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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평점 :
이 시집은 안도현씨가 ’감동’이라는 것을 선정 기준으로 한 시들을 골라 이메일로 한 통씩 배달해주는 것들을 모아 만든 시집입니다. 다양한 시인들의 시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어 좋았고, 안도현씨가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상이 실려 있어 한 번 더 시를 곱씹어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이런 시들도 있었구나. 하는 감탄과 가슴 한 구석에 와서 잔잔히 스며드는 아름다운 감동 때문에 시집을 다 읽고도 책장의 잘 보이는 곳에 이 책을 꽂아두었습니다.
제 1부 사랑말고는 다 고백했으니
백년 정거장
- 유홍준 -
백년 정거장에 앉아
기다린다 왜 기다리는지
모르고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잊어버렸으면서 기다린다 내가 일어나면
이 의자가 치워질까봐 이 의자가
치워지면 백년 정거장이
사라질까봐
- 내가 일어서면 사라질까봐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나, 그리고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버스들. 정거장은 애초에 정거장에 도착했다 떠나는 버스와의 만남과 헤어짐 때문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초에 떠날 버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버스가 머물다 떠날 목적으로 만들어질 정거장이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요. 언젠가 죽는 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가 열심히 살고, 영원대신 헤어짐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됩니다. 끝이 있는 것, 보이지 않는 것에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은 그것이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가야 할 존재의 가치를 만들어주는 행위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생에 무엇이 찾아올지도 모르면서 내일을 기다리고 그 다음 날을 또 기다리고 먼 미래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죠.
사람이 사람에게
- 홍신선 -
외돌토리 나뉘인 갈대들이
언저리를 둘러쳐서
그걸
외면하고 막아주는 한가운데서
보았다,
강물이 묵묵히 넓어지는 걸
사람이 사람에게 위안인 걸.
이 시를 읽는 순간 박노해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 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이 시에서는 햇볕과 얼음이 일방적으로 녹이며 방어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마주 껴안고 녹아주는 즉 서로를 포용하고 감싸주는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갈대들이 둘러싸며 그 둘의 관계를 지켜주는 모습은 참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위안일 수 있는 것은 이들의 관계처럼 서로의 마음을 상처를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시였습니다.
제 2부 눈물은 왜 짠가
눈물을 왜 짠가
- 함민복 -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 중략 >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 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자식에게 무엇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어머니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설렁탕이 짜다는 핑계로 등장한 소금을 생각해보면 눈물이 짠 이유를 알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난한 형편에 어머니를 모시지도 못하고 다른 곳에 데려다 주어야 하는 주인공의 심정,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조금이라도 자식의 배를 부르게 해주고 싶은 어머니의 심정, 주인공의 눈물은 그러한 심정을 알기에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서러운 소리를 담아 짠 맛을 내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