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4의 제국 1 ㅣ 제4의 제국 1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제4의제국은 가야를 소재로 하고 있다.
90년대 들자마자 김해 대성동에서 가야 시대 고분으로 추정되는 묘들이 발굴된다. 이곳에서는 진귀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중 13호 고분에서 그간 일본 고유의 유물로 인식되고 있던 파형동기가 출토된 것은 일대 충격이였다.
그 이유는 여지껏 파형동기가 일본에서만 출토되고 있었기 때문인데,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처음으로 한반도에서도 파형동기가 발견된 것이다.
한편, 일본 학자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자신의 학설을 뒷받침할 귀중한 유적이라며, 이것으로 자신의 기마민족설이 완성되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기마민족설이란
한반도의 기마민족이 대마도-북큐슈 거쳐 일본 본토(機內)를 점령하여, 처음으로 천황계를 탄생시켰다는 논지의 학설이다.
그러니까 일본 천황의 시조가 한반도人이라는 것인데, 한국 국수주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나오기 힘들어 보이는 이 과감한 학설을 일본 학자가 처음 주장했던 것이다.
제4의제국은
파형동기에 의문 - 13호 고분의 주인을 밝히기 위해 일본 응신, 인덕 천왕을 분석 - 백제계로 천황계가 바뀐 점 - 파형동기의 기원 분석 등을 추적하면서 결국 가야가 대륙문화와 해양문화의 결집이었고, 백제계 이전 가야계 천황이 있었으며, 이들이 바로 천황의 시조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책 전반이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기마민족설을 토대로 씌여졌다고 볼 수 있다.
이쯤에서 기마민족설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어하는 지적갈증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본史, 특히 고대 부분에 관한 전문 서적이 내 주위에는 없는 고로 이것저것 통사로 된 몇 권의 책을 찾아 보았는데, 대부분 임나가야설의 허구성만을 언급했을 뿐 천황의 시조설에 대해선 거의 일본서기나 고사기를 채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눈에 띈 '일본 사회의 역사'라는 책.
이 책은 막부나 천황계통의 편파적 시각에서 벗어나 지방 정치세력의 지역차에 입각해 서술 된 일본통사라는 선전문구에 혹해서 구입해 두고 있었던 것인데, 상권 P.63에 에가미 나미오에 학설에 아주 짧막하게 소개되어 있다.
야마토 분지에서 가와치 평야로 대수장의 본거지가 옮겨진 이유에 대해서
기마민족의 도래에 의한 정복설이 있으나 이것은 무리라고 본다.
라고 되어 있다. 또 한국의 역자는 주석까지 달아 기마민족의 직접적인 정복설이라기 보다는 간접적 영향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라고 붙여 놓고 있다.
어느 책이든 학계에서 논란이 분분한 구절들을 살펴 보면 책을 쓴 저자의 성향을 알 수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나름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한 것같다. 최인호는 책에서 응신과 인덕천황의 무덤인 가외치 지역 전방후원분이 한반도人들에 의해 축조된 것이라고하지만 일본 사회의 역사에선 단순히 한반도에서 유입된 집단을 조직함으로써 만들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아무튼 이 책에서도 기마민족설에 대해선 더이상 깊게 다루지 않고 있으므로, 지적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선 다른 음료가 필요했는데, 그때 눈에 띈 책이 바로
마사박물관에서 발간하고 있는 마문화연구총서 7권인 '한국의 기마민족론'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기마민족론에 대해서 여지껏 연구된 결과물을 정리하고 있다고 봐도 좋다(다만, 비매품이다ㅠ_ㅠ).
아무튼 이 책에서 비로서 기마민족론의 실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48년에 처음 발표한 뒤로 그의 학설은 거의 50년간 수정/보안되어 발표되었었는데 결국 논지를 말하자면 이렇다.
기마민족론의 논지
가야(임나)에 도읍한 진왕(辰王) 계통의 기마민족이 쓰시마(對馬)-이키(壹岐)를 취하여 북규슈에 상륙한 뒤 지쿠시(筑紫)를 본거지로 하여 한왜연합왕국을 성립하였고, 이때 국호를 일본으로 바꿨으며, 얼마 후 한반도의 본거에 있던 진왕의 세력이 왜인의 중추부인 셋쓰(攝津)-가와치(河內)에 건너가 천황(왜국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진왕이 본거를 일본으로 옮겼으며 그래서 원래 본거였던 가야 지역에 일본부(日本府)라는 지명이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한왜연합왕국을 처음 건설한 이가 바로 일본의 숭신천황인데, 일본에서 숭신천황 이전의 천황들은 모두 허구적 인물이라고 인정하고 있으므로, 천황의 시조가 바로 한반도 사람이라는 논리이다.
때문에 김해 대성동 13호 고분의 주인이 바로 이 숭신천황이며, 이후 가와치 지역으로 진출한 응신과 인덕 역시 가야계통의 천황이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들로 제시한 것들이 김해지역에서 출토된 목관묘의 묘제나 순장 습속, 호랑이 모양 띠고리, 오르도스 형태의 청동솥 등과 같은 기마민족 유물이 일본에서도 발굴되고 있다는 것이며, 또한 일본의 건국신화와 가야의 건국신화가 놀라우리만치 닮았다는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 논리,
일견 그럴 듯 해보이지만 뭐랄까 좀 엉성하기도 하고,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많다.
일단, 에가미는 임나일본부설을 견지하고 있다.
이 이론은 일본이란 호칭이 7세기에 처음 사용되었기 때문에 4~5세기의 일본은 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논리로서 깨진바 있다.
그런데 그는 일본이란 호칭을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고 얘기한다. 그것은 진왕조가 왜를 점령한 후 왜가 태양이 뜨는 곳과 가까운 자신들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그런 호칭을 사용했다고 주장하나 더이상의 증거나 논리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300년에 가까운 겝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고 할까..
또한, 부여계나 가야계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진왕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좀 이상하다. <<수서>>를 보면 7세기 야마토 조정의 수도를 진왕국(秦王國)이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진왕(辰王)이 나오게 된 것이다 -_-; 이거 정말 무책임한 발상이다..그 뒤 이에 대한 어떤 증거나 논리에 대한 언급도 없다;;
'한국의 기마민족론'에선 이렇다할 언급이 없었지만(아직 다 읽진 못해서 뒷 부분에 또 언급되어 있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에가미 교수의 단락에선 없었음) 최인호는 인덕과 응신이 가야계의 유민이었으며 향후 백제계로 이전되는 과정에 대해 이런저런 근거를 내세우고 있다.
차라리 최인호의 접근 방식이 오히려 더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그는 명백한 고고학적 유물들을 통해 접근하고 있으므로(다만, 책의 흐름상 필요한 부분만을 채용하고 언급하고 있으므로 에가미의 임나일본부설같은 것은 애시당초 제4의제국에서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다).
'한국의 기마민족론'에서는 또 그가 다른 증거로 제시한 묘제나 순장 습속, 호랑이 모양 띠고리, 오르도스 형태의 청동솥 등과 같은 기마민족 유물 논리에 대해 하나하나 밟아주고 있는데(?) 이런 세세한 부분까진 일단 여기서 다 언급할 수 없겠다(이미 분량이 ㅠ_ㅠ 웬만해선 읽기 힘든...그래서 아무도 잃지 않을 분량의 데드라인을 넘었다. 나도 않읽는다 ㅎㅎ).
아무튼 이 책, '한국의 기마민족론'의 결론을 말하자면
백제 이전 이미 가야의 수많은 유망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에가미 교수의 논문을 통해 일본 내 그들의 발자취와 흔적을 확인해 볼 수 있었으며, 나아가 일본 건국 신화와 가야 건국 신화의 유사성에 대해서 충분히 연구해봄직 하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와서,
파형동기 하나를 토대로 이 정도의 저작을 써낸 작가 최인호의 상상력과 집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오랜만에 이것저것 찾아보며 알아봤던 요 며칠이 신났었고, 그 계기를 마련해준 제4의제국이 고맙다.
다만, 명색이 제4의제국 가야를 소재로 했음에도 사료부족으로 많은 분량을 고구려와 백제에 할애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너무나 새로웠던, 그래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해주었으나, 그로인해서 외로웠을 에가미 나미오 교수를 한 번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거의 50년 동안 자신의 학설을 계속 고쳐가며 보완해 갔다는 노학자의 집념 역시 참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문화연구총서7 ‘한국의 기마민족론'에 관한 자료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