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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빛을 따라서
권여름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0월
평점 :
시장바구니에 담긴 채소와 물건들. 그 아래 종이 뭉치에는 '바라미'를 빨간색 펜으로 지우고 '바람이'라 적힌 종이뭉치가 있고, 연필 한 자루. 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표지. 소설을 다 읽고나니 더 표지를 들여다보게 된다. 이 표지에서 소설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모두 숨어있다는 느낌이 들어 더욱 자세히 보게 된다.
'필성슈퍼'. 그러고보니, 우리 동네에 슈퍼가 어디 있을까 머릿속으로 주변을 둘러보아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가게 이름을 '슈퍼'라 붙이고 있는 집이 거의 없어진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대체로 큰 마트(엉터리 마트, 쌤마트같은 마트도 여럿 있다. 점점 이런 마트의 규모도 커지는 듯)에서 장을 보거나 인터넷 쇼핑을 하기 때문에 더욱 동네 슈퍼를 이용하기도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 동네만 해도 걸어서 갈 거리에 대형마트가 있고, 작은 가게들이란 거의 편의점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이 '필성슈퍼'가 조금은 더 낯설면서도 애정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물건 담아올 가방을 들고 직접 가서 물건을 사온다. 특히 채소나 과일을 살 때는 꼭 그 가게에 가야지 싶은, 매번 찾게 되는 가게가 있다. 물론 대형마트에 비해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불편한 요소가 분명 있다. 하지만 그렇게 직접 가게에 걸어가 물건을 손으로 만져 찾아 담는 그 수고가 썩 나쁘지 않다. 특히 오히려 큰 매장에 바글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물건에 현혹되는 쇼핑엔 더욱 취미가 없다. 그러다보니, 우리집 앞에 '필성슈퍼'가 있으면 좋겠다. 특히 이런 가족이 운영하는 슈퍼라면 언제든 믿고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더 부럽다. 어쩌면 502호의 주인이 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바구니를 내리는 대신 난 직접 바구니에 물건을 담아오겠지만. 망하지 않을 슈퍼에서 오래도록 한결같이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문을 왜 닫냐?"
엄마는 사과 알맹이를 입에 넣고 사각사각 경쾌하게 씹었다.
"머리를 또 굴려봐야지."
(...)
'우리는 망한 적이 없다는 말.'
그 말을 들은 이루로 폐허 오은동은 자주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나도 망한 적 없다.'(243쪽)
학교에서 시험이 끝나면 쉬는 시간으로 제일 많이 들리는 말이 '망했어'라는 말이다. 시험을 생각보다 못 본 아이들이 속상해서 하는 말일 거라고 생각해 위로하려고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체로 '하나 틀렸어요.', '100점을 못 맞았어요.'가 대부분이다. 아, 속으로 탄식을 내뱉게 된다. 물론 100점, 만점만을 향했던 아이들에게 그 하나의 차이는 클 수도 있지만,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그 하나로 인해 함께 망한 경우가 된다는 생각이 조금은 아찔하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아이들로 키우는 곳이 학교가 되는 건 아닐지, 시험 때마다 조금은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바뀌며, 새롭고 다양한 것들을 다채롭게, 그것도 대형으로 만들어 놓아야만 성공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어떨 때는 커져가는 세상의 크기에 압도당해, 작은 나는 갈 곳도 찾지 못해 허둥대기만 하지는 않을지 두려움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더 동네 가게들을 찾게 된다. 작은 동네 서점, 과일 가게, 떡집 등. 그리고 그런 작은 가게들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망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도록 나도 작은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마음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은동이도 황서은 할머니도, 그리고 '필성슈퍼'도. 망한 적 없다, 그래서 다른 궁리를 또 하려는 저 마음에 응원하는 마음을 보태고 싶어진다. 내 작은 힘과 또 누군가의 정성이 모이고, 그런 사람들의 응원이 쌓여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는 그 마음, 어떤 경우에도 망한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리 없다는 마음이 커질 수 있도록 하는. 그러면 충분한 것 아닐까.
이 가족이 보여주는 마음이 너무도 솔직해, 다 들여다보인다는 것이 매력이다. 그래서 이들이 더욱 반짝일 수 있는 것일 테지. 뭐든 솔직하게 자신을 다 내보이는 사람은 이기지 못하니까. 숨김 없이 다 드러내놓은 이후엔 두말이 필요 없으니까. 그저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면 그만이니까. 다른 무엇에 눈치보지도 않고. 그게 참, 멋있는 소설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