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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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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니주의보. 정지아 장편소설. 창비. 2026.
정지아가 정지아했다! 책을 읽으며 이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 맛깔스런 문장과 표현, 살아있는 듯한 인물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의 의미와 주제, 우리가 어떤 삶의 공존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하지만 절대 심각하거나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았으며,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마음으로 아무렇지 않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특히, 대놓고 이야기하는 지점에서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레즈비언!
쑤언이 야물딱지게 큰소리로 외쳤다. 백주대낮에, 그것도 가을볕이 거침없이 쏟아져 눈이 부실 지경인 장씨댁 시멘트 마당에 레즈비언이라는 말이 동네 떠나가라 울려 퍼졌는데, 이상도 하지, 그 순간 레즈비언이라는 말에 내포된 은밀함, 비밀스러움 같은 것들이 햇빛 맑고 바람 좋은 오늘 같은 날 빨랫줄에 걸린 빨랫감처럼 순식간에 꼬들꼬들 말라 바삭바삭 부서지고 마는 것이었다. 레즈비언이라는 말이 이제는 촌구석 노파나 영감을 입에 다방 레지라는 말과 다른 바 없이 마구 오르내려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96쪽)
이 소설은, '레즈비언!'이라고 외친 쑤언의 이 한 마디가 다했다는 느낌이다. 다른 게 뭐가 있을까. 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밥 먹으러 오라는 말처럼, 김장 김치 가져다주는 마음처럼, 그저 옆에 있는 그 누군가에게 툭 일상의 아무것도 아닌 말과 마음을 던질 수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잘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할 수 있다. 그 정도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기희의 삐순이 삐돌이도 그런 게 아닐까. 모든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와 기준이 있다. 그리고 그 관점으로 다른 이와 사물, 현상과 상황을 판단하고 움직인다. 하지만 그 기준이라는 것이 순전히 자신의 것이니, 모든 사람이 자신의 기준으로만 움직인다면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
느그가 난 년들이다, 난 년들이여. 한 년이 아프먼 딴 년이 밥이라도 채릴 것 아니냐.
한씨댁은 그새 식은 커피를 후루룩 들이켰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찌니들은 난감하기만 했다.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이해받은 것인가, 아닌가. 받았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오묘한 말이었다.(...) 염치도 없이 이른 아침 남의 집에 쳐들어온 한씨댁은 후루룩, 요란한 소리를 내며 믹스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226-227쪽)
그 시작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참 잘 보여준다. 거침없고 솔직한 이 마을 사람들처럼만 하면 될 것 같은 것이다. 대놓고 하는, 자칫 무례해 보이는 말들에 알게모르게 관심도 호응도 인정도, 그리고 격려와 응원도 모두 내포되어 있다.
이 소설 각 부분의 소제목은 모두 '누구나'로 시작한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 누구나 조금씩은 나쁘다, 누구나 이상한 구석이 있다, 누구나 자기 기준으로 산다, 누구나 이유가 있다, 누구나 모르고 산다.' 그래서 이 모든 이야기의 대상은 '누구나'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이 괜히 위안이 된다. 꼭 누군가를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너도 나도 우리 모두도 또 그 외에 누구라도, 하는 식으로 아무나여도 된다는 말로 들리는 것이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허락의 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게 생각보다 무척 안심이 되는 것이다. 다 괜찮아질 수 있게 만드는 마력과도 같은! 이 소설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