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박찬일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망할토마토기막힌가지 #박찬일 #에세이 #서평단 #서평 #책추천

망할 토마토, 기막힌 가지. 박찬일 에세이. 창비. 2014(개정판 2025).

제목에 끌렸다. '망할'이라니! 토마토가 무슨 죄가 있기에 망할, 이라고 표현했을까 궁금했다. 역시, 읽어보니 토마토는 죄가 없다. 그저 그 토마토에 이끌리 사람들의 잘못이 있으면 있을 뿐. "토마토만 이해하는 데도 평생이 필요하다."(19쪽)라고 생각하는 사람 밑에서 토마토를 요리해야 한다면, 당연히 '망할'이라고 말할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재밌다. 사실, 음식이나 식재료에 그다지 진심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 책이 막 끌리고 엄청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런데 가만가만 읽다보면 흥미로워지고 또 재미있어졌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이 책은 단순히 음식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였다. 음식이란 누군가가 먹거나 혹은 먹이려고 내놓는 것이라면, 음식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음식은 그저 맛이나 향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그 음식을 만나 먹었는가가 종합적으로 기억으로 남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기억의 종합적 서사이고,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음식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재밌는 것이다.
무려 11년 전에 나왔던 책이라는 것, 그럼에도 11년 후에 읽어도 손색이 없는 책이라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읽기에 충분히 좋은 책이라는 것. 시일이 정해진 책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은 아마도 또 11년 후에 다시 개정판이 나와도, 또 읽기 좋은 책을 것이다. 음식은, 그리고 그 음식과 관련한 기억과 추억은 오래 묵힐수록 더 재밌고 진해질 테니까 말이다.

아귀찜을 놓고 무려 열명의 지역 문사들이 시를 짓고 글을 올렸다. 그러니까 마산에선 아귀로 시도 짓는다. 마산에서 아귀찜을 자리가 어디인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107쪽)

그러니까 말이다. 얼마나 대단하면 제대로 각 잡고 시를 짓기까지 했느냐 말이다. 그런 면에서 어떨 때는 내가 사는 우리 지역에, 전국적으로도 소문나고 찾아올, 그런 대표 음식이 있다는 것은 큰 자부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고장이나 지역에 대한 애정이 적어서 그런가, 내가 살고 있는 곳의 대표 음식을 굳이 떠올리려 노력한 적도 없어서 그런가, 이런 이야기가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있어서 음식이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용도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실감했다. 어린 시절 밥 대신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알약이 개발되어, 그저 알약 하나로 식사를 끝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나로서는 무척 흥미로울 수밖에.

엄한 어른들 틈에서 집은 굴비 한점은 간단한 소금 맛으로 혀에 남아있다. 그후로 다시는 그런 굴비 맛을 보지 못했다. 내 혀가 둔해진 건지 모르겠으나 어렴풋이, 공활한 가을 하늘 아래 화덕에 굽는 굴비가 아니기 때문이야,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소금 간 잘된 좋은 굴비야 돈으로 살 수 있겠지만 유년의 가을을 되살 수는 없는 법이다 어쩐지 슬퍼진다.(162쪽)

이런 이야기가 가득이다. 음식에서 비롯된 당시의 추억이 어떻게 내면화되어 간직되고 있는지. 그 추억의 맛을 재현할 길이 없어 그저 아쉬운 마음을 가득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는가 말이다. 이 책이 갖고 있는 매력이다. 음식을 하는 사람의 섬세한 감정과 그 깊이가 무척 다정하게 담겨 있다.
요즘 부쩍 음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고 있다. 최근 다른 셰프의 책을 읽으면서도 들었던 생각이지만, 음식이 다분히 사회, 문화, 정치, 경제, 예술 등 다양한 영역이 종합되어 논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그저 입 안의 즐거움, 배를 채우는 포만감을 넘어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며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즉, 오래 전부터 차곡차곡 쌓여오는 풍속의 내막이 그대로 음식에 담겨 나오는 느낌이었다.

<뜨거운 한입>이었던 기존 제목도 납득이 갔다. 내 입으로 들어오는 그 음식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뜨겁게 들어오게 되었을 지를 짐작하게 해 주니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음식이란, 단순한 잣대로 쉽게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한 시대 혹은 그 이전의 시대부터의 중첩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문화의 대표적인 소산이라는 것을. 이 책, 참 잘 읽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모르는 낙원 - 무루의 이로운 그림책 읽기
박서영(무루) 지음 / 오후의소묘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모르는낙원 #무루 #에세이 #오후의소묘 #서평단 #서평 #책추천

우리가 모르는 낙원. 무루 에세이. 오후의소묘. 2025.

우선, 재밌다. 그림책을 좋아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림책과 상관 없이 이 책은 재밌다. 깔깔 웃을 수 있는 재미를 얘기하는 건 아니고, 갖가지의 우리 삶과 인생 혹은 철학과 사상에 대해서도 가만히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에 대해 순간, 깊이 빠져들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한 순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을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책 한 권을 읽었지만 책 속에서 소개하고 있는 많은 그림책을 함께 읽은 기분이다. 그리고 조만간 도서관을 찾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림책을 한 권 한 권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들었다. 제대로 이 책에 푹 빠졌다.

그림책은 독자에게 언제나 재독을 요구한다. 아무리 단순하게 그려졌다 하더라도 그림책의 그림은 반드시 다시 읽었을 때 더 잘 보이는 맥락과 의미를 지녔다. 새롭게 발견된 이야기와 이전의 이야기 사이의 관계는 오답 노트 같은 것이 아니다. 오독은 실패가 아니라 이해에 도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들은 그 과정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150쪽)

절실하게 공감한다. 그림책을 읽다보면 금방 읽었는데도,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읽게 된다. 자꾸 읽으면서 그 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숨은 요소를 찾게 된다. 놓쳤던 부분, 혹은 봤지만 미처 알아채지 못한 부분이 그 다음에 하나씩 발견될 때, 기분이 좋다. 또 다른 걸 찾는 기분으로 다시 앞으로 돌아가 책장을 넘기게 되니까. 그림책의 매력이 이런 게 아닐까.

그는 아예 공원의 작은 회양목 울타리 뒤켠에 강낭콩을 심기로 한다. 작전은 성공했고 이제 산책하는 노부인의 얼굴은 전에 없이 기쁨으로 충만하다. 7월의 어느 날 공원 관리인의 손에 콩이 뽑혀 버려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소중한 콩이 잡초와 다름없이 여겨진다는 사실을 노부인의 당당히 받아들인다.(60쪽)

깜짝 놀랐다. 당연히, 어머! 나의 소중한 강낭콩을! 하면서 속상해하고 좌절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당당하게 받아들인다니. 이 순간 내 손을 꼭 쥐어봤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 소중하다고 함부로 하기 싫은 것들에 대해 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아주 작은 것 하나도 내 손 밖으로 사라지는 순간 안절부절 못했던 기억이 스쳤다.

이웃의 빈곤이라는 공동체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마을 주민들이 보여주는 타산적 연대의 동력은 공포와 이기심이다. 이 돌봄의 기저에는 손익계산에 근거한 방어기제만이 있다.(73쪽)
이 이야기가 실은 구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추방의 이야기였음을. 확실성의 세계가 구석진 골목의 일부를 떼어낸 뒤 캐비닛에 불확실성을 봉인하듯 세상으로부터 크리쳐들이 유리되는 과정을 그저 한 남자의 빛바랜 추억 속에서 쓸쓸히 되새겼을 뿐임을.(121쪽)

타산적 연대, 추방. 이런 단어를 마주하며, 우리 사회의 가장 가장자리, 누구나 인정하기 싫은 이면의 모습을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감고 모른 척 넘기고만 있을 뿐 이 사회를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축인 것만은 사실이니까. 이런 사실을 간과하기보단 꺼내 들추고 보여주며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 지금의 우리 사회 역시 손익계산을 통한 추한 이기심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허울 좋은 겉모습을 위해 그 외의 모습은 그저 감추고 포장하려는 데에만 급급하고 있다. 추방이란 단어가 주는 혐오가 순간 느껴졌다.

인간과 요괴, 사람과 느림, 현실과 환상, 이성과 감성, 논리와 직관, 주체와 객체. 글과 그림은 두 세계를 각각 상징한다. 보이지 않는 것, 목소리가 없는 것, 믿기 힘들거나 증명 불가능한 것.(142-3쪽)

<숲의 요괴>라는 작품이 가장 궁금했다. 두 세계의 글과 그림을 통해 우리의 욕망과 본성을 확인시켜주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어느 쪽을 쫓으며 혹은 현혹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그렇게 사는 삶이 온전한 것이 맞는지를 질문 던지고 있다는 느낌. 나의 속을 드러내놓으라고 부추기고 있는 책이 것만 같았다.

이 책이 갖고 있는 매력이다. 자꾸 나를 들여다보게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궁금하게 만들고 또 나의 진짜 마음을 따져보라고 다그친다. 질문하게 만들고 그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힌트를 준다. 이렇게 끝내기 아쉬울 정도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것들에 입술을 달아주고 에세이&
이근화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은것들에입술을달아주고 #이근화 #에세이 #창비 #서평단 #서평 #책추천

작은 것들에 입술을 달아주고. 이근화 에세이. 창비. 2025.

시인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어느 순간 에세이가 아닌 시를 읽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 책 역시 그랬다. 분명 산문인데 시가 되는 마법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래서 시인이구나 싶었다. 시인의 내밀한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면서 그 이야기 중 독자로 하여금 멈칫하게 만드는 지점이 곳곳에 있었다. 차마 그냥 넘길 수 없는 이야기, 화가 나고 슬퍼지는 지점, 따뜻하면서도 애틋한 부분, 그러면서도 자세를 다시 고쳐 앉아 읽어야할 것만 같은 이야기까지. 마치 우리가 살면서 느끼게 되는 갖가지의 감정으로 조목조목 풀어내고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의 감정이 아닌 여러 갈래의 감정이 마음껏 움직여 떠다닐 수 있도록, 그렇게 떠다니는 감정을 따라 독자도 함께 흘러갈 수 있도록 해주는 듯했다.
에세이를 읽다보면 자꾸 글쓴이가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성격은 어떻고, 어떤 심성과 가치관을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어떤 삶의 지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를, 혼자 가늠하고 판단하게 된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글쓴이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고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글쓴이를 짐작해보는 건 또 하나의 재미이기도 하니 이런 생각을 놓을 수는 없다. 그래서 들었던 생각인데, 시인은 무척 착한 사람이구나 싶다. 언젠가부터 착하다는 말이 칭찬이 아닌 말로 쓰인다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착한 사람이 좋고 또 나 또한 착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니 이 말은, 시인이 참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엄마는 예민하고 지극한 사람이다. 평생 흔들림 없이 아내와 엄마의 자리를 지켜왔기에 아빠는 엄마가 죽는 순간까지 잘 보살펴주고 싶다고 울먹거리며 자식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26쪽)
높낮이와 좌우를 따지는 일은 무용한 집착이라는 것. 어떤 편향과 위계가 사람의 살이를 망칠 수도 있다는 것. 편견과 억압이 인간을 구부리고 괴물을 만들어낸다는 것. 결국 자연에 대해 생각해본다.(...) 인간사회는 더 축소되고 삶을 살아가는 자세는 절제되어야 한다.(113쪽)

이 책을 읽으며 마치 시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겠다는 마음이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시인의 마음에 나도 마음이 가고 또 일정 부분 비슷한 생각이 겹치면서, 공동의 가치관을 품고 있다는 동질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시인의 이야기 꼭지들을 읽으며 속으로, '나도!' '맞아!' '아, 진짜!' 같은 말들로 동조하며 읽었기 때문이다. 엄마에 대한 생각도, 황인숙 시인과의 데이트도, 자연을 대하는 마음도, 그리고 사람을 소중히 하고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것도 모두,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느 것 하나 함부로 하지 못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단속하는 것으로 방법을 찾는 사람, 조용히 자신을 단속하며 내면의 단단함을 만들어나가는 사람, 그러면서도 화를 낼 줄 아는 사람. 내가 본 시인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풀어내고 있는 말들 또한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번씩 사람을 제대로 흔들어놓는 문장들이 곳곳에 보였다.

세세한 돌봄은 아내에게 미뤄둔 채 분위기 파악 못하고 버럭하는 남편들, 상황 무시하고 아무 때나 요즘은 정말 편해졌어 하는 어르신들, 엄마가 뭘 알아 하는 사춘기 아이들을 마주 대하면 화가 치민다. 싹 긁어모아 보자기에 싸서 한강에 내던져버리고 싶다.(39쪽)
두 다리 멀쩡히 달려 있어도 골목길에서 넘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자주 넘어지는 인간이 바로 나였다.(86쪽)
종강할 무렵 부고가 날아왔어요. 망할 놈의 수업, 아니 다 핑계지요.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160쪽)

이런 솔직한 감정과 문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자신의 삶과 생각, 그리고 사람과 그 관계를 곱씹을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 가능한 표현들이었다.

가만히 응시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때로는 강약의 조절을 통해 깊게 혹은 여유롭게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는 이야기이었다. 나도 딸이고 또 엄마이며, 나의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 생활인으로서, 시인의 마음을 나의 마음처럼 읽어낼 수 있게 해 준 글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고독은 축복이 될 수 있을까 - 1인분의 육아와 살림 노동 사이 여전히 나인 것들
김수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고독은축복이될수있을까 #김수민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0기 #서평단 #서평 #책추천

이 고독은 축복이 될 수 있을까. 김수민 지음. 한겨레출판. 2025.
_1인분의 육아와 살림 노동 사이 여전히 나인 것들

저자가 지나오고 있는 시기를 나도 더듬어보게 됐다. 나의 출산과 육아는 어땠나. 나의 엄마 돌입 시기는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가져왔고, 또 나는 그 시기를 어떻게 살아왔나. 그리고 그 시기, '나'가 있기는 했나, 하는 이런 생각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쩌면, '엄마'로서 오로지 육아와 살림을 했던 시절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조금 더 이기적인,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독립적이었던, '나'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 그렇다면, 나는 '나'로서 잘 버텨주었던 것은 아닐까.

후회라는 말에는 분명 '욕심'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거 다 해서 후회가 없겠다." 나의 유학 소식을 접한 오랜 친구의 축하 말이었다.(...) 후회가 없을 만큼 나의 모든 선택이 완벽했나? 후회가 없을 만큼 더 욕심낼 구석이 없었을까?(211쪽)

후회와 욕심이 비슷한 말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부터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마음을 자주 먹기 시작하는 '나'를 보면, 이건 후회하지 않겠다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욕심을 부리는 마음인 것이 확실하니까. 그리고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저자가 걸어온 도전의 길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 그래야지, 그럴 수 있어, 그럼, 그래야만 해, 하는 마음이라고나 할까. 저자가 각 시기마다 해왔던 결정들은 분명, '나'를 쌓아올려나가는 중요한 과정이 되었을 것이고, 그런 과정을 통과했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나' 하나를 떨어뜨려 보지 않고 가족과 함께인 '나'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가족과의 시간이, 그리고 자신의 선택과 결과가 어떻게 '나'로 연결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반추하고, 그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니까.

"아이 말고, 본인 말이에요. 아이는 언제나 그 의미가 줄어요."(105쪽)

면접 교수님의 말이 인상적이었다(내가 지금 20대라면, 벌써 건명원 입학 원서를 썼다!). 그리고 동의한다. 나의 삶을 아이와만 꼭 붙여놓으려는 순간, '나'를 밀어내게 된다. 이미도 사회는 갖가지의 이유를 들어 엄마를 후순위로 밀어내기 쉬운데,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해야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가 커가며 그 의미도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러니, 자신의 모습이 어떤 지, 어떨 지를 스스로 가늠해보는 건, 진짜 필요하지. 만약, 그 시절 나에게 교수가 같은 질문을 했다면, 나는 과연 뭐라고 대답했을까. 나의 40대 모습, 어떤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더 실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 내가 '나의 커리어'에게 가진 가장 큰 사람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대학원을 가고 싶다, 자격증을 따고 싶다는 수준이 아니라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 그러니까 '나 자신에 대한 욕심'으로 치환되었다. 그 때문에 나에게 학업을 놓는다는 것은 나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였다.(157쪽)

저자는 분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지점을 나의 삶과 견주어보게 되었다. 분명 나도 '나 자신에 대한 욕심'을 강하게 부리는 중이고, 그런 욕심이 다른 이들에게는 '왜 굳이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누가 하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꼭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애써 힘들여가며 '굳이' 하는 마음이 뭘까, 나도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중이었으니까. 그런데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비슷한 마음이겠구나 싶었다. '나'를 키우고 싶은 마음, 좀 더 좋은 '나', 멋진 '나'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자연스레 나 자신을 등떠밀고 있던 거구나, 알게 됐다.

저자는 참 대단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욕구를 실현해내려는 힘을 잃지 않고 있으니까. 저자는 말했다. '나는 후회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중이다.'(212쪽)라고. 나도 같은 말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게 됐다. 후회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후회할 수 없는 삶'. 뭔가 내 인생의 이 즈음에서, 새로운 것을 도전해봐야겠다는 마음도 생겼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
나인경 지음 / 허블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시의소문과영원의말 #나인경 #허블 #서평단 #서평 #책추천

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 나인경 장편소설. 허블. 2025.

기억, 감정, 그리고 사랑. 이 소설을 읽으며 따오른 단어들이다.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소재이기도 하면서 읽는 내내 생각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던 단어들이다. 처음엔 혹시 SF인가, 하는 생각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읽으면서는 사람과 그 사람의 심리를 보여주는 소설인가, 했다. 하지만 읽어나가면서 결론을 내렸다. 이 소설은, 사랑 소설이라고. 결국 우리가 끝까지 믿고 잃지 말아야 하는 것,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소설이라고. 그래서 읽는 내내 뭔가 불안하고 불편하고, 또 걱정되고 안타까운 감정들이,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한결 편안해졌다.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랑은, 전염성이 강한 감정입니다. 거대한 스토리지에 저장된 불특정 다수의 기억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만큼 말이죠. 부지불식간에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353쪽)

그러니까 말이다. 전명성이 강해 어떤 것으로도 이 감정을 막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기술적으로 막으려고 해도 막아지지 않는 것이다. 강력한 어떤 무기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람의 감정이고 사랑인 것이다. 이 정도로 실토를 했다면, 그 다음은 그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무엇이 있을까.
내내 마음을 불편하고 힘들게 했던 것이 사실은, 이 사랑을 잃고 찾기 위해 헤매고 다녔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머리의 기억은 사라졌어도 그 기억을 만들었던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감정을 소거한 기억이 온전한 기억이 되지 않는 건, 모든 기억에는 감정이 없을 수 없으며, 때로 기억은 감정을 떠올리기 위한 장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정 없이 남은 기억만으로는 기억이라고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끔 잊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잊기 위해 노력할 때도 있다. 하지만 신기한 것이 잊어야지 하면 더 기억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될수록 감정은 더 커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모든 기억과 감정이 하나가 되어 다시 '나'가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나'가 되기 위한 과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안'과 '정한'이 각자의 삶에서 무언가 해소되지 않은 갈증을 늘 끌어안고 살았던 것은, 어쩌면 온전한 '나'가 되지 못한 그 과정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모든 것으부터 도망치고 싶거나 혹은 간절하고 애타게 찾으려 하는 마음은 사실은,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둘'이 또 '하나'가 되어야만 진정한 '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감정으로 기억해야 하는데, 그 감정의 기억을 잃고 서로 헤매고만 있었던 것일 지도.
이 둘이 부러 무엇을 한 것은 없다. 그저 만났을 뿐이고, 서로를 한번에 알아봤을 뿐이고, 비로소 사랑의 감정 기억했을 뿐이다. 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만으로도 모든 시스템과 작동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힘이 된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로서 충분했다.

두 사람은 호수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나갔다. 오직 이 순간에만 가능한 영원의 이야기를 시작했다.(376쪽)

소설을 읽기 전, 제목의 의미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 소설을 다 읽고 알았다. 앞으로 이들이 만들어내는 영원의 말, 그 이야기는 끝없이 계속 이어지겠구나. 그러니 안심해도 되겠구나, 하고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