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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빙허각 ㅣ 창비아동문고 340
채은하 지음, 박재인 그림 / 창비 / 202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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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허각 이씨.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이 동화를 읽지 않았다면 <규합총서>라는 책에 대해서도 몰랐을 것이다. 조선 유일의 여성 실학자. 대상을 지칭하는 말 앞에 '여성'이란 단어가 붙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조선시대를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감안하고 볼 문제이긴 하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가 어땠을 지에 대해서는 익히 배워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서 '여성'이란 단어가 따로 붙고, 특히 그 앞에 '유일'이란 말까지 함께 쓰이고 있다는 것은, 빙허각이 어떤 삶을 살았을까에 대해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면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면, 대단한 분일 거라는 점은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 시대에 빙허각을 마주쳤다면 덕주처럼, 한번의 마주침만으로도 충분히 그분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 뜻을 본받아 나의 길을 찾아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는 분명하고도 힘 있는 분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 눈에는 불이 담겨 있거든. 새벽 언덕에서 마주칠 때부터 알아봤지."(86쪽)
눈에 불이 담겨 있음을 한번에 알아챈 빙허각. 그리고 그런 불을 눈에 담고 있던 덕주. 어쩌면 비슷한 사람을 알아보고 서로 끌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말을 붙여보지 않아도, 서로 구체적으로 묻지 않아도 모습과 눈빛만으로도 어떤 사람일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혜안을 빙허각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덕주 또한 남들보다 더 적극적인 열정을 갖고 제 삶에 대한 고민을 할 줄 아는 아이이므로, 당연히 범상치 않은 빙허각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런 면에서 이 둘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단연, 눈에 불이 담겨있는 이들이라는 것. 그런 불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 자신이 결심한 것을 끝까지 이루어내는 강단 있는 주체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갖고 있던 모습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역량이지 않나 싶다. 주체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 나갈 것인가를 스스로 분명히 할 줄 알고 노력하여 끝내 이루어낼 줄 아는 것. 주체적으로 자신의 자아를 확인하고 스스로 미래를 설계해나갈 줄 아는 것. 이것이 특히 지금 아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질이니까 말이다.
나는 거꾸로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는 이름을 지은 거야. 물론 아무 데도 매이지 않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 그때 나는 무척이나 헛헛하고 갑갑했거든. 지금 너처럼.(121쪽)
빙허각이란 호에 담긴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느 것에도 기대거나 매이지 않고 싶다는 갈망이 담겨 있다. 이는 거꾸로 봤을 때 당시 무언가가 매우 강하게 얽어매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덕주의 아버지가 하는 말들만 보더라도 '여인은'으로 시작하는 말들이 무척 불편한 감정을 만들어 낸다. 이는 당시 여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대우가 어땠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덕주와 같은 결심과 실천이 무척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고, 그런 대단한 삶을 가능하도록 도와준 분이 빙허각이라는 것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왜 쓰느냐. 그 답은 네가 한 말 속에 있겠구나. 내가 일평생 해 온 일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일이니까. 설령 누군가는 고작 여인의 일이라 깎아내리고, 또 그 일이 거칠고 고되다고 외면하더라도 그 속에는 내 경험과 삶이 들어 있으니까. 그건 어떤 책에서 읽는 글귀보다 취하지 않겠니."(151쪽)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거나 혹은 대단히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한 일이어야 의미있고 값진 것은 아니다. 남들에게는 별 거 아닌 것 같은 것이라도 자신이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값진 것이다. 빙허각의 말을 통해 그 가치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일평생 해온 일', '가장 잘 아는 일', '내 경험과 삶에 들어 있'는 일이라면 이미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가 해 나가야 하는 일이 결국은, 이런 일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 삶을 통틀어 가장 잘 알고 내내 앞으로도 해 나갈 일, 그런 일에 나의 힘과 정신을 모두 쏟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덕주가 고스란히 배운 것이고, 그래서 덕주는 제 스스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결국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덕주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빙허각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을 살아오고 있으며 또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됐다. 우리 아이들이 읽는다면 더욱,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재밌으면서도 의미있는 동화를 만나 기분이 좋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