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연 씨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활동하던 김지영 씨가 동아리에 발길을 뚝 끊은 것은 3학년 가을 엠티 이후였다. 가까운 자연 휴양림에 숙소를 잡아 놓고, 다 함께 가벼운 산행을 한 후로는 삼삼오오 모여서 게임도 하고 족구도 하고 술 마실 사람은 술을 마셨다. 김지영 씨는 감기 기운이 있는지 몸이 으슬으슬 추워서 신입생들이 난방을 켜 놓고 카드 게임을 하는 방에 찾아가 침구 더미 사이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들어갔다. 바닥은 뜨끈했고, 긴장했던 몸이 녹으면서 늘어졌고, 후배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섞여 웅웅 울리며 꿈처럼 몽롱하게 들려왔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든 것 같은데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이 들렸다.

"김지영 이제 걔랑 완전히 끝난 것 같던데?"

예전부터 김지영한테 관심 있지 않았느냐, 관심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잘해 봐라, 우리가 도와주겠다, 하는 여러 목소리들이 계속 들렸다. 처음에는 꿈인가 했는데 곧 정신이 들면서 방 안에 있는 무리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밖에서 술을 마시던 복학생 선배들이었다. 김지영 씨는 이제 잠도 완전히 깼고 좀 덥기도 했는데 본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불을 걷고 나갈 수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민망한 대화를 엿듣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아,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에게 억지로 권하지는 않고, 후배들에게 밥을 잘 사 주지만 되도록 함께 먹지는 않는 선배였다. 태도가 단정하고 깔끔해서 김지영 씨도 항상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설마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더 유심히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선배의 목소리가 맞았다. 취했을 수도 있고, 쑥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 괜한 짓을 할까 봐 더 과격하게 말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김지영 씨의 처참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일상에서 대체로 합리적이고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도, 심지어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막말을 하는구나. 나는, 씹다 버린 껌이구나.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고 숨도 막혔는데 그냥 계속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야 했다. 오히려 김지영 씨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자신의 존재를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한참 후 선배들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주위가 조용해져서야 한증막 같은 이불 속에서 나와 여자 방으로 옮길 수 있었다.

밤새 뒤척였다. 다음 날 아침, 김지영 씨는 숙소 근처를 산책하다가 그 선배와 마주쳤다.

"눈이 충혈됐네? 잘 못 잤어?"

선배는 평소와 똑같이 다정하고 차분히 물었다. 껌이 무슨 잠을 자겠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김지영 씨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알라딘 eBook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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