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노예 남편 아내 - 2024 한국인 최초 퓰리처상 수상작
우일연 지음, 강동혁 옮김 / 드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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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일연 작가님의 [주인 노예 남편 아내]

작가는 이 이야기를 1848년에서 1852년에 일어난 '저항과 자유를 향한 희망의 이야기'라고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노예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미국에서 두 노예가 추운 겨울 자유를 향해 탈출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 조지아주 메이컨, 로버트 콜린스라는 한 백인의 집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의 집 한 켠 흑인 노예, 엘렌과 윌리엄이 있다. 그들은 이동, 교육, 결혼, 재산소유의 자유가 없다. 그저 콜린스家에 있는 개, 돼지, 닭, 식탁, 의자와 같은 재산 목록의 일부일 뿐,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노예제'라는 허구에 빼앗겨버렸다.

엘렌과 윌리엄은 서로를 사랑했고, 자유를 갈망했으며,
자신의 아이들이 자유의 땅에서 태어나 교육받기를 원했다.

결국 엘렌은 백인 남성으로, 윌리엄은 주인을 모시는 흑인 노예로 위장한 채 메이컨을 떠난다.

1,600km(메이컨~필라델피아)의 고되고 힘든 여정을 서로에게 의지하며 앞만 보고 나아간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도처에 도사리는 위기와 고난도 그들의 지혜와 용기, 자유를 향한 강건한 의지 앞에 길을 내어준다.
달리 표현하면 자유에 대한 그들의 속 깊은 응어리가 그 모든 어려움을 보잘것 없게 만들었는 지도 모른다.
목표는 생존! 살아서 '자유'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짓밟는 시대의 모순을 비웃기라도 하듯 엘렌은 백인 남성을 연기한다. 윌리엄은 그의 충직한 노예로서 그리고 그녀의 남편으로서 임무를 수행한다.

컴컴한 어둠 속으로 내딛는 그들의 발걸음은 지금 우리가 책을 통해 보는 시공간의 이동과는 완전히 다른 무엇이었을 것이다.

성공해도 법의 테두리에서 평생을 도망자로 살아야 했으며, 실패한다면 가혹한 고문과 이별만이 그들을 기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딛은 무거운 발걸음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한다. 죽음을 불사한 그들의 여정이 자유를 향한 그것과 일치한다는 잔혹한 역설을 느껴보려 노력한다. 누군가의 소유물로서 존재한다는 가학적인 개념을 머리 속에 욱여넣어서라도 그 아픔을 헤아리려 시도한다.




19세기 미국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경제 시스템으로 자본시장을 돌렸다. 그들이 탈출을 감행한 시기는 미국이 '신의 뜻(Manifest Destiny)'에 따라 영토를 확장하던 때였고, 이는 각 지역들간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야기시켰다. 마침 남부와 북부는 노예제 찬반을 놓고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역사의 변곡점 에 엘렌과 윌리엄이 있었다.

그들의 탈출은 "인간의 존엄을 누가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거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우생학, 골상학, 홀로코스트, 상놈과 양반, 귀족과 천민, 백인과 흑인, 순종과 잡종을 나누는 인간의 허구는 스스로를 얼마나 잔인하게 변모시킬 수 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계층의 피라미드 그 꼭지점에 서려는 이기적인 탐욕을 과학과 종교, 법이라는 껍데기로 칭칭 싸매 그 속에 은신하려 했던 역사 속 인물들을 상기하게 만든다.

책 속에 소개되는 노예 고문 장소인 '슈거하우스'는 주인의 요청에 따라 고문 방법, 횟수, 시간 등을 주문받는다. 그 중 가장 악명 높은 '영원한 계단'은 고속으로 돌아가는 챗바퀴 위에서 노예가 끊임없이 내달리는 고문으로 만일 지쳐 떨어지면 팔다리가 찢겨나갔다고 한다. 도처에서 열리는 노예시장은 경제 논리로 인간을 사고 팔았던 탐욕적인 장소를 대표한다.

"경매인 두 명이 탁자에 올라가 있었다. 한 명은 망치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입찰가를 불렀다. 그들 뒤와 아래에 팔릴 사람들이 서 있었다. 혼혈 여성이 올라왔다. 그녀는 노란색 두건을 쓰고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으며, 두 자녀와 함께 있었다. 아기가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또 다른 아이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쥐고 있었다. 어머니의 시선은 양옆을 빠르게 오갔다."

도덕성과 공감능력을 상실한 당시 백인들의 모습은 집단적 광기를 띠고 있었다.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은 피부색에 가려졌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가족의 외침은 편견에 침묵되었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믿는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 권리에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가 포함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이 평등과 자유, 그리고 행복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1848년 흑인에겐 실체없는 허상이었다.

법과 원칙,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안전장치가 중립적이어도 인간의 삶은 여전히 아름답고 평화로울 수 있음을 그당시 백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노예제 폐지에 반대했던 <캘훈>의 말을 통해서도 남부 백인들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그들과 처지를 바꾸게 될 것이다. 여태껏 자유롭고 개명된 사람들에게 닥친 그 어떤 모욕보다 큰 모욕이자, 우리로서는 탈출할 수 없는 모욕이다. (중략) 우리 자신과 조상들의 집으로부터 도망치고, 우리의 땅을 과거 우리가 부리던 노예들에게 넘겨줌으로써, 이곳은 무질서와 무정부주의, 가난, 비참함, 불행이 영원히 사는 곳이 될 것이다."

엘렌과 윌리엄은 자유주인 필라델피아에 도착하면서 윌리엄 스틸, 로버트 퍼비스, 바클레이 아이빈스, 윌리엄 웰스 브라운 과 같은 굵직한 반노예 활동가들을 만나게 된다. 그로부터 크래프트 부부의 개인적인 불편과 자유에 대한 욕망은 '노예제 폐지'라는 거대한 명분으로 변모했다.

시대를 풍자하는 그들의 모험정신과 믿을 수 없는 임기응변, 그리고 강렬하고도 책임감 있게 서로를 아끼는 모습은 북부의 수많은 흑인 공동체들을 열광케 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자유'의 상징이며, 유색인종의 '미래'가 되었다.

'백인이 속박했던 흑인'의 역사가 아닌,
'흑인이 인내했던 백인'이라는 관점으로 역사를 돌이켜 보자면,

흑인에게 백인은 어쩌면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라는 거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악한 인종이지 않았을까?

손에 쥔 것을 잃을까 두려워 채찍과 사슬, 법과 과학을 들이대며 어떻게든 '빈껍데기 허상'을 지켜내려 조급해하는 힘 없는 존재로 보이지는 않았을까?

흑인이야말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속박하는 데 있어 그 어떤 명분이나 이유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너그러운 존재는 아니었을까?

라는 헛헛한 상상을 하게 된다.

크래프트 부부는 자신들의 투쟁이 어디서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유색인종들의 소망과 갈망에 공명하듯 더 높은 가치를 위해 그 위에 당당히 섰다.

어쩌면 세상은 누가 더 큰 울림으로 공감을 얻느냐에 따라 그 방향이 정해지는가 보다. 엘렌과 윌리엄이 결국 자유를 얻어냈으며, 오늘날 그의 후손들이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유명한 말 중, "도덕적 우주의 호선은 길지만, 결국 정의를 향해 굽어진다."는 뜻 역시 인간 본성이 마땅히 지향하는 방향은 그 무엇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맥락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누구나 그 맥락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주인 노예 남편 아내]는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제공한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엘렌과 윌리엄의 탈출기는 번역가가 후미에 밝힌 것처럼 책을 뚫고 나와 심장을 진동하고 일상을 파열시킨다.

오늘의 나는 감히 그들이 느꼈을 감정을, 절박했던 상황을, 만끽했을 기쁨을 상상한다.140여 년이 흐른 지금 크래프트 부부의 탈출이 도덕적 호선의 방향을 얼마나 틀어놓았는지를 가늠한다. 그들에게 이 엄중한 임무를 일임받은 것처럼 말이다.

우일연 작가님의 [주인 노예 남편 아내]는 한 노예 부부의 탈출기를 통해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기인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허구 속에서 응축하고 폭발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진보하는 도덕적 존재임을 넌지시 비춘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 수많은 사람들의 저항과 투쟁위에 세워진 '자유 시대'임을 상기시킨다.

번역가 강동혁 님의 말씀처럼, 이 이야기를 접한 나는 그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세상을 나누는 수많은 기준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도덕과 윤리가 특정집단에게만 호의적이지는 않은지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가 도덕적 우주의 호선,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항상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크래프트 부부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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