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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란 이름의 기억 테익스칼란 제국 1
아케이디 마틴 지음, 김지원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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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이디 마틴의 <제국이란 이름의 기억>은 우주의 중심인 테익스칼란 제국에서 변방 출신 외교관 마히트 디즈마르가 겪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마히트는 '르셀 스테이션'이라 불리는 소규모 우주 정거장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제국을 동경하며 자랐습니다. 어느 날 테익스칼란 제국에서 신임 외교관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옵니다. 제국의 문화와 언어에 능숙한 마히트는 르셀의 새 외교관으로 뽑혀 제국을 방문합니다. 


작가는 제국 수도를 ‘에큐메노폴리스’라 지칭합니다 (수도는 이름이 없습니다. 세상 하나뿐인 수도는 고유 명사가 필요없으니까요). 에큐멘은 어슐러 르귄의 연작 소설 헤인 사이클에서 범 우주 인류 연합체를 의미하니, 고전에 대한 존경과 계보를 잇겠다는 야심이 동시에 보이는 명칭입니다. 특히나 책은 헤인 사이클 중에서 최초로 '에큐멘' 개념이 등장한 <어둠의 왼손>과 비슷합니다. 세계 밖에서 온 외교관 주인공이 군주정 세계에 방문하고, 세계를 다스리는 군주 대신 현지의 수행원이라고 할 법한 인물이 세계를 대표하여 주인공을 안내합니다. 주인공은 현지인과 여러가지 갈등을 겪지만, 나중에는 문화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를 의지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집니다. 여기에 덧붙여 <제국이란 이름의 기억>은 자체로 명문인 <어둠의 왼손>의 서문에 아주 잘 어울립니다. 


“SF는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한다. … 모든 소설은 은유이다. SF는 은유이다. SF가 기존 소설과 다른 것은, 우리 동시대 삶에서 커다란 지배력을 가진 것들, 즉 과학, 모든 과학과 기술과 상대주의적이고 역사적 견해들로부터 가져온 새로운 은유를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 소설에서 미래란 은유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은유하는 것인가?” 


테익스칼란 제국 시리즈 역시 인류의 미래를 예언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제국도 지금의 인간 사회의 어떤 요소를 보여주기 위해 만든 무대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 이런 세계를 만들었을까요? 친절한 작가는 책의 맨 앞에 답을 적어두었습니다. "자신의 문화를 집어삼킨 문화를 사랑해 본 적 있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요. 헤인 사이클이 인류를 대표하는 '에큐멘'의 눈으로 변방의 문화를 관찰하는 이야기였다면, '에큐메노폴리스'를 지닌 테익스칼란 제국은 변방의 문화권에서 세계의 중심을 경험하는 이야기입니다. (테익스칼란 제국은 중남미 아즈텍 문명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던데, 현대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문화를 우주의 중심으로 설정한 점도 재미있습니다.)


'체험할 수 있을 뿐 체화할 수 없는' 타국 문화의 은유는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소설의 주인공 마히트가 겪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을 읽는 독자의 경험입니다. 마히트의 수난사는 스포일러이니 후자만 쓰겠습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독자가 테익스칼란에 익숙해지기 못하게끔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서평단에 선정된 저는 책을 읽으며 틈틈이 이웃 서평단의 트윗을 구경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책 옆에 종이를 두고 메모를 하며 읽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성실한 독서가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앞 페이지로 여러 번 돌아가 사건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사건이 많고 복잡하기도 했지만 테익스칼란의 독특한 이름도 한 몫을 했습니다.


테익스칼란 제국인의 이름은 숫자와 보통명사의 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제국 황제의 이름은 '여섯 방향', 마히트의 수행원의 이름은 '세 가닥 해초'인 식으로요. 반면 테익스칼란 외 사람들은 마히트, 데카켈, 골라에트처럼 발음은 이상해도 평범(?)합니다. '숫자+보통명사' 조합은 작가가 만든 우주의 법칙이 아니라 테익스칼란 제국만의 문화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들이 이야기를 더 어렵게 만듭니다. 황제의 최측근은 누구였고 과학부 장관은 누구였는지 헷갈립니다.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처럼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인물이 그려집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따지고보면 '숫자+보통명사'는 러시아 사람 이름보다 훨씬 간단합니다. 독자는 테익스칼란 세계를 따라가며 '아는 단어로만 이루어져있는데 외우지 못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르셀 스테이션의 인물인 '마히트'나 '데카켈'을 기억하는 것과는 다른 경험입니다. 이외에도 테익스칼란 제국을 낯설게 만드는 요소는 많습니다. 아즈텍 문자를 닮았을 그들의 상형문자도, 그 문자로 이루어졌을 시도 독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재미있게도 주인공 마히트가 테익스칼란에서 겪는 일이 독자의 고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히트는 고향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뽑힐만큼 테익스칼란에 빠삭했지만, 막상 테익스칼란에 가서는 테익스칼란 어린이만도 못합니다. 마히트는 항상 정보에 굶주려 있으면서도, 새롭게 알게 된 정보를 믿지 못합니다. 테익스칼란의 문화양식은 르셀에서 배웠던 것과 다르지 않지만, 외국어로 배운 지식만으로는 테익스칼란인 사이에 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히트는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는 고향인 르셀 스테이션의 운명을 짊어진 사절이며, 동시에 타향인 테익스칼란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산전수전을 겪은 마히트가 테익스칼란을 상대할 수 있게 될 즈음이면 독자도 테익스칼란에 익숙해집니다. 새로운 인물이 나와도 관계도 사이에 채워넣을 수 있고, 전에 나온 고유명사가 다시 나와도 앞 페이지를 뒤적이지 않아도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지도 없이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던 여행지도 하루이틀 지나 앞마당처럼 누비게 되는 것처럼요. 슬슬 세계에 익숙해졌나 싶은 그 때, 테익스칼란은 마히트와 독자를 배신합니다. 남의 문화는 결코 내것이 될 수 없다는 작가의 메시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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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의 추한 역사 - 욕망이 소비주의를 만날 때
케이티 켈러허 지음, 이채현 옮김 / 청미래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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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의 추한 역사>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저자가 보석이나 조개껍질, 화장 같이 자체로 아름답거나,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들을 조사해서 엮은 책입니다. 원서에도 번역서에도역사가 들어갔지만 시대가 나누어지는 역사책은 아닙니다. 저자의 경험과 취향 속 아름다움이 언제 시작되어 퍼졌는지를 자유롭게 쓴 책입니다. 여타 역사책에 비해 주관적이고,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책을 읽다 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책을 주관 없이 쓰기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이야기도 훌륭한 논픽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자의 애정이 담긴 묘사가 뛰어나지만 아쉽게도 책에 시각 자료는 없습니다. 책과 인터넷은 보통은 서로의 시간을 빼앗는 경쟁 관계지만, 이 책만큼은 인터넷을 활용하며 읽어도 아쉽지 않습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보석, , 도자기 등을 인터넷에서 확인하고 읽으면 재밌습니다. 특히 바다 실크(sea silk)는 꼭 검색해보세요. 조개의 부착면에 달린 족사로 만든 비단인데,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아손의 황금 양털이 이것이었다고 추정될 만큼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이 추해지는 이유는 필수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기분 좋은것을 얻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할 때, 아름다움은 추해집니다. 피 묻은 다이아몬드, 비단을 짜기 위해 끓는 물에 손을 넣어야 하는 아이들 이야기는 더럽습니다. 향수에 쓰이는 원재료가 동물의 창자에서 나온 찌꺼기라는 사실보다, 그것을 얻기 위해 일어나는 동물 학대가 훨씬 추합니다.


이 책이 다른 책과 다른 점은 곳곳에 저자의 자기고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아름다움 이면의 추함에 대해 다 알게 된 후에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피부가 나빠질 걸 감안하며 화장을 하고, 옷에 들어가는 저가 노동을 알면서도 이베이에 뜬 저렴한 드레스를 보며 밤새 고민합니다. 일차적으로는 저자가 아름다움에 대한 책을 쓸 만큼 탐미적이기 때문이겠지만, 근본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국민에게 가하는 소비주의 압력이 너무 강합니다


'결혼 반지는 다이아로 해야 한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장미'처럼 책에 나오는 것들은 모두 본래의 아름다움에 덧붙여 자본주의 마케팅으로 부풀려졌습니다. 저자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전세계를 홀린 마케팅은 모두가 숨쉬듯 인정하는 문화가 된 지 오래입니다. 저자는 무의미함과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아름다움의 유혹에 매번 굴복합니다. , 자신의 어린 딸이 반짝이는 것에 손을 뻗을 때만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름다움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저자의 노력이 언제까지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소비가 사람을 이만큼이나 옭아매는 곳에서는 어른도 어린이도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만 듭니다.


저자에 비하면 저는 아름다움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화장을 하지도 않고, 선물받은 것 외에 다른 장신구는 없으며, 옷은 눈에 띄는 곳에 구멍이 날 때까지 버티며 입습니다. 서포터즈 활동으로 이 책을 읽으며 전혀 관심없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아름다움을추한 역사로서 알게 되었기에, 인터넷으로 찾아본 사진이 얼마나 반짝이든 말든 구매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처럼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글입니다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이 새로운 자극이 될 것 같고, 그러면 좋겠습니다.


출판사 서포터즈 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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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벽 - 상 민들레 왕조 연대기
켄 리우 지음, 황성연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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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왕조 연대기 2<폭풍의 벽>은 갓 만들어진 신생 민들레 왕조의 운명을 그린 책입니다. 1<제왕의 위엄>이 초한지를 따라갔다면, 이번 작품은 사기 고조 본기 후반과 여태후 본기를 모티브로 쓴 것 같습니다. 전작에서 주인공 쿠니 가루는 혼란스럽던 자나 제국을 허물어뜨리고 민들레 왕조를 세웠습니다. 황제가 된 쿠니 가루는 자신이 죽은 후 민들레 왕조가 자나 제국처럼 무너질까 걱정합니다.


켄 리우의 민들레 왕조 연대기는 이상합니다. 고유명사만 바꾸었지 중국 한나라의 역사를 빼다 박았습니다. 특히 1<제왕의 위엄>의 원전은 영원한 베스트셀러 초한지입니다. <종이 호랑이> 같은 작품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켄 리우는 맨바닥에서 서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있는 역사를 토대로 평행한 이야기를 써내려갈까요?


중국인으로서 중국 역사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민들레 왕조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주로 다루는 진나라 말에서 한나라 초기 시대를 본땄습니다. 사기는 2천년을 내려온 중국 최고의 역사서입니다. 기원전 100, 한반도에 삼국이 생기기도 전에 쓰인 책이 지금까지 내려오니 대단하지요. 그럼에도 사기는 고고학적 증거로 정확성을 인정받았고, 지금 읽어도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민들레 왕조 연대기는 영어로 쓰인 책입니다. 작가는 아시아인보다는 서양 독자를 염두하고 썼을 것 같습니다. 고대의 역사는 로마밖에 모를 서양인이라면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하고 부러울만큼 재미있게 읽겠지요.


그러나 실제 역사만으로는 책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중국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도 민들레 왕조에 나오는 수많은 고유명사에 아찔해집니다. 여기에 켄 리우 스스로 명령한 실크펑크배경이 덧입혀져 다라 제도는 한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됩니다. 면류관을 쓴 황제 위로 비행선이 오가는 곳입니다.


이런 장치는 중국 역사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역사를 낯설게 보게 합니다. 보통의 한국인은 유방을 사람 운이 좋아 황제가 된 한량이라 생각합니다. 초한지를 다시 읽는다고 달라지지 않을 인상이 다라 제국의 쿠니 가루를 보고서는 바뀔 수 있습니다. 쿠니 가루는 유방이 아니지만 (민들레 왕조는 역사를 그대로 쓰지 않았습니다) 쿠니 가루가 처한 위기와 그의 선택은 유방의 처지와 비슷하니까요.


낯설게 보기 효과는 2<폭풍의 벽>에 와서 극대화합니다. 작가는 유가나 도가, 법가 같은 제자백가의 학풍을 도덕주의나 유형주의처럼 바꾸어 소개합니다. 주인공 조미는 제자백가(의 탈을 쓴 소피스트같긴 합니다)의 토론을 듣고 스스로 판단합니다. 동양 사상에 익숙한 독자는 조미의 사고를 따라가다가 한참 지나고서야 스스로 알던 역사적 상식에 비추어 이야기를 지켜보게 됩니다.


<폭풍의 벽><제왕의 위엄>에 비해 결과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제왕의 위엄의 주인공은 쿠니 가루와 마타진두, 우리가 모두 아는 유방과 항우였지만, <폭풍의 벽>은 저자가 창작한 인물 조미 키도수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습니다. 역사에 없던 인물을 주연으로 가져오며 마침내 민들레 왕조가 한의 역사에서 벗어날지, 조미 또한 거대한 흐름의 일부로 남을지 궁금해집니다. 하권을 아직 읽지 않은 상황에서 후자의 결말을 예상합니다. 여후는 중국 역사에서 악녀의 대명사로 유방을 도와 한을 세운 공신들을 대거 숙청했습니다. 조미의 눈을 통해 한이 맺힌 채 죽는 영웅과 수천 년을 살아남을 민들레 왕조의 역사를 계속 지켜보고 싶습니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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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의 발견 - 믿는 것이 현실이 되는 마인드셋
데이비드 롭슨 지음, 이한나 옮김 / 까치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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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기대의 발견>은 이제는 상식이 된 플라세보에서 시작해 운동, 식이, 수면 등 삶의 다양한 요소에서 기대가 어떻게 우리의 몸을 바꾸고, 바뀐 몸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긍정적인 자세로 살라는 말은 뻔합니다. 이 책이 특별한 지점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전제들이 모두 미래에 대한 주관적인 예상이라는 지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몸에는 좋지만 맛없는 음식에 금방 배가 꺼지는 것, 10rm 무게를 열 번 들고서 지치는 과정조차 모두 미래를 예측한 뇌의 계산입니다. 우리의 뇌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까지 입력받은 정보를 단서로 세상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뇌의 ‘예측 기계’적인 측면은, 가짜 정보에 속아 잘못된 예측을 했을 때 두드러집니다. 제일 유명한 것은 가짜 약을 먹고도 질병이 치료되는 플라세보 효과입니다. 똑같은 원리로 가짜 도핑을 받은 스포츠 선수는 본인 신기록을 냅니다. 이러한 위약 효과는 모르는 사이에 속아 넘어갈 때 가장 극적인 효과를 만들지만, 책에 따르면 누군가에게 속는 대신 미래에 잘 될 것을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변한다고 합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몸이 변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설득하는 것이 제일 어렵겠지만, 이 책에 나온 수많은 사례가 근거로 존재합니다.


플라세보 효과는 부정적으로도 작용합니다. 대부분의 자기실현적 예언은 비극으로 끝납니다. 책을 읽으며 제가 떠올린 예시는 요새 유행하는 ‘도파민’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재미있는 콘텐츠를 보며 ‘도파민을 채운다’고 표현하고, 볼만한 콘텐츠가 없으면 ‘도파민이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실제 작은 분자가 신경 세포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와 무관하게, 이러한 표현이 내재화되며 머릿속에 ‘도파민이 차오르는’ 느낌을 받습니다. 1-2년 전에는 신경과학 연구실에서나 들어봤을 분자가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나는 도파민 중독이야(도파민은 중독의 결과로 작용하는 분자이니 이 문장은 중독에 중독되었다는 말만큼 이상합니다)’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게 됩니다.


스스로 부정적인 사고의 함정에 빠질 때, 이 책의 다양한 사례를 근거로 이겨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반대로 부정적인 사례를 읽고 섣부르게 자신에게 비춰보지는 맙시다. 저는 예방 주사를 읽을 때마다 문진표를 정독하지만, 끔찍한 부작용을 겪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기대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은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달라집니다. 뇌가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 몸을 바꾸는 덕분입니다. 믿어서 나쁠 것 없는 이야기입니다.



까치 서포터즈로 책을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생각 없이 군것질거리로 손이 향하려고 할 때면 전에 먹었던 음식을 다시 떠올리며 맛을 음미하던 기억을 곱씹어보자. 이렇게 뇌가 들어오고 나가는 에너지의 균형을 예측할 때, 기억속 음식의 열량을 고려하도록 상기시키다 보면 생각보다 배고픔도 덜 느끼게 될 것이다. - P210

심리생물학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과거의 경험, 심부체온과 같은 생리적 감각, 현재의 기분과 정신적 긴장감, 그리고 앞으로 남은 과제에 대해 예측한 내용을 활용하여 우리가 어느 정도의 강도로 얼마만큼의 운동을 더 수행할 수 있는지 신중하게 판단한다. 그리고 이렇게 계산한 결과를 바탕으로 운동에 사용할 근섬유의 비율과 신체가 지속할 수 있는 운동의 강도를 결정하여, 이보다 무리를 한다는 신호를 감지하면 근육으로 보내는 신호를 억제하고 운동을 지속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도록 피로하다는 감각을 만들어 움직임에 브레이크를 건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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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 - 나를 이루는 원자들의 세계
댄 레빗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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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히스토리를 좋아하시나요? 세상의 모든 기원을 담았다는 벽돌책을 휘리릭 넘겨보며 가슴이 뛰어본 적 있으신가요? 한때는 저도 빅히스토리를 동경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을 담은 한 권의 책은 추상적인 나열이 되기 십상이었습니다. 다루는 시간이 방대할수록 초점은 희미해졌고, 벽돌책은 3장까지 가기도 힘들었습니다. 


<우리 몸을 만든 원자의 역사>는 세상이 만들어진 역사를 다루면서도 빅히스토리의 함정을 피해가는 책입니다. 한국어판 책 제목에는 ‘역사’가 들어가지만, 연대기순으로 서술한 책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아주 작은 단위에서 볼 수도 있고, 덩어리로 뭉쳐서 볼 수도 있습니다. 책은 이러한 단위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원자와 쿼크에서 시작해 세포와 단백질까지 훑습니다. 우주의 기원을 묻는 질문이 화학을 거쳐 세포생물학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책을 읽고 지식을 알았다는 느낌이 든다면 착각일 것입니다. 책에 나오는 지식을 ‘제대로’ 알려면 대학을 20년은 다녀야 할 것입니다. 


지식 자체보다 과학자의 일화가 중심인 책입니다. 딱딱하고 차가운 지식이 과학자의 인간적인 열정에서 나왔음을 알게 됩니다. 과학자란 어린 제자의 무모한 실험을 말리다가도, 그가 발견한 사실에 최고 학술지에 다이렉트로 꽂아버리기도(!) 하고, 수십 번 되풀이한 실험을 자신도 믿지 못하고 논문에 자신 없는 주석을 달아놓기도 하니까요. 물론 책에는 범인의 열정을 아득히 초월한 집념도 가득하지만, 그런 일화도 '세상에 이런 일이!' 보는 기분으로 읽으면 재밌습니다. 


수많은 인명과 용어가 휘리릭 지나는 책이지만 지식을 바라보는 저자만의 독특한 관점이 있습니다. 저자는 당대 과학자가 빠지는 사고의 함정을 여섯 개로 분류했고, 그중에서도 ‘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하다’, ‘전문가인 나도 지금까지 알아내지 못한 사실이 많은 것을 잊는다’의 사례를 강조합니다. 사람을 상대로 A/B 테스트를 해놓고도 잊혀진 비타민C 부터, 쓸모가 없다고 논문 투고를 거절당한 전자현미경까지. 사고의 함정은 비단 새로운 발견을 늦추었을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목숨을 살릴 기회를 앗아갔습니다. 이 시대의 과학자들도 2024년의 상식에 묶여 명백한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찰과 논리가 부디 상식을 뚫고 나오길 바라야지요.


과학을 전공했거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재밌게 읽을 책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책이 너무 방대해서 무슨 전공을 했든 모든 내용이 익숙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책에서 알게 된 몰랐던 사실은 삶의 다른 순간 개념이 등장했을 때 낯설지 않게 만들어 주겠지요. 반면 이미 알던 지식을 책에서 다시 보았을 때는, 그 지식이 어떻게 나왔는지 비화를 알게되어 재미있었습니다 (이중 나선을 밝히는 부분은 언제 봐도 안타깝긴 했어요. 제임스 왓슨은 제 마음속의 영원한 빌런입니다).


수많은 사례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자세를 논한다는 점에서,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는 과학에 관심이 있거나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한 분들께 마음가짐을 잡아줄 것입니다. 대학 입시 논술을 준비하던 과거의 저에게 주고 싶은 책입니다. 책의 범위가 넓다보니 근대과학의 어떤 지점 문제가 나오든 책을 기억해서 단서를 잇고(그 시절엔 지금보단 기억력이 좋았던 것 같아요), 지식 수준뿐만 아니라 과학을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으니까요. 실험실에서 알아낸 결과가 두서없어 혼란에 빠진 연구자 분들에게도 위로가 될 책입니다. 지금도 실수와 모순 사이에서 분투하고 계실 모든 분들이 이 책에 나온 과학자들처럼 사고의 함정 사이에서 논리의 디딤돌을 찾아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 출판사에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아직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는 것이 핵심이다.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시도를 해보자는 것이 아이디어였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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