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정치 - 밀과 토크빌, 시대의 부름에 답하다
서병훈 지음 / 책세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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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책세상 독서단으로 활동하게 되어 서평을 남깁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대한민국 정치의 풍경은 헌법재판소의 2017년 3월 10일자 판결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국내 헌정 사상 첫 탄핵이 인용되었고 보궐 성격의 대선은 5월에 치러진다. 지금 한국은 때이른 정치의 봄기운이 만연하다. 이렇게 정치의 계절을 앞당긴 것은 박근혜의 실정 때문이다. 헌재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보수적이었고, 판결문도 보수적 입장을 기초로 한다. 즉, 명백한 범법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추상적인 헌법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리나 박근혜는 대통령 직무가 요구하는 헌법적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헌재는 판단했다. 동시대의 사람들에겐 이 사건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긴 시간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지역구 의원들에게 압박을 하면서 높은 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이뤄낸 성과로 기억될 것이다. 추운 겨울에 광장으로 미처 나가지 못한 이들은 집에서 정해진 시간에 소등하면서 함께 했다. 냄비근성을 가진 국민들을 오래 들끓게 만들었던 원료 역시 박근혜와 최순실 및 주변의 권력형 비리 덕분이었다. 어쩌면 통치의 목적을 상실한 지도자의 행태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김기춘과 조윤선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건으로 구속되었다. 반대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민주주의와 공화정체가 정확히 지양하는 것이다. 일상에서는 대부분의 이슈가 대선으로 휩쓸려 가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 자체에 약간의 불씨를 살려두고 싶다.

 

민주주의를 공부하면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론>의 존 스튜어트 밀과 <미국의 민주주의>의 알렉시 드 토크빌. 이 둘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특히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는 학부생때 원문을 가지고 매주 페이퍼를 제출했던 추억이 있다. 이들을 한 데 모아서 쓴 책이 <위대한 정치>다.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만들어가는 데 사상적인 이정표를 세웠던 지식인이면서도 현실정치에 참여했다는 이력이 밀과 토크빌을 비교하기 좋은 구도로 만들어준다. 같은 시대를 살며 서신을 주고 받을 정도의 사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들의 발자취를 통해서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한다.

 

내가 19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 밀과 토크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시대, 특히 한국의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비지성적 행태에 대한 실망 때문이다. 배웠다는 사람들일수록 상업주의 시류에 영합하느라 더 정신이 없다. 이제 이 시대 이땅의 지식인들은 삶의 가치나 역사의 응보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다.(p.15-16)

결국 두 사람 다 자신의 정치 생활을 되돌아보며 동일한 회한에 잠겼고, 지식인은 역시 글을 써서 역사에 보답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해주었다. 그들은 사회에 진 빚을 갚되 '강단'에 충실하라고 했다. 그것이 지식인의 숙명에 부합한다고 했다. '참여 지식인' 밀과 토크빌의 말이었다.(p.22)

한국의 지식인들이 '교육과 연구'의 본분에만 충실해도 세상은 적잖이 달라질 것이다.(p.386)

 

요약하자면 '지식인으로서 책무를 되새기고 본분에 충실하자'. 내가 독해한 바로는 '교수님들, 정치권 어설프게 기웃거리지 마시고 교육과 연구부터 제대로 하시는 게 어떨까요'. 수미상관으로 저자가 건네는 말이다. 

 

책의 나머지는? 밀과 토크빌을 덕후처럼 조사한 내용이다. 두 인물의 삶을 삶/글/우정/정치이론/정치활동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삶의 궤적을 보여주면서 각 장의 주제에 집중한다. 문학을 독해할 때 내재적 접근과 외재적 접근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이 책은 일종의 외재적 접근법을 취한다. 덕분에 밀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아내 해리엇의 영향력. 밀은 공리주의 개혁가였던 아버지를 통해 조기영재교육을 받은, 지금으로 치면 신동이었다. 그랬던 그가 사랑에 빠진 해리엇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밀의 대표작 <자유론>의 헌사를 그녀에게 바쳤는데, 사랑과 존경 그리고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글이다. (해리엇은 당시 명을 달리했다) 해리엇의 생전에 밀의 모든 저작이 그녀의 손을 거쳐갔다는 점은 그녀의 영향력을 가늠케 한다.

토크빌은 프랑스의 정치권력이 급변하던 시기에 살았다. 토크빌이라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 그는 민주주의를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특유의 귀족적 탁월함을 구현하기 어려운 민주주의의 단점도 같이 고민한다. 토크빌의 명민함은 민주주의의가 걸음마를 떼는 순간에 신생아가 마주할 어려움을 같이 보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저작인 <미국의 민주주의>1권은 당시에 엄청나게 팔렸다. 1835년에 펴내고 1848년엔 12쇄를 찍으며 서론을 다시 썼고, 보급판 4천부도 그 해 2쇄를 찍는다. 이쯤에서 나는 또 한국의 19세기를 떠올린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가 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는가. 구텐베르크 혁명을 통해 지식이 보급된 서양에 비해 동양은 지식 정보를 독점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양반층에게도 책은 귀한 물건이었다고 하니 지식은 자유롭게 흐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첫 단락 말미에 살려둔 불씨를 가져오려고 한다. 밀의 정치이론은 오늘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뼈대를 형성한다. 4부 정치이론에서 밀의 정치사상적 얼개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주권, 즉 최고 권력이 국가 구성원 전체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둘째, 모든 시민이 ... 정부의 일에 직접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참여를 늘려나가면 사람들의 사고가 바뀐다. 자신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라는 소속감을 가지면서 사회 전체의 이익이 곧 자기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 둘째, 참여는 사람들의 지적 수준도 높여준다.

 

이처럼 밀은 참여를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육의 장'으로 받아들였다. ...... 그는 계급 이익을 극복하지 못하면 대의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노동자 대중이 다수의 힘으로 자신들의 당파적 이익을 관철할까 봐 두려움이 컸다. 밀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다를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지성과 교양의 힘으로 전체 이익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따라서 밀은 식자 계급이 정부 안에서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p.236-242 발췌)

 

밀은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 가능성이 있는 직접민주주의가 아닌 대의민주주의를 옹호했다. 민주주의가 가진 약점은 다수결 제도에 내재해 있다. 다수의 의견이라고 해서 더 낫다고 보증할 수 없다. 그래서 밀은 보통의 시민들보다 뛰어난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식인을 찾는다. 그러면서도 보통의 시민이 온전한 인간성을 발휘하기 위한 조건을 고민한다. 그는 참여를 통해 시민이 정치적으로 성숙해 나간다고 보았다. 그 중간에서 지식인은 좋은 정치의 토양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밀은 지식인으로서 의회에 선출되어 현실정치에 참여했다. 그가 행했던 의회에서의 활동은 그가 평소 가졌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자서전에서는 이 때의 활동 중 선거 개혁, 여성 참정권, 아일랜드와 자메이카 문제를 주로 거론했다.(p.296) 하지만 이런 급진적 원내활동은 뜻을 펴지 못한다. 책의 앞 장에는 1928년 영국의 여성참정권 법안이 의회를 통과해서 여권 운동가들이 밀의 동상에 헌화하는 사진자료가 있다. 그가 얼마나 시대에 앞서 문제를 제기했는가, 또한 당시의 현실적인 장벽은 얼마나 높았던 것인가 알 수 있는 단면이다. 이후로 시간이 흘러 대중교육이 일반화되고 민주주의는 대세가 됐다. 하지만 밀이 민주주의의 바탕을 이룰 시민이 참여를 통해 성숙해져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지금도 유효하다.


박근혜 정부의 탄생은 보통선거를 통해 엄연히 민주적 절차를 거쳤다. 다수의 선택을 받은 이 정부는 정말 보잘것 없는 정치를 보여줬고,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묘사하던 한국의 정치지형을 순식간에 역전시키는 기적을 행하였다. 정치와 기적의 간극은 밀이 경계했던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치권력을 주었던 이도, 잘못된 권력사용을 이유로 다시 회수한 이도 시민이다. 이번 탄핵이 있기까지 광장의 역할을 스스로 마음껏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 집단지성 같은 말은 좋아하지 않지만 광장에서 보여준 차분함은 여론의 역풍까지도 고려한 집단적인 인내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투표는 참여를 보장한다. 투표를 하면서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실천을 배운다. 광장은 참여를 보장한다. 광장에서 시민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정치적 역량을 가늠한다. 대의제와 참여와 관련된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완성된 정답이 없다. 그래서 사회적 현실에 맞게 민주주의를 변화시킬 동력을 밀은 시민의 참여에서 찾고있는 지도 모른다.

 


덧1.이 책은 보조자료로도 활용가치가 높을 것 같다. 저자가 밀의 저작을 많이 번역했고, 밀의 전집을 준비하고 있다 하니 기대가 된다. 이미 밀의 저작을 다수 번역하셨더라. 

 

덧2. 잊혀진 이슈긴 하지만 민주주의와 관련해 국정원과 군의 선거개입은 정말 엄중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특히 작금의 국정원은 설립취지에 걸맞는 임무를 수행하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측면이 적기 때문에 반대로 대리인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지 않아도 될 유인은 많아진다. 감시하고 평가할 제도적 장치가 거의 없다고 보인다. 보수주의자를 자청하는 이들이 이 사건을 두고 나라가 무너질 것처럼 걱정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한국의 자칭-보수주의가 얼마나 사상적 뿌리가 약한지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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