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비트윈 : 경계 위에 선 자
토스카 리 지음, 조영학 옮김 / 허블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라인 비트윈: 경계 위에 선 자>는 사이비 종교와 전염병 사태를 소재로 쓴 이야기입니다. '사이비 종교'는 다큐멘터리나 르포로도 흥미로운 주제이고, '뇌에 미치는 전염병'이라는 소재는 이제는 좀비물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정착했지요. 가장 자극적인 소재 두 가지가 한 이야기에 엮인 셈입니다.


소재가 좋은들 아무렇게나 섞을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 소재에는 공통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목적론적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작동하는 이유가 인간 스스로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잘못해서 망가진 세상은 나와 무관하게 돌아가는 현실보다 받아들이기 차라리 낫습니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든, 3년 째 끝나지 않는 팬데믹 사태든 매일 재앙이 일어납니다. 재앙의 정체가 타락한 인류에게 가하는 신의 철퇴라고 믿는 편이 우연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한결 편합니다.


작가는 사이비 종교가 어떻게 목적론적 세계관을 주입하는지 주인공 윈터를 통해 보여줍니다. 윈터는 열 살도 되기 전에 사이비 공동체에 들어옵니다. 공동체에 들어온 이후로도 바깥 세상을 완전히 잊지 못하지만, 단체 예배와 참회를 반복하며 사이비 논리에 세뇌됩니다. 그 결과 진실하게 속죄하면 어머니의 병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이런 사고관에서는 어머니가 살아난다면 참회가 통한 것이요, 어머니가 죽는다면 마음속 깊숙이 자리잡은 죄책감을 차마 꺼내지 못한 까닭입니다. 의심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 되고요. 윈터의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사건이 윈터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는 책에서 직접 알아보세요.


우여곡절 끝에 믿음을 잃은 윈터는 진짜 세상과 마주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교주가 말하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연재해는 물론이요, 이유 모를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미쳐가고 있습니다. 정말로 신의 철퇴가 아닐까요? 근 10년을 폐쇄 공동체에서 살아온 윈터는 ‘교주는 사기꾼이고, 세상의 비극은 과거의 믿음과 무관하다.’는 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생물의 유전자 조절 기전을 밝힌 과학자 자크 모노는 <우연과 필연>이란 책을 썼습니다. “인간은 마침내 광대한 우주 속에서 홀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운명이나 의무는 아무데도 씌어져 있지 않다.” 믿음이 사라진 세상에서 윈터가 찾은 의무는 사람입니다. 윈터는 하나뿐인 조카를 구하기 위해 전염병을 뚫고 자신을 추방한 종교 공동체로 돌아갑니다.



작가는 사이비종교 내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사람들의 직책이나 시설은 물론 공동체를 대하는 교도들의 마음까지. 종교 관련 소설을 많이 쓴 걸로 보아 작가가 주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부분을 조사하고 썼을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전염병 사태에 대한 묘사가 거칩니다. 작가의 역량이 부족해서라기보다, 현실 속 사람들과 시스템이 상상보다 견고한 덕분입니다. 불행히도 작품에 나오는 전염병보다 현실의 코로나19가 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작중에서는 만 명 남짓 감염되었을 때 무정부 사태가 일어나지만, 22년 1월 기준 87만 명이 죽었음에도 미국은 건재합니다. 비록 바다 너머로만 소식을 듣고있지만, 방송이 마비됐다거나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는 뉴스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지만 헷갈리지 않고 순식간에 읽히는 책입니다. 재난물을 좋아하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라인비트윈:경계위에선자 #토스카리 #동아시아출판사 #허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문장과 장(챕터)으로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실험한 작품입니다. 실험이 어찌나 성공했냐면, 두 여자가 사랑에 빠져 서로를 구하는 이야기 따위로 눈 높은 SF독자들을 다 홀렸어요. 정량적으로 표현하자면 2020년 휴고-로커스-네뷸러상을 석권했습니다. 

 

 

SF 문학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시각화하는 묘사가 많습니다. <듄>이 대표적입니다. 1부만 읽어도 머릿속에 아라키스 사막이 그려지니까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컴퓨터 그래픽이 너무 발달해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도 얼마든지 화면에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듄>도 올해 10월에 영화로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는 다른 전략을 택합니다. 시각화할 수 없는 묘사를 문장으로 조립하는 것입니다. 독자는 문장을 읽고 장면을 상상하는 대신, 생각도 못했던 낱말 조합이 맞물려 생기는 효과에 감탄합니다. 이런 문장으로 가득 찬 소설은 문장 자체를 즐겨야 하니, 다른 매체로 옮길 수도 없습니다. <당신들은…>은 영화화되지 못할 거예요. 어쩌면 문학이 남을 마지막 영역이 이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듄> 책에서 상상만 하던 장면을 영화(www.eyesmag.com/)로 보는 일이 일도 아니게 되었죠.

 

판타지-SF는 ‘상상할 수 없는 묘사’를 용납하는 몇 안 되는 장르입니다. 하지만 문장에서 생경함을 강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밑바닥에서 전혀 다른 공간을 창조하기보다는 독자에게 배경 지식이 있는 세계관이 더 낫습니다. 화성에 나타난 화성인보다 동네 GS25에 나타난 화성인에 훨씬 깜짝 놀라듯이요. 그래서 작가는 ‘시공간 이동 가능한, 우리 세계도 속한 다중 우주’를 배경으로 정했습니다. 실제로 주인공은 독자가 아는 시대에 가서 이름을 들어본 인물들을 만납니다. 다중 우주 세계관이라 전혀 다른 존재로 나오지만요. 

 

작가들은 왜 이런 복잡한 세계관을 고르고, 어려운 문장을 써가면서까지 생경한 묘사에 애를 썼을까요? 두 주인공의 불타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인공 둘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육신도, 정신력도 현실 세계 독자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인물들은 어떻게 서로를 느끼고 사랑할까요. 문장도, 챕터도, 배경도, 서사도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멋진 로맨스 소설을 보며 우리는 소설 속 사랑을 실제로 경험하기를 꿈꿉니다. 하지만 소설이 가능한 모든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수단이라면, 이입조차 할 수 없는 사랑도 그릴 수 있겠지요. 마치 문장을 조립해서 시각화할 수 없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사랑은 인류 보편의 감정입니다. 독자는 둘의 사랑 자체에는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과물이 특이합니다.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는 장면은 도저히 이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을 읽을 때면 구구절절한 문장에 감동하게 됩니다. 챕터마다 들어있는 장면과 편지 사이의 갭이 책을 읽는 묘미입니다.

 

저는 그 어떤 매체보다 글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문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즐기면서 책을 따라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취향이지는 않겠지요. 복잡한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 장대하면서도 디테일을 살린 세계관을 감상하기 위해 SF를 읽는 사람, 무릇 이야기를 읽고 나면 곰곰이 씹을만한 철학적 질문이 하나는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당신들은…>은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글을 읽으셨다면 이 책이 궁금하겠지요. 그렇다면 읽어보세요. 수많은 SF 작가들과 권위 있는 심사위원들이 다 함께 이 책을 선정했습니다. SF독자란 제가 앞서 언급한 취향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문장이 갖는 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원서 표지인데 한국어판이 훨씬 강렬하네요(www.amazon.com)

"먹는다는 행위는 끔찍하지 않아? 관념 차원에서 보면 말이야. 자라면서 아름답다고 배운 것들이 대부분 멋진 기계의 심장부에 도사리고 있다면, 그렇다면 타액이 분비되는 치육 부위에 돌출된 뼈들을 사용하여 흙에서 자라는 것들을 짓이겨서 입부터 심장 아래의 산 주머니까지 이어진 축축한 관을 내려가기 쉽게 곤죽으로 만드는 행위에 매력을 느끼기가 힘들겠지" - P66

섬 하나를 구하는 것은 여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그녀는 한 여자의 힘으로 가능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 - P72

"나는 너의 것이야. 너의 기척을 찾아 세상을 주시하는 동안, 동물의 내장을 보고 점을 치는 점쟁이처럼 상관도 없는 것에서 너와 연관된 점을 찾는 동안, 너의 것이야. 편지를 부칠 방법과 이유와 기회를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너의 것이고, 네가 적은 말들을 순서에 따라, 소리에 따라, 냄새에 따라, 맛에 따라 음미하는 동안, 그 기억 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너무 바래지 않도록 보살피는 동안, 나는 너의 것이야." - P118

"지난번 편지에 나와 함께 살면 어떨지 적었지. 친구나 이웃끼리 함께 사는 식으로. 그 생각을 어찌나 간절히 했던지, 내가 사는 이 골짜기를 통째로 삼켜도 허기가 가시지 않을 것 같아. 그 대신 나는 내가 느끼는 갈망을 실로 자아서 너라는 바늘의 눈에 끼우고, 내 살갗 아래 어딘가 꿰매어 감춰 뒀어. 너에게 쓰는 다음번 답장을 그 실로 한 땀씩 수놓으려고." - P146

"난 말하고 싶었어. 네가 마실 차를 내가 끓여 주고 싶어." - P173

때로는 포옹을 목 조르기로 오해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를 끌어안는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 P2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나와 대학원에 들어간 것도 3년 전이다. 이제는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다음 단계를 찾는 참이다. 과거의 선택이 맞았는지 모르니 지금 하는 선택도 옳을지 자신이 없었다. 삶에 답이 있기를 바라지만, 다중우주를 속 나를 비교할 방법은 없기에 정답이라는 게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알고리즘, 인생을 계산하다>를 읽기 시작한 이유가 삶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아니었다. 오히려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에 하나를 더 늘리려는 목적이었다. 데이터 사이언스를 공부하면 진로에 도움이 될까 싶다가, 관련 지식을 쉽게 풀어 쓴 책을 골랐을 뿐이었다. 의외로 책은 삶의 답을 찾는 방법을 말하고 있었다.

컴퓨터과학과 수학자들의 문제 해결 내력을 삶에 바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내로라 하는 학자와 엔지니어들이 머리를 맞대고, 인간의 계산 능력을 아득히 초월하는 기계를 이용해 답을 찾는 이야기에는 저마다 교훈이 있었다. 알고리즘은 정답이 아니라 최적값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완벽한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저마다의 방법론을 적용해 나온 값은 무작정 찍은 답보다 훨씬 낫다. 


탐색과 이용(exploration & exploitation). 계산신경과학 수업을 들을 때 운율이 인상적이라 기억하던 용어다. 처음 들어본 말이라도 우리 모두 겪는 문제이다. '언젠가 더 큰 호기가 올 지도 모르는데 지금 기회를 잡아야 하나?', ‘몇 번째 연애에 결혼을 할까?’ 수학자들은 이 문제의 최적값을 내놓았다. 기회를 찾는 기간 중 37% 시점에서 이전보다 더 나은 기회를 만났다면 잡아라. 그러면 37% 확률로 최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이 부분을 읽는 동안 내게도 탐색과 이용의 갈등이 있었다. 작가가 알려준 명쾌한 숫자는 적어도 내 선택의 합리화에 도움이 되었다. 지금이면 내 기회 탐색 시간의 37% 시점은 되었겠거니 하며 눌러 앉기를 택했다. 


과적합 (overfitting). 이 또한 머신 러닝에서 많이 나오는 용어다. 관찰한 데이터 몇 개를 바탕으로 그래프를 그려 모르는 구간의 값을 예측한다. 이 때 알고있는 데이터를 전부 식에 넣으면 도리어 그래프가 망가진다. 정확한 값을 추구할수록 실제와 멀어지는 셈이다.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지 일상에서도 과적합 문제는 많이 생긴다. 결단을 내리기 무서워 근거만 긁어 모을 때다. 근거가 너무 많아도 나쁜 결정을 내린다. 차라리 몇가지 큰 근거로 직관을 따를 때가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Overfitting | DataRobot Artificial Intelligence Wiki

우습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요새 한참 빠진 취미 생활에 적용했다. 취미란 덕질이요, 원작의 크고 작은 요소를 따와 패러디 만화를 그리는 2차 창작이다. 인물의 대사 인용구나 작품 내 사건이 일어난 연도 등 자료가 필요할 때마다 팬덤위키를 뒤져 정확한 정보를 찾았다. 어느 순간이 되니 원작을 좋아하는 나도 기억을 못하는 세세한 사항을 그리고 있었다. 읽는 사람도 알아차리지 못할 내용이었다. 당연하지만, 이런 내용보다는 다들 공감하는 내용을 그릴 때가 나도 재밌고 독자도 좋아한다. 


이 외에도 책에는 답을 구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들 때 덜 정확한 답을 택하는 ‘완화’, 앞뒤 사정을 모를 때는 딱 중간으로 생각하라는 '코페르니쿠스 원리' 등, 답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 적용할 지침이 많이 나온다. 읽기만 해도 재미있는 알고리즘도 많다. 처리 속도를 높이기 위한 캐싱 전략, 인터넷이 데이터를 주고받는 방법 등. 알고리즘이 사람의 삶을 위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요즘 우리에게 계산 기계는 이미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탐색과 이용’의 기로에서 '이용'을 택한 덕에 데이터 사이언스 공부 계획은 접었다. 이 책에 나온 알고리즘을 스스로 코딩할 일도 아마 없을 터이다. 선택은 내렸으니 이제는 잘 살면 되는 문제다. 세상에 정답은 없되 나는 최적값을 찾을 뿐이며, 바꿀 수 있는 것은 답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둥의 궤적
리베카 로언호스 지음, 황소연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레베카 로언호스의 <천둥의 궤적>은 장르 소설 독자라면 편하게 읽을 모험 소설입니다. 주인공 매기 호스키는 세계에 갑자기 나타난 괴물을 물리치는 괴물 사냥꾼으로, 믿음직한 동료와 함께 사건의 실마리를 좇습니다. 익숙한 이야기지만 새롭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이 세상에, 또 하나의 모험 이야기를 내놓기 위해 작가가 고심한 흔적이 보입니다.


배경. 작품의 배경은 미국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던 미국 대도시가 아니라, 서부극 이후 50년은 이야기가 끊겼던 드넓은 평원과 우거진 산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속 장엄한 자연 광경을 상상하면 즐겁습니다. 저는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보았던 드넓은 벌판과 게임 <파 크라이 5>의 숲, <파 크라이: 뉴던>의 하늘을 상상하며 읽었습니다.


장르. 마법이 도래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입니다. 어느 날 세상에 도래한 큰물은 문명을 통째로 엎어버렸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차를 몰고, 총을 쏘며, 커피를 구해서 마십니다. 땅의 주인이었던 운 좋은 몇 명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생겨서 새로운 세상의 적수에 맞섭니다.


과학이 패배한 자리를 마법이 꿰찬 세상에서 초능력자 주인공이 활약하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초능력은 잘못 물린 거미나 정체 불명의 싱크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의 믿음에서 옵니다. 부계와 모계에서 내려오는 클랜 파워가 아이의 능력을 결정합니다. 가계를 알면 어떤 능력이 있을지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클랜 파워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옮긴 점은 아쉽습니다. ‘부족의 힘정도로 옮겨도 되었을 텐데.)


주인공. 모험 소설에서 주인공은 동료를 만나고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합니다. <천둥의 궤적>의 주인공, 매기 호스키는 첫 장부터 인간 만랩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클랜 파워 덕분에 여성임에도 남자들보다 빠르고 강합니다. 인간이 아니라 괴물을 상대하는 터라 이야기의 긴장감은 쭉 유지되지만, 책을 읽으면서는 그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웬걸. 매기는 영웅과는 멀었습니다. 독자가 답답할만큼 사람들을 대하기 어려워하고 마음을 잘 읽지 못합니다. ‘큰물이 오기 전까지 평범한 여자아이였던 매기가 어쩌다 산중에 박혀 살게 되었는지, 그랬던 매기가 어떻게 다시 마음을 열고 사람을 믿게 되는지는 이야기가 진행되며 알 수 있습니다.


동료. 매기는 동료 카이를 만납니다. 카이는 미국 틴에이지물에 나올 것 같은 캐릭터입니다. 카이는 잘 생겼고, 자신이 잘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이용하는 주제에, 인격적으로도 완성된 인간입니다. 두 사람은 ‘Badass와 성녀로맨스를 성별만 바꾼 채로 따라갈까요…?


데뷔작이라 거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새롭고, 배경 설명이 끝난 후 호흡이 빨라져 후반으로 갈수록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싶을 때,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싶을때, 무엇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읽고 싶다면 추천합니다.


괴물이 여기를 다녀갔다. 놈의 냄새가 난다.
이건 힘을 쓸 때 풍기는 매캐한 땀내, 씻지 않은 육식동물의 살 누린내,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매새가 조금씩 섞인 악취다. 놈의 냄새가 저녁 공기를 더럽힌다. 냄새의 차원을 넘어 더 깊고 더 근원적인 것으로 팽창한다. 나를 불안하게 흔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밤의 얼굴들
황모과 지음 / 허블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록작 <탱크맨>의 주인공은 정신병원 독실에 갇혀 있습니다. 막힌 벽에서는 매일 똑같은 영상이 나옵니다. 주인공은 누구고, 어쩌다 갇혔을까요. 주인공과 함께 좁은 방을 맴돌던 독자는 세 구절만에 상황을 이해합니다. 단 세 구절만으로 한국인 독자라면 누구든 납득할 디스토피아가 펼쳐집니다.


황모과 작가의 <밤의 얼굴들> 속 얼굴은 한국인의 얼굴입니다. 이 책은 한국 독자야말로 제대로 공감할 SF소설입니다. 머지않은 미래, 내지는 여기에는 없는 기술이 구현된 평행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같은 가상현실 기술이 있어도 세상은 그대로입니다. 한 사람이 짊어지기에 너무나 무거웠던 삶은 다음 세대까지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의 아픔은 역사의 앙금으로 남아 벗겨지기만을 기다립니다.


기억해야 할 사람들, 풀어헤쳐야 할 과거의 이야기가 프로파간다로 읽히지 않는 이유를 마지막 <작가의 말>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수록작에는 우리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있었고, 작가는 아픔에 공감하며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옛 SF 소설에서 사람은 미래 과학을 소개하는 소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외계인 유적을 탐사하든, 궤도 엘리베이터를 만들든, 하다못해 가정부 로봇이 인간이 되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영국인이든 인도인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런데도 주인공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인 '백인 남성'이 맡아 건강한 가치관으로 이야기를 이끌었지요. 다행히 SF 소설은 발전했습니다. 구체적인 한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가 늘어나다 오늘날 <밤의 얼굴들>에 이르렀습니다. 


SF소설이 미래가 아니라 앙금이 풀리지 않은 과거를 향할 때, 이야기 속에는 기술과 마주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밤의 얼굴들>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기술이 나오든 우리는 가족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타지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친해지며,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어보려 애쓸 겁니다. 다만 어떤 기술은 절망한 이에게 삶을 되찾아줄지도 모릅니다. 이 역시도 평생을 바쳐 기술을 만든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밤의 얼굴들>은 밤이 지나길 기다리는, 희망을 놓지 않는 이의 얼굴입니다. 끈기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부축하고, 부축 없이도 혼자 일어나려는 이야기입니다. SF란 상상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이니, 함께 하는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손잡을 수 있습니다. <밤의 얼굴들>이 SF소설로서가 아니라 과거를 기억하는 이야기로 많이 읽히기를, 잊힌 사람들이 되살아날 기술이 아직 없는 이 세계에서 이 책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품고 있다. 생략된 목소리가 색깔을 빛낸다. - P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