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쉿 잡 - 왜 무의미한 일자리가 계속 유지되는가?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김병화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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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불쉿 잡>은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읽어보라 추천하는 책이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소개하기는 겁나는 책이다. 저자는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해로워서 그 일을 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노동에 회의를 느끼는 직업’을 불쉿 직업으로 정의한다. 책을 읽으며 스스로가 불쉿 업무를 한다고 느끼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자신이 불쉿 업무를 한다고 말할 사람도 거의 없다. 그래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현대인이 무의미한 일로 보내는 시간과 자원은 얼마이며, 그걸 모으면 기후 위기 정도는 거뜬히 해결할 것을 알기에 가슴이 답답하다.


책의 정의가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다. 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를 가져와 무엇이 불쉿 직업인지 알려준다. 나도 완벽한 불쉿 사례를 알고 있다. 사무직 친구 이야기다.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외부 감사가 들어왔다. 입사하기도 전에 있었던, 아주 오래 전 프로젝트의 서류가 빠진 상태였다. 프로젝트 서류를 인쇄하고 정리했지만 문제는 그대로였다. 방금 뽑은 빳빳한 종이가 도저히 과거 문서로 보이지 않았다. 결국 친구는 커피를 묽게 타서 종이를 적시고 말렸다. 친구는 청년채움공제를 다 채우지 못하고 퇴사해서 대학원에 들어갔다.


책에 나오는 사례며 내 친구의 일화만큼은 아니더라도, 일하는 사람 치고 불쉿한 일을 피할 이는 없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세상에 기여하는 바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어렵다. 나는 이 책을 브릭에 소개하려다 포기했다. 연구를 위한 연구를 하는 대학원생, 쓸모없는 과제 제안서를 발표하는 교수, 내부인만 보는 게시판을 관리하는 직원이 모욕감을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쉿 직업은 좌나 우의 문제가 아니다.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쉿 직업은커녕 불쉿 업무도 존재해서는 안 되지만, 세상은 불쉿으로 점점 채워진다. 저자는 역사에서 불쉿 직업의 유래를 찾는다. 불쉿 직업에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역사 상 시계가 생긴 후, 돈을 주고 남의 ‘시간’을 산다는 관념이 생겼다. 르네상스 시절 즈음 영국에서 자식을 다른 귀족의 집에 보내며 ‘남의 일을 해 보아야 어른이 된다’는 관념이 생겼다. 시장 경제가 발달하고 유무형의 가치를 구별하게 되자 ‘돈으로 셀 수 없는 것’에 돈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 쓸모 없는 일로 서로를 고통에 빠트려야만 돈을 받을만 하다고 합의하게 되었다.


책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았다고 알려준다. <불쉿 잡>은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에 의문을 던진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 이면에는 앞서 언급한 남의 시간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는 관념 외에도 노동은 신성하며, 누군가를 섬기는 것도 일이라는 등의 여러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당연한 관념의 유래를 찾는 과정은 재미있었으나, 그 역사가 서양에 국한된 점은 아쉬웠다.


한국 사회에서 직업의 가치는 직업을 얻기 위해 얼마나 불쉿한 준비 기간을 보냈는지에 달려 있다. 일이 얼마나 사회에 기여하는지는커녕, 일이 얼마나 고생스러운지와도 무관하다. 오죽하면 같은 일을 하더라도 공채 합격자가 임시직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 것이 당연하겠는가. 직업을 얻기까지 ‘불쉿 준비 기간’을 겪고서 기업에 보상을 바라는 것이다.


생산기술은 진보하지만 일자리는 줄어드는 오늘날 한국은 불쉿 준비기간을 늘려서 사람들의 근로 기간을 최대한 늦추는 전략으로 가는 것 같다. 똑같은 개발자라도 특성화고 졸업보다 부트캠프를 갔다온 비전공 대졸의 연봉이 높다고 들었다. 사람들은 좋은 일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취업 학원에 등록한다. 강사는 일을 하다가 일자리의 불쉿함에 뛰쳐나온 사람이다. 한국의 일자리에 불쉿 준비 기간이 길다고 일자리를 얻은 후 불쉿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불쉿 직업이 만연한 세상에 저자가 내놓는 대안은 기본소득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회다. 사람들이 안심하고 직장을 그만둘 수 있어야 월급을 주기 위해 쓸모 없는 일을 시키는 악순환이 멈춘다. 사람들은 걱정한다. 사회가 기본 소득을 제공하면 쓸모 없는 한량만 늘어날 것이라고. 저자는 답한다. 사람들의 3-40%는 지금도 쓸모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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