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에 들어가는 자, 희망을 버려라." -단테의 신곡 지옥편-
가장 좋아하는(?) 지옥의 정의다. '희망이 없는 곳.'
이 말을 곱씹어보면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말이다.
절망 그 자체의 상태. 푹 꺾인 고개를 들 이유조차 없는 상황.
이럴 때 인간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삶을 어떻게 해야할지 만지작 거리게 된다.
확 깨부숴버릴까?
난 신이 없는 인간의 실존이 바로 이런 상태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에 누군가는 자신은 신을 믿지 않지만 지옥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신이 없어도 돈, 명예, 사랑 등 여러 행복의 요소들로 삶을 알차게 채워가는 듯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소용없는 순간, 바로 죽음이 우리를 인생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제 아무리 세상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아도 결국엔 그 화려함이 사그라드는 꺼짐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결국 인생의 범주는 뗏목에서 타이타닉호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인생의 본질을 어렴풋이라도 생각한 자들은 지옥으로 추락하는 기분을 맛볼 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그래도 버텨봐라'에서도 큰 힘을 얻지 못한다. 끝을 아는 데서 오는 허무함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을 미리 스포당하면 영화를 볼 흥미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생각의 덫에 갇혀 추락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계획대로 되고 있어."
안병무 선생님은 '역사와 해석'에서 믿음을 '투신'에 비유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모든 생각과 실존의 불안을 내려놓고 몸과 정신을 내던지는 것. 또 지옥으로 추락하는 느낌은 저편에서 이편으로 찾아오는 신의 두드림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개인의 몫이다. 이런 측면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기독교적 변화가 너무 개연성이 없다는 주장에 이성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신학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예수 부활도 이성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나저나 난 아직 믿음이 없다.
*예전 학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 수업 때 교수님께 "아니 이걸 도대체 왜 읽는지 모르겠어요"라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생각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 책을 만나고 도작가에 대한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요즘은 악령을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