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를 제대로 만나기 위한 책들>


3. 도스토예프스키 평전(E.H.카) 


현재는 절판인데 운좋게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한 책입니다. 1시간 훌쩍 넘는 거리를 '아 그 사이에 팔리지 말아야 할텐데'하면서 간 끝에 손에 쥐었습니다. 감촉이 좋더군요. ㅎㅎ


사실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을 몇 권 가지고 있어서 또 다른 평전에 딱히 큰 욕심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저자때문에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었어요. 


다들 잘 아시겠지만 E.H.카, 하면 그 유명한 <역사란 무엇인가>와 그보단 조금 덜 유명한 <러시아 혁명>를 쓴 분이죠. (참고로 이 분의 주 전공은 소련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역사학자가 한 개인의 평전을 썼다면 비록 100프로 완벽하진 않더라도 최대한의 실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분석하며 그 실체를 만들어가는 과정도 꽤나 엄밀했을 것이고요. 


(여담이긴 합니다만 한국에서 번역된 <러시아 혁명>은 입문서격이고 엄청 두꺼운 볼셰비키 러시아 혁명사 책이 따로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번역이 되면 좋겠네요. 아쉽게도 한국은 변화, 진보에 대한 열망은 강한데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소련에 대한 책은 잘 나오지도, 번역이 되지도 않는 것 같아요.) 


책 표지는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은 E.H.카의 첫 번째 저서라는 점을 밝히며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도스또예프스끼를 모르고서는 현대 러시아에 접근할 수 없다." 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 아직 앎이 얕은지라 둘의 연관관계는 잘 모르겠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현대 러시아의 관계를 아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있으면 추천부탁드립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이 책을 총평하자면 작지만 알찬 책입니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상식들이 믿을만한지에 대한 해석과 그의 삶이 어떤 작품에서 어떻게 묘사됐는지 분석이 잘 돼 있습니다. 가령 프로이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는데, E.H.카는 여러가지 자료들을 근거로 그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책을 쭉 읽어갈수록 E.H.카가 그려낸 도스토예프스키는 미디어 강의 속 도스토예프스키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내용보다는 그걸 담아내는 형식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 날씨를 참 많이 닮았습니다. 또 그 러시아의 날씨가 만들어낸 러시아인이기도 하겠지요. 


조금 더 배움이 쌓이면 조그만하게나마 '도스토예프스키 독서모임'을 꾸려보고 싶은 겨울밤입니다. 저는 요즘 '백치'를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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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를 제대로 만나기 위한 책들>


2. 도스토예프스키, 키에르케고르, 니체, 카프카

(*까치에서 출판된 동명의 번역본이 상품에서 검색되지 않아 원서를 첨부했습니다. 역자에 따르면 책의 초판 제목은 <Four prophets of our destiny>라고 하네요. 우리 운명의 네 예언자들 정도로 해석되겠네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읽고 공부할 때마다 니체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도스토예프스키 책 커버에서도 니체의 이름을 찾을 수 있죠. "도스토예프스키, 그는 내게 무언가를 알려준 유일한 심리학자였다." -니체-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이런 맥락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우연히 도스토예프스키, 니체를 검색했는데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다행히 중고책이 몇 권 남아 있어 저렴한 값에 구매를 했네요. 


책에서 작가는 4명의 사상가를 예언자적 인물에 비유합니다. 다들 문학과 철학을 통해 인간과 인생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는 것이죠. 하나로 수렴되는 이들의 메시지. "우리의 인생은 파탄 상태다!"


현실에 대한 분석은 같지만 해결책은 각각 다릅니다. 




그 해결책을 꼭 이 책을 통해 만나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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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를 제대로 만나기 위한 책들>

1. 도스토예프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자들을 위한 신학
(저자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전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습니다. 으레 한 번쯤은 거치기 마련인 도스토예프스키 중심의 러시아 문학 수업도 들은 적이 있지요. 처음엔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그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를 드디어 배운다니!' 하지만 그 기대가 꺾이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무슨 책이 그렇게 두꺼운지요. 러시아 특유의 긴 이름은 또 어떻구요. 더구나 그 당시엔 전역 직후라 그런지 약간 들떠있는 상태였습니다. '정신병동의 셰익스피어", "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잔인한 천재"라고 불리는 그를 만나기에 준비가 안 돼 있던 상태였던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삶에 대한 질문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신학과 철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고민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이 책을 만났습니다. 겉보기엔 크기도 작고 분량도 많지 않습니다. 문고판 비슷한 판형에 페이지는 190쪽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겐 그 어떤 두터운 책보다 강한 울림을 전달해줬던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두터운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이 짧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던 사람이라 그랬을까요?

첫 부분만 이곳에 옮겨봅니다. 이 책이 당신을 선택하길 바라봅니다. 


"한때 야생의 삶을 살았으나 안전한 현실에 길들여진 새 한 마리가 갑자기 자기 머리 위에서 자기와 똑같은 야생 새의 날갯짓 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날개를 퍼덕이게 된 것과 같다. 그 소리는 두려움이지만 동시에 황홀한 유혹이다."


-키르케고르-

참, 이 책 첫 장의 제목. '인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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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들어가는 자, 희망을 버려라." -단테의 신곡 지옥편- 


가장 좋아하는(?) 지옥의 정의다. '희망이 없는 곳.' 

이 말을 곱씹어보면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말이다. 

절망 그 자체의 상태. 푹 꺾인 고개를 들 이유조차 없는 상황.

이럴 때 인간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삶을 어떻게 해야할지 만지작 거리게 된다.

확 깨부숴버릴까?


난 신이 없는 인간의 실존이 바로 이런 상태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에 누군가는 자신은 신을 믿지 않지만 지옥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신이 없어도 돈, 명예, 사랑 등 여러 행복의 요소들로 삶을 알차게 채워가는 듯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소용없는 순간, 바로 죽음이 우리를 인생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제 아무리 세상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아도 결국엔 그 화려함이 사그라드는 꺼짐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결국 인생의 범주는 뗏목에서 타이타닉호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인생의 본질을 어렴풋이라도 생각한 자들은 지옥으로 추락하는 기분을 맛볼 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그래도 버텨봐라'에서도 큰 힘을 얻지 못한다. 끝을 아는 데서 오는 허무함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을 미리 스포당하면 영화를 볼 흥미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생각의 덫에 갇혀 추락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계획대로 되고 있어."


안병무 선생님은 '역사와 해석'에서 믿음을 '투신'에 비유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모든 생각과 실존의 불안을 내려놓고 몸과 정신을 내던지는 것. 또 지옥으로 추락하는 느낌은 저편에서 이편으로 찾아오는 신의 두드림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개인의 몫이다. 이런 측면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기독교적 변화가 너무 개연성이 없다는 주장에 이성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신학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예수 부활도 이성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나저나 난 아직 믿음이 없다.


*예전 학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 수업 때 교수님께 "아니 이걸 도대체 왜 읽는지 모르겠어요"라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생각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 책을 만나고 도작가에 대한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요즘은 악령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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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이현우 선생님은 한 인터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정신병동의 셰익스피어'로 비유한 적이 있다. 아마 누군가 한 이야기를 인용하신 걸로 기억한다. 콘스탄틴 모출스키가 썼고, 그(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최고의 평전으로 꼽히는 책의 한글 번역판 부제는 '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잔인한 천재'이다.  

 

'정신병동의 셰익스피어, 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잔인한 천재' 이 두 표현에서 무엇이 떠오르는가. 광인, 미치광이 등이 떠오를 것이다. 실제로 그의 삶은 혁명, 죽음의 문턱, 반전, 회심, 도박 등 미쳐야 경험할 수 있는 것들 채워져 있다. 이런 요소들은 반드시 그의 '문체'에도 녹아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체는 인생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김연경 번역가(이하 김연경) 손에서 태어난 도스토예프스키는 저런 '미친 요소'들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다. 가장 큰 이유는 김연경의 담백한 문체가 아닐까.

 

악령 첫부분을 읽다가 하도 안 읽혀서 '번역이..'라고 생각해 소설 원문을 번역과 대조해서 좀 읽어봤다. 번역이 참 성실하단 생각이 들었다. 100자평을 보니 (,)의 남발을 문제 삼는 분도 있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렇게 쓴 문장을 그렇게 번역했을 뿐이다. 아마 소설 번역 전체에서 이런 성실함이 발휘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실한 김연경의 문체랑 '미친 남자' 도스토예프스키랑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김연경의 소설 '다시 스침들'을 미리보기로 좀 읽어봤는데 문체가 아주 담백했다. 김연경에겐 좀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여기서 담백함은 부정적 의미로 무미건조하다는 뜻에 가깝다. 균일하게 맨들맨들 잘 다듬어진 벽돌들로 구성된 벽이 떠오른다. 누군가는 이런 벽을 보고 감탄할 수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 벽을 보면 부수고 싶은 욕망이 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후자일 것이다. 김연경의 성실함과 담백함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광기는 사그라든다. 

 

지금도 적지 않은 학생들이 러시아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 그 중 누군가 보드카 병나발 불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면 그에게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을 맡겨보고 싶다. 미친놈은 미친놈이 잘 안다.



*이런 글을 썼었구나. 역시 글과 말이라는 건 남는다는 측면에서 참 위험한 도구다. 읽으면 읽을수록 김연경 선생님의 번역은 빛이 난다. 믿고 읽을 수 있는 번역가 한 명이 있다는 점, 큰 행운인 걸 요즘 느낀다. (202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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