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103 소설Y
유이제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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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103의 103이 10월 3일이었구나. 개천절. 열 개, 하늘 천, 하늘이 열린 날.

"왜...... 그래?"
"내 생일도 10월 3일이거든."(288쪽)

다형에게 터널 103은 태어나서 평생을 살았던 삶의 공간이었고, 또다시 죽음의 공간이었으며, 다시 삶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운명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다형은 이미 이 터널을 통과해 나아갈 수 있을 힘을 갖고 태어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우리나라 고전 소설에서의 '고귀한 혈통' 정도. 이미 다른 이들을 구할 영웅의 능력을 갖고있는 자.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
결국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소설에서도 역시나 다형, 승하와 같은 소녀소년이 어른들의 욕심, 혹은 안전 불감증에 경종을 울리고 희망을 되찾는 역할을 하게 된다. 어른인 나로서는 참 씁쓸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왜 어른들은 그 어른으로서의 역할과 책임보다는 개인의 욕망과 지위, 권한을 더 우선시하는 걸까. 그리고 애초에 사람들의 삶을 가두고 공포와 살육의 현장으로 내몰았던 시작이, 결국은 더 강한 힘을 소유하고자 했던 자들의 안일한 이기심이었다는 것이, 화가 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무기에 가까운 인간 병기를 만들던 실험. 정식 명칭은 워킹웨폰(Walking Weapon) 프로젝트였네."(142쪽)

비인간적인 실험과 그 결과물을 통해 더 비인간적인 행위를 일삼으려는 무시무시한 계획에 의해 결국 평화롭고 안전했던 공간이 무자비하고 공포스런 공간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유도 모른 채 공포 속에 태어난 아이들은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임을 인지하고 판단할 힘조차 갖지 못한 채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아이들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는 이 세상이란 얼마나 끔찍하고 암담한 것인가.

"싱아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은 이곳에서 이방인이고 비정상이라 여기고 있어."/준익의 발언에 다형은 싱아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나하고 똑같이 생겼어'라던 말.(178쪽)

물론,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정상이고 또 비정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사회적인 편견이 개입되는 순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오히려 차별을 만드는 또 다른 이름이 되니까). 하지만 이 판단 역시 다양한 경험이 있고나서야 가능하다고 한다면, 싱아에게 판단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는 주어야 하니까.

촌장 황필규가 다형을 사지로 내몰고 대신 자신의 세상을 뜻대로 유지하려는 모습에서 이강백의 <파수꾼>이 떠오르기도 했다. 거짓에 거짓을 보태고, 결국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아 자신의 체제만을 맹목적적으로 따르도록 만드는 촌장의 모습이 끔찍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고 우기던 촌장의 최후 역시 끔찍하기만 했다(이런 장면에서 오히려 인간의 잔인함만을 더 느끼게 된다).

분명, 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의 길은 열렸다. 용기와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임은 확실하다. 가족의 응원과 책임이 수반되어 있었지만 결국은 자신이 해내야겠다는 각오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정도의 각오 없이는 쉽게 새로운 세상을 향한 문을 열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형과 승하가 앞으로 열어야 할 문은 더 많겠지. 그 문들이 너무 어렵게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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