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객관적으로 나의 잘못이 아닌데도 나로 인해 고통받는 타인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보다 강한 자가내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상황이라면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나보다 약자인 사람, 나보다 절박한 처지인 사람이 그렇게 나온다면? 그건 논리의 문제는 아니었다. 선택의 문제였다. 내 평소 사고방식대로라면 도서관에서 그 선배에게 유감이지만 이건 내 공부 방식일 뿐이라고 말하고 내 자리로 돌아갔어야 한다. 후배를 그런 식으로 불러낸 그 선배야말로 찌질한 짓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그 선배의 표정이 너무나 절박해 보였다. 아무런 심적 여유도 없이 찌들 대로 찌들어 있었다. 내게는 여기가 아니어도 선택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다. 내 선택은 잘못된 건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기특한 생각이긴 한데, 지금 돌이켜보면 역시 『인간의 조건을 너무나 열심히 읽다보니 휴머니스트 주인공에 과하게몰입했던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