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의 안식처, 에르미타를 찾아서 - 스페인에서 만난 순결한 고독과 위로
지은경 지음, 세바스티안 슈티제 사진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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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빨리 읽고자 하시는 분은 아주 빠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책의 절반 이상이 사진이고, 글씨가 적힌 부분도 여백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읽기를 권합니다. 방 전체를 밝히는 조명보다는 책만 밝힐 수 있는 작은 스탠드 아래서요.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에르미타'라는 단어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온라인서점에서 '스페인'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다 알게 된 책인데요, 에르미타는 은둔지’,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 ‘세상과 뚝 떨어진 집’, ‘사막과 같이 황량함등 쓸쓸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스페인 북부 피레네 산맥 사이에 흩어져 있는 작고 소박한 건축물의 이름으로, 비단 종교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신자들뿐 아니라 세상을 등지고자 했던 사람들, 나그네들이 바람과 추위를 피해 잠시 머물며 다음 여정을 마음에 새기던 곳이기도 하다는군요.

 

이 에르미타 사진을 찍기 위해 7년째 같은 장소로 향하는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총 575채의 에르미타를 찍어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전시기획자이자 에디터인 저자가 함께하게 되죠. 둘은 4개월의 긴 겨울동안 에르미타만을 생각하며 지냅니다.

 

세바스티안은 핀홀 카메라(바늘구멍 사진기)로 에르미타를 찍습니다. 핀홀 카메라는 사진사가 뷰파인더 안에 담기는 피사체를 미리 관찰할 수 없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홀 카메라를 선택한 이유는 에르미타가 가진 근원을 표현하고 고립된 세계의 건축물이 가진 느낌을 잘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바스티안은 우울한 회색빛이 감도는 겨울에만, 거무스름한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을 때만 에르미타를 찍습니다.

 

"하늘은 내 사진 속에서 에르미타의 감정을 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세상과 뚝 떨어져 살고자 했던 당시 에르미타 사람들의 감정이 푸른 하늘처럼 화려했을 거라고 생각해?

작고 초라한 에르미타 안에서 느꼈을 그들의 외로움은 밝고 파란 하늘에서는 묻어나지 않아."

 

이게 바로 7년째 에르미타 사진을 찍는 이유입니다. 자연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다림은 몽롱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사진으로 보답을 받습니다. 구글이미지에서 'ermita'를 검색해 나오는 파란 하늘 아래 선명한 에르메타 사진을 보면 왜 기다림이 필요한지 이해가 가실 겁니다.

 

세바스티안은 에르미타 사진을 찍는 것을 "에르미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소비와 물질주의에 굶주린 현대 노예의 운명에 저항하는 조용한 혁명의 길"이라 말합니다.

 

사진으로나마 에르미타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다양하겠지만 이 책이 여느 여행에세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임은 분명합니다. 아주 천천히 다가오지만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 긴 여운을 남깁니다. 책 한 장 한 장의 여백만큼요.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기다림의 끝이 어디로 닿게 될지 우리는 절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수많은 꿈을 꿀 수는 있다.(60p)

 

어쩌면 그들(수도자)은 세상 사람들이 짊어지고 가는 삶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울지도 모르고, 우리가 모르는 차원 높은 쾌락과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반 사람들이 내는 욕심이나 과시욕, 허영이 그들에게는 그저 차원 낮은 아둔함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83p)

 

그러나 길고 긴 길을 어떻게 지날지 한꺼번에 생각할 필요는 없다. 길을 지나치며 이루어지는 수많은 만남들을 순간순간 느끼면 그뿐. (103p)

 

이렇게도 많은 것이 존재하는 이 지구와 자연, 그 속에서 우리 삶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순간을 누리고 자신의 시간에 기쁨을 더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116p)

 

이 세상에 하찮은 만남이란 없는 것이다. 이 넓고 넓은 우주 한가운데, 지구라는 작은 행성, 거기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생명들 그리고 같은 시간대를 지나는 우리를 위해 거대한 인연의 끈으로 묶인 소중한 이들. (168p)

 

이 세상 그 누구이건, 어느 곳에 있건,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지켜갈 수 있기를, 외로움과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를. (172p)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의 홈페이지( www.sebastianschutyser.com )에 가시면 더 많은 에르미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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