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무는 너무나도 오랜 세월 존재했다. 그동안 엄청나게 많은 생물이 나타났다가 멸종했고 진화했으나 도살되었다. 돌로 만든 무기로 동물을 사냥하고 무리 지어 이동하며 빠른 속도로 다른 생물을 몰살시키던 인류는 순식간에 핵폭탄과 우주선을 만들었다.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를 학살하고 자연을 파괴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면 과연 인류라는 종을 돕고 싶을까. 살리고 싶을까. 나무가 주는 생명은 은총이 아닐 수도 있다. 삶이라는 고통을 주려는 것인지도. 그러나 삶은 고통이자 환희. 인류가 폭우라면 한 사람은 빗방울, 폭설의 눈송이, 해변의 모래알, 아무도 눈이나 비라고 부르지 않는 단 하나의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것은 금세 마르거나 녹아버린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어쩌면 그저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보고 있다고. 생명체라는 전체가 아니라, 인류라는 종이 아니라 오직 너라는 한 존재를 바라보고 있다고. - P232

그러나 자기가 구한 사람들처럼 단 한 명인 목화는, 세상의 모든 사람처럼 오직 단 한 번의 삶을 살아가는 신목화는 임천자의 죽음과 장례를 지켜보며 마침내 운명을 수긍했다. 기꺼이 받아들였다. 목화가 인정하고 받아들인 이상, 온전히 자기 것으로 거둔 이상 이제 그것은 목화의 것이었다.
임천자의 단 한 명은 기적.
장미수의 단 한 명은 겨우.
신목화의 단 한 명은, 단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 P233

내가 원하는 죽음.
임천자가 수없이 연습한 것처럼 신목화도 매일 준비하고 싶었다. 멀리서 죽음의 실루엣이 보이고 차차 선명해질 때, 당황하지 않고 의젓하게 그를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 깊이 그리워한 친구를 만난 듯 진심 어린 포옹을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 육신에 편안한 표정을 남길 수 있겠지. 되살리지 않아도 좋을 죽음 또한 많이 목격했다. 목화는 그들의 마지막을 기억했으며 그와 같은 죽음을 원했다. 그러므로 남김없이 슬퍼할 것이다. 마음껏 그리워할 것이다. 사소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그것은 목화가 원하는 삶.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나무처럼 삶과 죽음 또한 나눌 수 없었다. - P238

아무튼 이모의 나무와 내 나무는 다른 나무가 맞지?
언젠가 목화는 바란 적 있다. 살아본 뒤 깨달을 진실이 부디 엄마와 같은 내용은 아니기를. 먼저 겪은 사람으로서 루나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다면, 목화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건 절대 체념이나 허무만은 아니었다. 비극이나 냉소도 아니었다.
힘들더라도 난 좋은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
루나의 목소리에서 긍지가 느껴졌다.
어쨌든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까.
그러나 목화는 먼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루나의 마음에는 루나의 신이 있다. 그리고 나갈 길 또한 있다. 목화는 루나의 말을 긍정하며 들었다. 그것이 지금부터 시작될 목화의 일이었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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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보는 이 풍경은 어때?"
그렇게 물으며 태린은 눈을 감았다.
시야가 변했다. 바다는 수많은 소리와, 움직임과, 열기와 재잘거림으로 가득차 있었다. 파도를 따라 입자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만났고, 그 표면에서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기류가 무수한 원을 그렸다. 원들이 합쳐지고 일그러지고 다시 흩어졌다. 부드러움도 날카로움도 서늘함도 따듯함도 모두 그 안에 있었다. 밤의 바다는 많은 색깔들을 품고 있었다. 온몸으로 감각되는 빛의 조각들을.
-보다시피.
그 세계는 여전히 낯설고 아름다웠다.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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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힘이란 이런 거라고 생각해요. 나의 일상이 너의 일상이기도 함을 깨닫는 것, 내 안에 갇힌 시선을 세상으로 열어서 내 고통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까지 보게 하는 것,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나의 고통을 객관화하는 것, 그래서 다 같이 잘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시가 갖는 공감의 힘이고 위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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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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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들을 좀 더 바라보았다. 물고기의 풍성한 지느러미와 꼬리가 물속에서 아름답게 출렁이고 있었다. 그래, 물 안에서 사는 존재들을 볼 때마다 이 움직임이 그렇게 아름다웠어. 그런데 이 움직임은 결국 이들의 생활이 아닌가. 이들은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일부러 춤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움직이고, 자고, 먹고, 친구들과 무리 지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달려가며 노는 하루의 생활, 하지 않으면 생이 끝나는 기본의 몸짓들이다.
내가 잠시 손 놓고 있던 생의 동작들이 생각났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비몽사몽 운동복으로 갈아입던 동작, 음악을 플레이하고 달려나가던 동작,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빵을 굽던 동작,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밑줄 그어가며 읽다가 스르르 잠들던 동작.
갑자기 좀 전에 주문해놓은 음료가 생각났다.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오니 카운터 앞 바에 음료가 놓여 있었다. 커피 위에 두껍게 얹혀 있는 생크림을 작은 스푼으로 성실하게 듬뿍듬뿍 퍼서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힘을 내서 해본 나의 아름다운 동작이었다. - P197

몰려다니는 물고기 떼를 향해 팔을 뻗으며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놀이를 하다 싫증이 난 문어는 돌연 주인공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안긴다. 비스듬히 누운 듯한 인간의 가슴팍에 문어가 안긴 채 한동안 둘은 물속에 부드럽게 떠 있었다. 연기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놀랍도록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나는 문어를 보며 예의 치통 같은 찌르르함을 또 느꼈다. 당신도 그렇군요. 각별해지고, 그립고, 좋아하는 상대가 생기면 당신도 그렇게 다가가서 만지고 싶어지는군요. 저도 그래요. 저도 정말 그래요. - P204

그렇구나. 너도 나를 좋아해서 이렇게 자꾸 나를 만지는구나.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나에게 오는구나.
나는 문어처럼 손가락을 펼쳐 개의 작은 머리통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 애의 구불구불하고 짧은 털이 고마웠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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