로운 요소를 지닌 작품의 오락성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웃음 지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그 작품의 임무는 완수된 것이며, 메시지 또한 전달된 것이라고 본다.

 

어느 미술사학자가 세어보니 이제까지 이 작품에 대해 내려진 해석이 무려 스물여덟 가지란다. 작품을 놓고 해석이 갈리는 일은 종종 있다. 하지만 그것도 두세 가지의 충돌이지, 무려 스물여덟 가지 해석이 난무하는 경우가 또 있던가? 누구 말대로 이 작품은 미술사의 “괴물스러운 작품들 중에서 가장 괴물스러운” 작품이다.

 

위의 설명은 조르조네의 <폭풍우>라는 그림에 대한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미술 작품의 뒷이야기, 혹은 여러 가지 해석들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다. 때문에 미술책을 고를 때도 그런 숨어있는 1인치에 관한 책들을 주로 관심 있게 살펴보게 되는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수대 위의 까치> 중 ‘해석의 바벨탑’ 부분은 가장 흥미로웠다. 하나의 그림에서 스물여덟가지의 해석이 난무할 수 있다는 점은 그림이 매력적인 이유를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듯하다.

그림은 느끼는 것이지만 읽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림을 감상한 후, 그 그림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는다. ‘비제재’와 ‘반제재’, ‘신화’와 ‘성경’ 등 그 기반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도 다양하다. 이렇듯 그림은 그 실체가 완성되었다고 해서 그 가치 또한 함께 완성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후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의미를 부여 받음으로써 그 진정한 가치가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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