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앤은 연구 결과들을 온라인으로 공개했다. 해커들이 독자적으로 연구한 ‘유전 블록’이 쉽게 끼워 맞출 수 있는 레고 블럭처럼 공유되었다. 설계된 아이들이 한 세대를 이룰 만큼 많아졌다. 사람들은 디자인에 의해 만들어진 아름답고 유능하고 질병이 없고 수명이 긴 새로운 인류를 ‘신인류’라고 통칭했다. 캘리포니아 대지진으로 서부 도시들이 황폐화되자, 신인류로 태어나지 못한 비개조인들이 서부로 밀려났다. 재앙 이후에도 굳건했던 동부의 도시는 대부분 개조인들의 거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자 원흉으로 지목되는 디엔, 릴리 다우드나는 어느 날 아주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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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다른 해커들과 같은 툴을 썼지만, 다른 해커들처럼 ‘청사진’을 짜는 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디앤은 발생 과정과 그 이후까지 관여했다. 그냐는 별도의 인공자궁에서 의뢰받은 아이들을 키웠고 기계와 로봇으로 신생아들을 양육했다. 정확히 6개월이 되었을 때 의뢰자들의 현관문 앞에 아이를 안은 보육로봇과 유전자 검증 서류가 함께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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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연 씨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활동하던 김지영 씨가 동아리에 발길을 뚝 끊은 것은 3학년 가을 엠티 이후였다. 가까운 자연 휴양림에 숙소를 잡아 놓고, 다 함께 가벼운 산행을 한 후로는 삼삼오오 모여서 게임도 하고 족구도 하고 술 마실 사람은 술을 마셨다. 김지영 씨는 감기 기운이 있는지 몸이 으슬으슬 추워서 신입생들이 난방을 켜 놓고 카드 게임을 하는 방에 찾아가 침구 더미 사이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들어갔다. 바닥은 뜨끈했고, 긴장했던 몸이 녹으면서 늘어졌고, 후배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섞여 웅웅 울리며 꿈처럼 몽롱하게 들려왔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든 것 같은데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이 들렸다.

"김지영 이제 걔랑 완전히 끝난 것 같던데?"

예전부터 김지영한테 관심 있지 않았느냐, 관심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잘해 봐라, 우리가 도와주겠다, 하는 여러 목소리들이 계속 들렸다. 처음에는 꿈인가 했는데 곧 정신이 들면서 방 안에 있는 무리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밖에서 술을 마시던 복학생 선배들이었다. 김지영 씨는 이제 잠도 완전히 깼고 좀 덥기도 했는데 본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불을 걷고 나갈 수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민망한 대화를 엿듣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아,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에게 억지로 권하지는 않고, 후배들에게 밥을 잘 사 주지만 되도록 함께 먹지는 않는 선배였다. 태도가 단정하고 깔끔해서 김지영 씨도 항상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설마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더 유심히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선배의 목소리가 맞았다. 취했을 수도 있고, 쑥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 괜한 짓을 할까 봐 더 과격하게 말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김지영 씨의 처참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일상에서 대체로 합리적이고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도, 심지어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막말을 하는구나. 나는, 씹다 버린 껌이구나.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고 숨도 막혔는데 그냥 계속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야 했다. 오히려 김지영 씨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자신의 존재를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한참 후 선배들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주위가 조용해져서야 한증막 같은 이불 속에서 나와 여자 방으로 옮길 수 있었다.

밤새 뒤척였다. 다음 날 아침, 김지영 씨는 숙소 근처를 산책하다가 그 선배와 마주쳤다.

"눈이 충혈됐네? 잘 못 잤어?"

선배는 평소와 똑같이 다정하고 차분히 물었다. 껌이 무슨 잠을 자겠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김지영 씨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알라딘 eBook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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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씨가 처음 동아리에 마음을 붙이게 된 것도 차승연 씨가 챙겨 준 덕분이듯이 자신도 좋은 언니가 되고 싶었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에게 꽃이니 홍일점이니 하면서 떠받드는 듯 말하곤 했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여학생에게는 짐도 들지 못하게 했고, 점심 메뉴도, 뒷풀이 장소도 여학생들이 편한 곳으로 정하라고 했고, 엠티를 가면 단 한 명뿐이라도 여학생에게 더 크고 좋은 방을 배정했다. 그래 놓고는 역시 무던하고, 힘 잘 쓰고, 같이 편하게 뒹굴 수 있는 남자들 덕분에 동아리가 굴러간다고 자기들끼리 으쌰으쌰했다. 회장도, 부회장도, 총무도 다 남자들이 했고, 여대와 조인트 행사를 열기도 했고, 알고 보니 남자들만의 졸업생 모임도 따로 있었다. 차승연 씨는 항상 특별 대우 같은 건 필요 없으니 여학생들도 똑같이 일 시키고 기회도 똑같이 달라고, 점심 메뉴 선택 같은 것 말고 회장을 시켜 달라고 말했다. 그러면 대부분 대충 웃으며 그래그래, 하고 넘겼는데 9년 동안 가장 열심히 동아리에 나오고 있는 박사 과정 남자 선배 하나가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내가 몇 번을 말하니? 여자는 힘들어서 못해요. 너희는 그냥 동아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우리한테 힘이 되는 거야."

"저 선배한테 힘 돼 주려고 나오는 거 아니거든요? 기운 없으면 보약 한 재 해 드시던가. 내가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악착같이 나와서 여자 회장 꼭 보고 말 거야."

차승연 씨가 졸업할 때까지 여자 회장은 없었는데, 후에 차승연 씨와 정확히 10학번 차이 나는 여자 후배가 회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차승연 씨는 오히려 담담하게, 10년이면 강산이 변하긴 하는구나, 했다.

-알라딘 eBook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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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네가 찾는 ‘릴리’를 알아."
델피의 입에서 나온 예상하지 못한 말에 올리브는 당황했다.
"어떻게?"
"글쎄. 멍청한 서부 놈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교육을 제대로 받았거든. 대학을 나온 놈들이라면 그 사람을 모를 수가 없고. 하지만 네가 정말 그 릴리 다우드나를 찾는 줄른 몰랐어. 우리는 보통 디엔이라고 부르니까."
올리브는 릴리의 성이 다우드나라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이 순간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델피가 말하는 ‘릴리’는 올리브가 찾고 있던 릴리다.
델피가 물었다.
"릴리 다우드나와는 무슨 관계야?"
올리브는 문지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문지기는 지구에서 절대로 릴리와 올리브의 관계를 그대로 털어놓지 말라고 했다.
"그냥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조사하는 거야. 잘 아는 사이는 아니고."
델피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어, 올리브. 그 릴리에게도 너와 똑같은 흉터가 얼굴에 있었다지."
올리브의 표정이 굳었다.
델피는 올리브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아니, 얼굴의 흉터를 보고 있었다. 올리브가 기억하는 한 델피가 올리브의 흉터에 관해 직접 말을 꺼낸 건 처음이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방금 릴리 다우드나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확신했지. 혹시 다우드나가 네 조상이야? 고조할머니보다도 더 되었겠군. 한 번도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아니, 나는……."
대답하려다다 올리브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그래서 대신 물었다.
"왜 릴리가 그렇게 오래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난 바보가 아냐."
델피는 고개를 으쓱했다.
"릴리 다우드나는 100년도 전의 사람이야. 그리고 자로 그녀가 이 악몽같은 세계를 만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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