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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의 재판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26년 1월
평점 :
도진기 작가의 [4의 재판]
"사람들의 큰 착각. 왜 법이 정의를 찾아줄 거라고 기대하는가. 법은 정의를 위해 있지 않다. 이 사회의 유지에 더 관심이 많다. 주먹이 아니라 신호등에 가깝다고나 할까." (292쪽_서찬휴 변호사의 글 중에서)
법은 악을 뿌리뽑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악이 마음껏 날뛰지 못하도록 도덕적 경계를 나누고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폭력을 제도적 장치로 여과해 사회 질서와 국민의 안녕을 보장한다. 다시 말해, 법은 최소한의 규제로 사회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어떤 판결은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남긴다. 그 이유는 법의 안전망이 '선'을 위해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악'이라는 사회 이면의 질서까지 포괄하고 있다. 가령 피의자의 신변보호, 묵비권 행사, 변호사 선임 권리, 무죄추정의 원칙, 공소시효 등이 그렇다. [4의 재판]에서는 배영길이 혐의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는 데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던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 이란 '이 사람이 무죄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면 유죄판결을 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심이 들지 않는 수준까지 입증이 이루어져야 유죄로 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이는 사건의 진실을 가르는 과정에서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자'는 취지인데, 문제는 그 따뜻한 배려의 대상이 '피해자'가 아니라 '피. 의. 자'라는 데 있다. 도진기 작가의 [4의 재판] 은 바로 그 불편한 현실을 허심탄회하게 고발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단순히 '법이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 한선재의 남자친구, 송지훈의 죽음과 관련하여 모든 법적 절차는 규칙에 따라 진행되었고 법리는 충실히 적용되었다. 문제는 그 결과가 '정의'가 아니라 '사회 질서'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악인 배영길은 처벌받지 않았고 사건은 종결되었으며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이 사건을 입에 올릴 수 없게 되었다.
...
사건은 사회의 질서를 헤치지 않는 범위에서 깨끗이 종결되었다.
"재판은 악인을 단죄하지 못했지만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271쪽)
우리는 이 판결이 담고 있는 뒤틀린 현실에 알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낀다. 정의를 구현하지 못한 재판도 어이없지만 악을 향해 더이상 어떠한 문제제기도 할 수 없다는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그것을 감히 '사회 질서의 정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서찬휴> 변호사는 이 질문의 한가운데 있다. 그는 법의 탄생 배경이 본래 왕권을 위한 질서유지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회적 인프라의 한 형태로 매끄러운 국가 운영에 초점을 맞춘다. 애초에 '정의 실현'이라는 이상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중에게 '누구나 처벌받을 가능성'을 인식시키는 것이 법의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뿌리가 같은 현행 사법 체계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진범이 활개치는 사회를 상상하며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에서 대상을 잃고 방황하는 피해자의 응보를 애석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각은 법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법을 활용하는 법률가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 안에서 움직이는 자의 한계가 진범을 석방시키는 기이한 행태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역시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법의 필요성을 통감하는 법조인이라는 점이다. 그런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SNS에 글을 올리는 것 뿐이다.
[4의 재판]은 그 '냉소(冷笑)' 터져 나오는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법은 수없이 많은 정황증거에도 단 하나의 오류 가능성을 우선시한다. 혹시나 발생할 억울함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충돌하는 기묘한 우연을 일상의 파편으로 취급한다. 판사의 방어적인 해석은 피의자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한다. 결국 살인죄의 무게는 고스란히 유가족이 짊어지게 되는 구조다. 피해자와 피의자가 정확히 뒤바뀐 구조.
여기서 '혹시나 발생할 오류 가능성'이란 신성한 판결에 흠이 될 잠재적 위험요소였을까? '무고할지도 모를' 피의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행위는 그 신성함을 잃지 않으려는 법원의 구태의연한 자구책은 아니었을까? 를 상상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보호'인가?!
이 질문은 한선재를 통해 더욱 날카로워진다.
그녀는 희생자 송지훈의 여자친구다. 그녀는 송지훈을 죽인 살인자 배영길의 무죄판결을 목격한 목격자다. 동시에 사법 시스템의 구멍을 목격한 목격자이기도 하다. 상식을 파괴하는 판결은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사건기록물을 훔치고, (서찬휴)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보험회사에 훔친 자료를 넘긴다. 법은 더이상 그녀에게 신뢰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원칙과 절차로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다.
사실 그녀는 이 소설을 통틀어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법의 테두리 밖에서 절차를 무시하고, 관례를 깨며 상식대로 행동한다. 법의 출현 이전에 규범으로 삼았을 법한 인간의 도리와 상식으로 사건을 바라본다. 어쩌면 한선재는 서찬휴의 이상적인 생각을 실천에 옮긴 행동대장이며, 이 시대에 꺼져가는 불꽃을 살릴 정의라는 작은 불씨였을 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현실의 사법체계가 갖고 있는 불합리에 경종을 울리는 알람 장치일수도 있겠다.
반대로 배양길은 이 체계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다.
그는 살인자이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한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법을 잘 이해하고 있다. 경직된 체계의 허술한 틈, 인간 판단의 오류 가능성, 절차가 진실보다 우선시되는 순간을 정확히 알고 있다. 학창 시절부터 타인을 지배하고 조종해온 그는 법이라는 질서 안에서도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한다. 그의 세계에서 법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악을 실현하는 도구이다.
흥미로운 것은 배양길의 모습이 묘하게 법정의 절대자(판사)와 닮아 있다는 점이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고,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으며 맥락보다 형식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사회에서 두 인물은 정확히 대척점에 위치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이 생각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법정에서 판사는 신성불가침 영역의 절대자다. 그러나 그(녀)의 권위는 대중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출현했던 원시적 집단에 뿌리를 둔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이러한 허구 집단은 초기에 일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다가 어느 순간 조직이 커지고 관료화되자 원래의 목적보다는 관료체계의 관성과 관례들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고 밝힌다. 과정과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고 대중이 접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법조인은 대중의 권리를 대신하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판사의 신성한 권위도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더욱 높고 두터워졌음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법이 가진 권위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체계의 복잡한 절차와 과정이 대중의 상식과 단절되고 정보의 장막 뒤에서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린다는 게 문제다. 특히 법을 실행하는 주체자-판사, 검사, 변호사-가 정보를 독점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성역화하기 때문에 대중은 법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고 결국 이것이 대중과 법조인 사이에서 깊은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같은 맥락에서 [4의 재판]이 말하는 법의 문제는 제도 그 자체라기보다 제도를 활용하는 '인간의 한계'에 더 가깝다. 법은 악을 뿌리뽑지는 않지만 효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통제 장치가 지나치게 형식화되고, 관료화되며, 신격화될수록 체제는 경직되고 악은 그 틈을 파고든다. 그곳에서 착함은 약함으로 오인되고 상식은 폭력에 침묵한다.
도진기 작가의 [4의 재판]은 인간의 불완전함 위에 세워진 신성한 법의 영역을 형식주의적 '질서 지향'이라는 측면에서 냉철하게 바라본다. 법은 정의 구현과 국민의 안녕을 위해 최소한의 안전망으로 억울한 사람 없이 분쟁을 해결하려 한다. 따라서 판결은 정황 보다는 직접적인 증거에 입각해서 내려진다. 직접적인 증거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심증이나 감정, 맥락을 배제한다. 그것은 단 1%, 아니 0.1%의 오류 가능성도 용납하지 않는다. 여기서 오류 가능성은 신성한 법정의 권위를 날려버릴 정도의 섬뜩한 가능성과 일치하므로 모든 정황이 범인을 지목하더라도 법의 권위 앞에서 상식은 무시된다. 그것이 법이 추구하는 정의 구현 방법이다. 그러나 법이 정의의 중심에서 판결의 무오류성을 입증하는 데만 집중하다보니 진실을 왜곡하게 되고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범죄의 무게를 전가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작가 도진기는 [4의 재판]을 통해 '과연 우리 사회는 법을 정의롭게 작동시키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법의 형식과 절차가 무엇을 위해 수립되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더불어 치열한 법리다툼에 매몰된 진실을 상식의 시선에 맞추기를 희망한다.
법원은 국민을 위한 공공기관으로서 신성한 장벽을 깨고 과정의 투명성을 갖추어 국민으로부터의 신뢰를 회복하고 원래의 목적인 공익과 정의 실현을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법조인과 대중이 동등한 관계 속에서 공통의 언어를 찾게 된다면, 지금의 반쪽짜리 정의에 나머지 반쪽을 이어 붙일 수 있지 않을까?
기득권의 생리를 고려한다면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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