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계절 - 박혜미 에세이 화집
박혜미 지음 / 오후의소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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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적인 계절'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봤다. 각 계절은 어떤 색과 느낌, 그리고 어떤 사람과 이야기가 남아 있는지 곰곰이 떠올려봤다. 지금은 겨울이지만 이렇게 시간을 들여 각 계절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각 계절 속으로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봄이라고 또 여름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계절이 품어내고 있는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어느 지점에서의 바람, 어떤 풍경 속에서 마주했던 인연, 그리고 그 안에 가만히 숨쉬고 있었던 모든 시간. 그런 시간들을 따라가다보니 그 계절들을 고스란히 따라 지나고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이 책만이 갖고 있는 매력인 것 같다.
그냥 에세이가 아니라는 점이 그 매력을 더해주었다. 어떤 책이든 글에 삽화가 더해지면 그만큼 더 시간을 들여 읽게 되어 있다. 글은 설명해주고 있지만 그림은 직접 설명해야 하니까. 나만의 설명으로 만들어 채워나가야 하기 때문에 더 공을 들여 읽게 된다. 그림을 읽는 것이다, 그것도 더 정성스럽게. 이 책이 그랬다. 글에 시선이 머물고, 그림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물렀다. 그림과 글을 연결시키고, 또 그림을 따로 떼어놓고 그 그림에 나의 이야기를 연결시켰다. 그저 그림을 생각없이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또 그림 속에 나를 세워두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그림의 글을 천천히 읽었다. 그때 글은 또 다른 느낌으로 새롭게 다가왔다.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뜨겁고 단 커피로 언 몸을 녹이며,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쌓인 흰 눈을 봤다. 어느새 내려온 밤에 닿아 투명하게 반짝인다. 차갑기만 했던 바람이 한 발짝 다가와 둥그렇게 휜 등을 쓸어줄 때, 지하철역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떠오르며 내내 입속을 맴돌았던 말이 혼잣말처럼 튀어나온다.(11쪽)

빠르게 읽어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문장들이 아니었다. 이 글을 읽으며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 있었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흰 눈이 보였고, 바람이 등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속으로 혼잣말을 뱉었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해지는, 허하면서도 따뜻한 옷으로 몸을 감싸며 온기를 가두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가만히 몸을 숙여 풀어진 신발끈을 천천히 다시 묶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서걱서걱 걸을 때마다 어딘가에 붙어 있던 모래알들이 이유 없는 곳에 떨어져 새로 자리 잡는다. 어쩌면 이런 계속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호주머니가 여름으로 불룩하다. 이 계절이 지나갈 때까지 모래알들이 여기저기 기억처럼 떨어질 거다. 어떤 건 지워져서 아쉽고, 어떤 건 잊혀서 아쉽고, 어떤 건 가벼워서 아쉽고, 그리고 어떤 건 사라지길 바라도 털어지지 않아 무겁고.(59쪽)

나의 여름은 어떤 것으로 호주머니가 불룩했을까. 반짝이는 윤슬 사이로 눈이 부시게 빛났던 나의 계절은 어떤 아쉬움과 무거움을 남겨두었을까. 어쩌면 떨어져나가기를 바라지 않고 있어 점점 더 불룩해지는 주머니를 끌어안고 그 시기를 묶어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이런 건가. 누군가의 사적인 계절인 나의 사적인 계절로 넘어오는 것. 소리소문없이 은근슬쩍 나의 비밀한 계절이 되었다.

괜찮다는 말을 내가 하고 나만 듣는 게 외로워, 오늘 밤도 너에게 전화를 건다. 서로의 푸념이 포물선을 그리며 지평선 뒤로 사라지고 잠시 공백이 찾아오면, 수화기 너머 허밍에 가까운 노래를 퀴즈처럼 네가 부르고, 나는 정답처럼 찾은 멜로디에 가사를 넣어 따라 불렀다. 쌓이는 음들이 불안을 차분함으로 메워가고, 조급함은 우리의 웃음에 실려 저만치 흐릿해져 갔다.(85쪽)

마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 문장들을 가만히 듣고있는 듯했다. 고요하고 차분한 말투를 소리죽여 가만히 듣고 있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온통 마음이 편안함으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수화기 너머 허밍의 노래가 감미롭게 들려오는 듯한 따스함까지 연성됐다고 하면 과장일까. 그런 바람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마음을 움직이는 책이었다. 읽다보면 내 마음이 함께 움직여다녔다. 말 그대로, 감성을 건드리는 책이었다. 이 계절에도 다음 계절에도 어울리는 책이었다. 마음에 드는 책을 오랜만에 만났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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