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도시가 된다 위대한 도시들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N.K. 제미신의 신간 장편 <우리는 도시가 된다>는 뉴욕의 화신이 도시를 낳는 이야기입니다. 부서진 대지 3부작을 번역한 박슬라님께서 번역하시며, 제미신 특유의 문법도 초월해버리는 문장을 매끄럽게 옮기셨습니다.


공간에 사람들이 모이며 구조가 생깁니다. 구조가 복잡해지며 도시가 생겨납니다. 도시가 완전히 태어나는 순간, 도시 곳곳의 개인이 도시의 화신이 되어 일어납니다. 화신은 도시의 탄생을 막는 적의 무리에 맞서 곧 태어날 도시를 지켜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뉴욕입니다. 주인공은 뉴욕을 구성하는 자치구 다섯 명입니다. 목표는 자치구 다섯개를 대표할 진짜 뉴욕의 화신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제미신이 여러 작품에서 올곧게 밀고 나가는 주제는 하나입니다. ‘인간에 서열을 매기지 마라’. <부서진 대지 3부작>이 판타지였다면 <위대한 도시들>은 엄연히 현실에 발을 걸치고 있습니다. 같은 주제라도 현실이 섞이니 프로파간다 느낌이 짙어졌습니다.


무엇이 소설과 프로파간다를 구분할까요? 이야기가 단순해질수록 주장만 남습니다. 작가 본인도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도시가 된다>의 재미를 디테일에 걸었습니다.


이전 시대 작품을 적재적시에 인용하는 솜씨가 일품입니다. <위대한 도시> 시리즈의 조상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입니다. 러브크래프트를 조금만 알아도 인용이 나올 때마다 낄낄대며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인용이라기보다는 멕이는 것에 가까워서, 죽은 러브크래프트가 약이 올라 살아돌아와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아요.


<우리는 도시가 된다>속 뉴욕은 구석구석 생동감이 넘칩니다. 뉴요커들은 정체성부터 성격까지 모두 다르면서도 뉴요커만의 공통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뉴욕을 모르는 독자로서는 디테일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미국 본토는 가본 적도 없어서, 초반 몇십 페이지를 읽다 덮고 위키피디아에서 뉴욕이 어떤 도시인지 찾아야 했습니다. 현실에 기반한 작품인 만큼 <부서진 대지>를 쓸 때보다 더 철저히 자료조사를 하셨다는데, 작가의 노력이 독자에게 완전히 닿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뉴욕에 한 번도 가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도시가 된다>의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 독자가 작가와 공간을 공유하지 않을지언정 시대는 공유하고 있거든요. ‘옳은 말 하는 사람들에게 ‘SJW’ 딱지(한국어로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씹선비? 꼴페미?)를 붙이는 것도 모자라 죽창으로 찔러대는 사람들,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습니다. 제미신의 묘사에 매번 소름이 돋았습니다. 뉴욕에도 그들만의 디씨펨코와 신남성연대가 있습니다. 인종이 섞여서 더 심합니다. 매일매일 그들을 견뎌낼 뉴요커들이 가련합니다.


전작 <부서진 대지>가 제미신을 모르던 독자에게 제미신 식 정의(正義)를 설득하는 이야기였다면, <위대한 도시> 시리즈는 작가의 정의를 아는 사람들끼리 즐겁게 공유하는 이야기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속 총 든 백남과 본인을 동일시하는 독자라도 <부서진 대지>를 읽을 수는 있습니다. 대부분은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극히 일부는 작가가 왜 이렇게 공을 들여 세계를 만들었는지 깨달을지도 모르지요. 반면 아무리 바보라도 <위대한 도시>시리즈를 읽지는 못할 거예요. 본인을 악마로 못박은 이야기를 어떻게 읽겠어요. 제미신 스스로가 독자 풀을 줄인 것 같으면서도, 애초에 작가가 그들을 자기 책의 독자로 가정했을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평한 것 같지만 <부서진 대지>가 위대한 작품이었지 이번 작품이 나빴던 건 아닙니다. 저는 이번 작품의 세계관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누군가 제미신의 세계관을 적법하게 가져와 <우리는 도시가 된다>의 서울 버전을 써주길 바랄 정도입니다. 하루 종일 막히는 강변북로, 움직이지 않아도 저절로 환승이 된다는 신도림역, 부동산 재개발을 둘러싼 광풍까지. 자치구가 많고 갈등도 많은 곳이라 무척 복잡한 군상극이 될 것 같아요. 서울은 도시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혐오와 저출산 속에 자멸할까요? 우리의 문제이기에 우리가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브롱카가 평생 살아온 바에 따르면, 이런 여자는 항상 조심해야 하는 부류다.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지적받았다고 울부짖는 ‘페미니스트‘, 세금은 내기 싫고 파산한 공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로 실험을 하고 싶은 ‘자선가‘, 인디언 보호구역에 사는 여자들을 ‘돕기‘ 위해 불임시술을 하는 의사들, 베키들, 그래서 브롱카는 이징을 그 이름을 부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건 그렇게 불려 마땅한 이들을 위해 남겨 둬야 한다. - P3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 도심 속 다른 집, 다른 삶 짓기
한은화 지음 / 동아시아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는 ‘마당이 있는 집’을 찾다가 우여곡절 끝에 한옥을 지어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은 전 국민의 4분의 3이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에 사는 나라입니다. 이곳의 수도인 서울에는 이쑤시개 꽂을 공간도 찾기 어렵고요. 저자는 용케도 두 사람이 살아갈 마당 있는 집을 찾아냈습니다. 공무원에게 책 한 권 분량의 민원을 내고, 이웃집 지붕 위로 크레인을 넘겨가며 기어코 집을 지어내고요. 그렇게 얻은 마당 있는 집은 하룻밤에 40만 원 내는 고급 호텔 부럽지 않습니다.


저자가 지은 ‘마당 있는 집’은 우리가 사는 공간과 대비됩니다. 21세기 한국인의 표준적인 삶은 한 칸 원룸에서 방 두셋의 아파트로 진출하는 여정입니다. 20대 때는 역과 가까운 원룸이 최선입니다. 잠자리 말고는 아무 기능도 없는 방입니다. 홈트는커녕 설거지가 귀찮아 밥도 안 먹는 공간입니다. 여유가 생기면 아파트에 갑니다. 거실 한 편에는 TV, 반대편에는 소파. 냉장고가 아닌 그 어떤 것도 둘 수 없는 공간에 양문 냉장고를 두는 삶입니다. 


표준적인 삶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근현대 70년을 거치며 최적화된 주거 형태입니다. 작년에 저는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를 왔습니다. 두 명이서 1.5룸 살다가 아파트에 오니 커피를 마실 식탁이 생긴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주변에 아파트밖에 없다 보니 산책도 아파트 단지로만 다녀야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고 지은 동네라 예쁘고 안전합니다.


어떻게 살아갈지는 스스로 선택할 일입니다. 단독주택에는 단독주택의 장단점이 있고, 아파트의 삶에도 표준이 갖는 장단점이 있으니까요. 문제는 우리 대부분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책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삶 외의 선택지를 알려줍니다. 표준을 벗어난 삶에서 생기는 온갖 문제와 해결 과정, 책 후반부에 사진으로 실린 멋진 한옥은 이 시대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표준과 다르게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선택지'외에 마음에 깊이 남은 점은 집을 얻기까지 저자가 들인 3년 간의 노력이었습니다. 어떤 공간의 삶이든 우열은 없지만, 어떤 마음가짐은 다른 마음보다 더 낫습니다. 저자가 보여준 더 나은 삶은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성공 여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일에 돈과 시간을 들여서 꿈을 이루어낸 과정에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집이 완성되는 과정을 좇으며 저자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느꼈습니다. 사진으로 본 집은 멋있었지만, 집만 보아서는 모든 과정을 느낄 수 없었을 겁니다.


작은 노력으로 확실한 성취를 얻는 것이 유행인 세상입니다. 일일체험이 늘었습니다. 취미를 키트에 담아 팔기도 하고요. 그것도 귀찮으면 돈을 주고 결과물만 사도 됩니다. 소확행이 트렌드인 세상에서 사람들은 노력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무언가를 시도하는 일조차 부담스러워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저자는 아무도 사지 않는 집을 덜컥 샀습니다. 지자체와 시공사를 설득해서 공사 허가를 받아내고, 마침내 마당이 있는 삶을 얻어냈습니다. 2020년 서울에 생긴 한옥인데도 다른 세상 성처럼 낯설게 읽혔습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지루한 시간만 보내게 될 뿐입니다. 성공이 확실하지 않더라도, 예컨대 골목길에 크레인을 대는 데 실패해 눈물을 머금고 헐값에 집을 넘겼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 결과라도 마당이 있는 집에 살겠다 결심하지 않은 삶보다 나았을 겁니다. 삶의 가치와 재미는 살아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으며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루고 싶은 꿈은 모두 다르더라도 누구라도 꿈은 가질 수 있습니다. 한옥에 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도 읽고 나면 많은 생각이 들 책입니다.


http://competition.hanokdb.kr/awards_2020/


한옥 사진이 더 있을까 궁금해 한옥공모전 사이트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동아시아 #한은화 #아파트담장넘어도망친도시생활자 #동아시아출판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개정증보판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상한 정상가족>. 제목만 보고 정상가족이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리라 생각했습니다. 가족 개념이 해체되는 시기인 만큼 정상적이지 않은(?) 가족도 정상 가족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내용으로요. 그러나 <이상한 정상가족>은 우리가 아는 정상가족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책입니다. 가족이 바람직하다는 통념 때문에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동 인권과 가족주의라는 내용이 무거울 수 있지만, 저자의 글솜씨가 좋아 술술 읽힙니다. 시의성도 있습니다. ‘정인이’는 불쌍하지만 ‘민식이’는 귀찮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초판이 나온 2016년에서 개정증보판이 나온 2021년도 지났습니다. 사회의 아동 인권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갈 길이 먼 상태입니다. 그나마 나아진 것은 저자와 같은 사람들이 직접 공직에 가서 반드시 있어야 할 정책을 만든 덕분입니다.


여전히 한국은 가족주의 사회입니다. 가부장에게 시민의 권리를 주는 대신 나머지 가족을 이끌 책임도 함께 지웁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아동학대는 반드시 막아야 하겠지만 체벌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됩니다. 불완전한 아이를 온전히 키우는 의무가 부모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양육 없이 아이는 시민이 될 수 없습니다. 국가는 미혼모의 생활을 지원하는 대신, 아이를 맡아줄 ‘정상적인’ 양부모를 찾습니다.


가족주의 국가에서는 가족 바깥을 포함하지 않는 정책이 나옵니다. 코로나 재난지원금 사례가 그렇습니다. 정부는 코로나 1차 지원금을 지급할 때 세대주에게 가족 구성원 전체의 지원금을 맡겼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은 괜찮았을 것입니다. 평균적인 가부장은 책임감 강한 아버지일 테니까요. 하지만 누군가는 마땅히 받아야 할 지원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제도는 평균인 사람을 가정하고 만들어져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생명과 삶이 달린 일에서는 한 사람도 빼놓지 않는 정책을 짜야 합니다. 개인을 가족으로 뭉뚱그리는 대신 모든 사람을 위한 제도를 세우기 위해서는 시민 각각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가족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 이상 아이들이 다쳐서는 안 된다'는 감상에서 나아가, '아이의 개별성을 존중하자'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상한 정상가족>은 상반기 동아시아 서포터즈 활동으로 받은 책 중 제일 좋은 책이었습니다. 평상시 책을 고르는 기준에서는 선택하지 않았을텐데, 서포터즈 활동 덕분에 귀한 책을 알았습니다. 한 명의 독자라도 늘릴 서평으로 보답하고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저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될까 걱정이 듭니다. 초판을 쓴 이후 저자는 여성가족부 차관으로 일하며 가족을 구성하는 개인을 도울 정책을 만들어왔습니다. 책이 출간된 직후 우리 사회에 구조적 차별은 없으며 여가부는 쓸모없으니 폐지하자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고요. 


혹자는 여성가족부의 ‘여성’과 ‘가족’은 다른 문제이며, 아동 정책은 새로운 정부에서도 지속될테니 여성과 가족은 다른 이야기라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한국은 성차별 문제조차 가족주의에서 기인했다고 말할 수 있는 곳입니다. 여성이 차별받는 이유는 사회가 가부장과 훗날 가부장이 될 젊은 남성만을 사회에서 구실하는 시민으로 간주해왔기 때문입니다. ‘미래가족부’나 ‘인구가족부’라는 이름의 부처가 가족을 인구 유지 수단으로 보지 않고, 아동과 개인을 존중하는 정책을 세울지도 여전히 의심스럽습니다. 


새로운 정권을 살아갈 우리에게 이 책은 더욱 필요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가족주의의 폐단을 깨닫는다면 국가 정책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이가 없는 사람이라도, 또는 누구보다 정성 들여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이라도 상관없이 모두가 읽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구해야 합니다. 책 마지막에 저자가 언급했듯, 우리 모두는 다음 세대에게 희망을 빚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육을 맡은 성인이 아이를 때리는 일에 그토록 민감하면서 왜 부모의 체벌은 갠찮다고 보는 것일까. 사실 어린이집은 부모의 자격을 위임받아 취학 전 아이를 보살피고 교육하는 곳이다. 어린이집 교사의 체벌금지를 말하기 전에 부모의 체벌그미부터 논의해야 하는 것 아닐까 - P36

성인 상당수는 자동차 안전벨트가 없던 시절에 자랐다. 하지만 누구도 안전벨트가 없었던 덕분에 내가 잘 자랄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체벌 덕분에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체벌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살마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 P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쉿 잡 - 왜 무의미한 일자리가 계속 유지되는가?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김병화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불쉿 잡>은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읽어보라 추천하는 책이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소개하기는 겁나는 책이다. 저자는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해로워서 그 일을 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노동에 회의를 느끼는 직업’을 불쉿 직업으로 정의한다. 책을 읽으며 스스로가 불쉿 업무를 한다고 느끼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자신이 불쉿 업무를 한다고 말할 사람도 거의 없다. 그래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현대인이 무의미한 일로 보내는 시간과 자원은 얼마이며, 그걸 모으면 기후 위기 정도는 거뜬히 해결할 것을 알기에 가슴이 답답하다.


책의 정의가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다. 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를 가져와 무엇이 불쉿 직업인지 알려준다. 나도 완벽한 불쉿 사례를 알고 있다. 사무직 친구 이야기다.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외부 감사가 들어왔다. 입사하기도 전에 있었던, 아주 오래 전 프로젝트의 서류가 빠진 상태였다. 프로젝트 서류를 인쇄하고 정리했지만 문제는 그대로였다. 방금 뽑은 빳빳한 종이가 도저히 과거 문서로 보이지 않았다. 결국 친구는 커피를 묽게 타서 종이를 적시고 말렸다. 친구는 청년채움공제를 다 채우지 못하고 퇴사해서 대학원에 들어갔다.


책에 나오는 사례며 내 친구의 일화만큼은 아니더라도, 일하는 사람 치고 불쉿한 일을 피할 이는 없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세상에 기여하는 바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어렵다. 나는 이 책을 브릭에 소개하려다 포기했다. 연구를 위한 연구를 하는 대학원생, 쓸모없는 과제 제안서를 발표하는 교수, 내부인만 보는 게시판을 관리하는 직원이 모욕감을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쉿 직업은 좌나 우의 문제가 아니다.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쉿 직업은커녕 불쉿 업무도 존재해서는 안 되지만, 세상은 불쉿으로 점점 채워진다. 저자는 역사에서 불쉿 직업의 유래를 찾는다. 불쉿 직업에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역사 상 시계가 생긴 후, 돈을 주고 남의 ‘시간’을 산다는 관념이 생겼다. 르네상스 시절 즈음 영국에서 자식을 다른 귀족의 집에 보내며 ‘남의 일을 해 보아야 어른이 된다’는 관념이 생겼다. 시장 경제가 발달하고 유무형의 가치를 구별하게 되자 ‘돈으로 셀 수 없는 것’에 돈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 쓸모 없는 일로 서로를 고통에 빠트려야만 돈을 받을만 하다고 합의하게 되었다.


책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았다고 알려준다. <불쉿 잡>은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에 의문을 던진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 이면에는 앞서 언급한 남의 시간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는 관념 외에도 노동은 신성하며, 누군가를 섬기는 것도 일이라는 등의 여러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당연한 관념의 유래를 찾는 과정은 재미있었으나, 그 역사가 서양에 국한된 점은 아쉬웠다.


한국 사회에서 직업의 가치는 직업을 얻기 위해 얼마나 불쉿한 준비 기간을 보냈는지에 달려 있다. 일이 얼마나 사회에 기여하는지는커녕, 일이 얼마나 고생스러운지와도 무관하다. 오죽하면 같은 일을 하더라도 공채 합격자가 임시직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 것이 당연하겠는가. 직업을 얻기까지 ‘불쉿 준비 기간’을 겪고서 기업에 보상을 바라는 것이다.


생산기술은 진보하지만 일자리는 줄어드는 오늘날 한국은 불쉿 준비기간을 늘려서 사람들의 근로 기간을 최대한 늦추는 전략으로 가는 것 같다. 똑같은 개발자라도 특성화고 졸업보다 부트캠프를 갔다온 비전공 대졸의 연봉이 높다고 들었다. 사람들은 좋은 일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취업 학원에 등록한다. 강사는 일을 하다가 일자리의 불쉿함에 뛰쳐나온 사람이다. 한국의 일자리에 불쉿 준비 기간이 길다고 일자리를 얻은 후 불쉿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불쉿 직업이 만연한 세상에 저자가 내놓는 대안은 기본소득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회다. 사람들이 안심하고 직장을 그만둘 수 있어야 월급을 주기 위해 쓸모 없는 일을 시키는 악순환이 멈춘다. 사람들은 걱정한다. 사회가 기본 소득을 제공하면 쓸모 없는 한량만 늘어날 것이라고. 저자는 답한다. 사람들의 3-40%는 지금도 쓸모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타버스 사피엔스 - 또 하나의 현실, 두 개의 삶, 디지털 대항해시대의 인류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22년 1월
평점 :
일시품절


작년에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하는 과학 저술가 수업을 들었습니다. 출판업계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재미있는 한탄을 들었습니다. '전공자들은 제 전공만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리학 교수님은 물리 이야기만 쓰고, 생물학 작가는 생물학 이야기만 쓰니 다른 분야의 독자를 끌어오지 못하고, 독자들도 작가에게 예상한 지식만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과학 전공자는 논문 한 편에 얼마나 많은 참고 문헌이 들어가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조심스럽다못해 양심에 어긋납니다. '2008년에 이루어진 연구'를 '21세기 이루어진 연구'라고 뭉뚱그릴지언정, 다채로운 글을 읽고 싶은 독자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입니다.


카이스트 전기전자공학부의 김대식 교수는 당신의 전공 분야를 넘어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용기있는(?) 분입니다. 뇌과학자라고 하더라도 '메타버스'를 논하기는 어려우니까요. <메타버스 사피엔스>는 이런 저자가 메타버스 시대를 가능하게 하는 사람 뇌의 원리와 기계의 계산 방식을 쉽게 풀어쓴 책입니다. 


문제는 메타버스가 무엇인지는 세상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는 점에 있습니다. 현재 VR 기술로는 완벽한 가상 현실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저자도 말하지만, 지금 '메타버스'라고 나온 다양한 플랫폼은 미래의 가상 현실 세계나 과거 MMORPG 게임의 열화판입니다. 그러다보니 책에서도 메타버스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대신, 메타버스와 관련한 재미있는 토막 지식을 내놓는 정도입니다. 자체로도 재미는 있었지만 변죽만 울리는 느낌이 가시지는 않았습니다.


Z세대에게는 메타버스가 현실이라고 했지만, 책에는 Z세대의 목소리가 하나도 나오지 않은 점도 아쉬웠습니다. 현상을 밖에서 팔짱끼고 평하는 듯 했습니다. 전에 읽었던 경향신문의 제페토 취재 기사가 떠올랐습니다. (자주 들어본) 마인크래프트도 아닌 것이 세상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 신기했습니다. 메타버스가 궁금해서 책을 든 기존 세대 입장에서는 현대의 메타버스에 대한 묘사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메타버스의 가장 큰 목적은 현실의 도피처이며 대안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현실이든 가상 현실이든 사람입니다. 비대면 환경에서 비언어적 소통이 되지 않아 생기는 문제는 미래에 기술적으로 해결 가능하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예의와 태도의 문제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 이상 영원히 남을 겁니다. 사람을 전부 인공지능으로 바꾼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가짜 메타버스에 접속하느니 1인칭 콘솔 게임을 하고 말지요. 게다가 훌륭한 1인칭 콘솔 게임에는 메타버스에는 없는, 작가가 직접 만든 서사가 있으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