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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문학동네 시인선 60
강정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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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그런 말을 봤었다. 우리는 사실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거라고.

 

그렇다. 우리는 하루하루, 아주 천천히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 죽음이 아득히 멀리 있는지, 아니면 코 앞에 있는지, 걷는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걸어야 하기에 걸을 뿐. 그러니까 죽음은 날마다 우리와 가까워지는 존재다.



강정 시인은 시인으로서 죽음과 가까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음 옆에 앉아 있다고 봐야 맞겠다.


보통의 인간은 죽음과 친구가 될 수 없지만 인간 중에서 '시인'은 다르다. 그는 죽음과 친구가 될 수 있다.


 

 

조카 죽은 다음날 새벽,

제 발로 들어간 물가에 가보았다

일 센티미터 발 앞에 물을 두고 먼 데를 칩떠보았다


물의 손아귀는 죽은 자의 이빨

다 말하지 못한 진심의 차가운 호응


- <물의 자기장> 중 일부




죽음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죽음을 만지거나 그릴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시인은 언어를 이용해서 죽음을 형상화하기도 하고 그만의 죽음을 재탄생시키기도 한다.


강정 시인의 손을 거친 죽음은 우리가 생각해왔던 죽음과 다른 형태를 띄고 있다.


<호랑이 감정>에서는 비장하고, <가시 인간>에서는 기괴하면서,


또 <겨울빛>에서는 어쩐지 차갑고도 하얀 이미지까지 갖는다.


이 세상에 백 개의 죽음이 있다면, 시인은 백 개의 죽음을 일일이 들여다본다.



그의 손 위에서 죽음은 자란다. 자라서 귀신이 된다. 


죽음이 시인의 친구라면, 귀신은 시인의 또 다른 자신이거나 시인 그 자체이기도 하다.




말을 지워낸 시체의 첫 표정처럼

어딘가 어둑하나 전체로 투명한 웃음이 소녀의 입귀에 걸린다

산 초입에 대롱대롱 휘둘린 바람이 액자를 흔든다

나는 나의 밑그림을 놓친다


용을 잡아 각을 뜬 액자 속에서 바람이 불을 뿜는다

내가 살았던 시간이 노파의 비쩍 마른 몸피 속

늑골 사이 어둠이었음을 나는 아느냐


불구덩이가 된 소년의 몸속에서 소녀가 연방 웃는다

나는 다른 여자가 될 것이다


- <초벌> 중 일부




시인은 사적인 자리에서 본인이 시의 반을 쓰고, 귀신이 나머지 반을 쓴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과연 그의 시는 시인 본인과 귀신 사이를 넘나들며 묘한 환상성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의 시 속 화자뿐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도 그 세계에서 사람과 환시의 경계를 유랑한다.


<초벌>의 경우 소녀가 그렇고, <돼지우리에서>의 경우 '그'가 그렇다.

 

강정의 시에서는 특히 그러한 인물이 시의 소개를 담당하며 감상의 넓힘을 유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다에서 나온 말>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 시에서는 '창가에 서 있'는 누군가가 도입부에 등장하며 시의 분위기를 잡아주고 호기심을 끄는데, 

 

화자는 우선 이 누군가의 환상성에 주목한 뒤 그 누군가의 그림자로 시선을 옮기고,

 

시선은 마침내 화자와 누군가 사이의 '풀들'과 공간에 머물렀다가 이 세계 전체로 옮겨간다.

 

불확실한 캐릭터에서 이미지가 확실한 배경으로, 시선이 확장되면서 세계관도 넓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김진석 문학평론가는 이 시집의 해설에서 강정 시인의 시를 '부드러운 착란'이라고 논했다.

 

'착란'이 부드러울 수 있다니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강정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이 말만큼

 

그의 시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의 대부분의 시가 어떤 지점에서 '착란'의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강정 시인의 '착란'은 그 질감이 거칠거나 까끌하지 않고, 그의 단단한 세계 안에서 부드럽게 흘러넘친다.

 

 

 

도근도근,

가닿은 모든 것이 허방에서 잡히지 않는 물고기와

봄볕의 총천연색 물비늘 속에서

각자의 무지개로 어지럽게 제 뜻을 지운다

도근도근,

은 아마 눈에 오래 낀 이끼에

마음 미끄러지는 소리가 또 아니었을 것인가 싶지만 그저,

도근도근, 논다


- <도근도근> 중 일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사회에는 수많은 종류의 착란이 범람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속수무책으로 그 착란을 방치하거나 오히려 착란을 유도하기까지 한다.


그런 사회에 강정 시인이 시로써 대응하는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또다른 착란, 바로 '부드러운 착란'이다.


'도근도근'(- <도근도근>)하거나 '낮게 흐느끼는 벽'(- <소리의 동굴>)이 있는 착란이다.


지리한 착란에 익숙해진 우리는 강정 시인만의 착란을 마주하고 우리가 겪고 있는 착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부드럽게 흘러들어오는, 조용히 소용돌이치는 착란을 봤을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착란을 돌아본다.


그것은 지리한 착란의 사회에 녹아들기를 거부하고 까끌까끌한 길을 혼자 닦으며 걷고 있는 강정 시인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이자 소소한 안부의 인사이다.


착란을 모르쇠로 거부할 수는 없는 세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친 모래알 같은 착란에 익숙해지지도 말라고.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그 안에서 유영하는 착란을 새롭게 만들어내라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우리가 독자로서 그의 시를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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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삶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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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 몸에 힘을 풀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물에 뜬다는 이론 따위는 전혀 상관이 없다.

 

튜브가 없으면 계곡물에 첨벙 빠지지도 못하는 게 나라서, 

 

나는 수영을 할 줄 아는 애들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게 가끔 믿어지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내가 엄마 뱃속에서 잉태된 후 열 달 동안이나 물 속에서 있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부터 나는 이제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아야겠다.

 

나는 헤엄치는 법을 잊은 사람이라고 말해야겠다.

 

그러면 수영을 할 줄 아는 애들과 내가 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고, 그들 속에 섞이는 것 같으니까.



이종산의 장편소설 <게으른 삶>은 헤엄치는 법을 잊은 여자애가 어떤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이야기이고,


그 중에 한 명을, 헤엄칠 줄 아는 어느 남자애를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여자애 너구리, 남자애 참치, 둘 중 어느 누구도 서로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연애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나는 너를 원한다고 털어놓지 않는 연애다. 


그저 만나고, 얼굴을 마주하고, 단단하게 굳은 몸끼리 부딪히고, 그러다 가늘은 손가락을 잡는 연애다.





"난 동물보다 물고기가 좋아."

나는 대답을 하고 참치의 얼굴을 슬쩍 봤다. 여전히 담백한 얼굴이었다.

"DHA가 풍부한?"

"DHA가 풍부한 물고기가 좋지."

버스가 왔다. 나는 얼른 버스에 올라타 일 인용 좌석에 앉았다. 참치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방금 좋아하는 동물이 바뀌었어."

"무엇으로?"

"얼굴이 빨개지는 너구리로."

"왜?"

"얼굴이 빨개지는 동물은 흔치 않잖아."

버스 라디오에서 자정을 알렸다.

-44쪽





소설을 쓰는 습작생으로서 이 소설이 가장 부러웠던 부분은 짧고 간결한 문장이었다.


기름기 없이 담백한 대사, 무표정한듯 하지만 생각에 빠진 인물들.


나는 문장을 쓸 때 항상 꾸며서 쓰려고 하는 못된 버릇이 있어서 이렇게 단문을 잘 쓰는 작가들이 부럽다.


단문으로 소설을 잘 쓴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두 번 읽을 필요가 없이 한 번에 이해되는 쉬운 문장이 깊은 메시지를 담기는 어려우니까.


내가 부러운 부분은 그런 지점이다. 저 짧은 대화에서 너구리는 겁이 많지만 제가 원할 땐 가끔 대범해지기도 


한다는 점, 참치는 그런 너구리가 싫지 않다는 점, 그러니까 참치가 너구리를, 너구리가 참치를 얼마나 

 

아끼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 알 수 있다는 지점 말이다.

 

작가는 '담백한 연애소설을 쓰고 싶었다'라고 하지만, 이건 어떻게 보면 담백하지만은 않다.

 

남자애가 항상 떠날 생각만 한다고 믿는 여자애, 여자애가 가끔 없어진다고 믿는 남자애.

 

어떻게든 풀어갈 수 없이 막혀 있는 부분들. 어쩌면 이건 아주 슬픈 연애소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슬펐던 부분은, 슬퍼서 견딜 수 없었던 부분은 다른 이야기이다.

 

바로 너구리가 꾸는 악몽이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컵을 파는 가게로 들어가서 누군가와 직원에게

 

끊임없이 컵을 고르라는 권유 아닌 권유를 받지만 나는, 나는 정작 컵을 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나는 컵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을 해도, 그 말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

 

그 가게에서 나갈 수도 있었다고, 꿈에서 깨서야 생각하는 이야기 말이다.

 

뚜렷한 목표나 원하는 바 없이 남들이 하는 대로 취업 준비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꿈이고,

 

나도 그 중에 한 명이어서 더 슬펐다. 나는 이런 꿈을 꾼 적이 없어서 다행이고,

 

앞으로도 이런 꿈은 제발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연애는커녕 짝사랑도 해 본적 없는 나도 이 소설이 공감되고 좋았던 건 바로 이런 이야기 덕분이다.

 

 

 

 

돌아가기 싫어. 아래에 내 자리는 없다. 아래에만? 내 자리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있을까.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렇게 누워 있는 것뿐인데. 졸려.

-68쪽

 

 

 

 

이 소설에서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부분은, 소설 전체에서 내내 대화가 따옴표("")를 가지고 쓰이다가


마지막 챕터인 '토막들', 즉 참치와 너구리가 단 둘이서 여행을 가는 장면의 대화에서는 


따옴표가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옴표가 없는 대화가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소설을 두 번째 읽을 때에야 발견한 것인데,


그 점을 염두에 두고 '토막들'을 다시 읽으니 어쩐지 그 챕터 전체가 환상성을 띄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구리의 꿈 속 대화에서도 따옴표가 없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과연 그 챕터의 환상성에 무게가 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밝은 햇빛 속에서 모든 것이 선명했다. 반짝거리는 먼지 사이사이로 분홍빛 알갱이가 떠다녔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멈춘 듯이. 곧 멈출 듯이.

너도 그렇게 보여? 아주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 같아.

나는 무언가가 깨질까봐 조심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뭔가 평화로워.

참치가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평화롭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세상이 몹시 조용해졌다.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 있다. 여기에.

-144쪽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서로를 좋아하는 참치와 너구리가 헤어지기 전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장면은


누구나의 이별처럼 아련하고 애틋하다. 수많은 데이트 코스를 놔두고 굳이 '해양박물관'에 가는 점까지!


결국 무엇도 결정되지 못한 채로 소설은 끝나지만,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이 결말이 이 소설에게는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너구리에게, 그리고 참치에게 무언가 결정되어버린다면 왠지 그들은 더 이상


너구리와 참치가 되지 못할 것 같다. 뭐든 불확실하고,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게 너구리와 참치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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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 제3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정지향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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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녔던 대학교는 경기도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은 우리 학교가 생긴 덕분에야 겨우겨우 군에서 시로 승격된, 아주 작은 도시였다.

학교에 놀러온 다른 학교 친구는 이 도시 속의 학교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한적한 곳 한가운데에 따로 설치된 영화 세트장 같아."

친구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표현은 이 학교에게 과찬이었다.

그 학교의 일상은 영화처럼 드라마틱하지도, 스릴이 넘치지도 않았으므로.

그보다는, 정지향의 장편소설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속 '고아의 도시'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이 책이 나한테 더 가까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고아의 도시를 나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원래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의 분교였고, 

나중엔 서울의 본교로 통합되면서 본교에도 있던 분교의 과는 주르르 폐과되었다.

뉴스의 한 장면으로 스쳐지나가는 이런 일들로 인해 학교는 내가 갓 입학했을 때보다 하루하루 황량해졌다.

우리 과는 분교에만 있던 과였으므로 폐과의 위기는 면했지만 전공 수업 중 다수가 본교에 개설되면서

자취생과 기숙사생들은 하나둘씩 짐을 챙겨 통학을 택했다.

나의 본가는 도저히 통학을 할 수 없는 곳에 있었으므로 선택의 여지 없이 자취를 해야했다. 

굳이 방학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주말만 되면 고요하고 나른해지던 그 자취촌은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난다.



자연재해를 입어 폐허가 된 것처럼 텅 빈 자취촌 골목 곳곳에 편의점들만 방공호처럼 덩그러니 남아 이십사 시간 내내 불을 밝히고 있었어. 새벽이면 골목을 돌며 아이들이 내놓은 술병을 주워모으던 할아버지들도 사라져버렸어.
-14쪽
 


이렇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공간적 배경을 완벽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빨리, 더 깊게 이야기를 흡수했던 것 같다.

특히 공감이 되다 못해 소름까지 돋았던 부분은 바로 여기다.



내 방은 말이야, 보증금 오백에 월세 삼십오짜리야. 어린 왕자는 어른들이 집의 가격만을 궁금해한다고 투덜댔잖아? 그 집이 붉은 벽돌로 지어졌는지, 제라늄이 피어 있는지, 비둘기가 날아다니는지 따위엔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풍자가 통하질 않지. 지방 대학가의 오백에 삼십오짜리 자취방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정확하게 그 풍경을 떠올릴 수 있으니까.
-41쪽



나는 대학교를 다녔던 사 년 동안, 이 년은 기숙사에서 살았고 다음 이 년은 자취를 했다. 

내가 이 년 동안 살았던 그 자취방이 바로 보증금 오백에 삼십오짜리였다.

자취촌에서 약간 외진 곳에 있지만 햇볕이 잘 들어서 선택했던 그 방에서 나는 스물 둘, 스물 셋의 나이를 보냈다.

웃음도 많았고 그만큼 고민도 많았던, 그런 나이를 보낸 그 방을 약 팔 개월 뒤에 소설 속에서,

그것도 촌철살인으로 던지는 말 속에서 다시 만난 기분이란.

소설 속 화자가 더욱 반갑기도 하고, 누구라도 그 풍경을 떠올릴 만한 방에서 보낸 시간들이 떠올라서

몇 번이고 저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정말이지 내게 친근했다.

 

채 열 장을 넘기지 않았을 때 이미 소설 속 화자는 내 방 근처에서 자취하며 조용히 소설을 쓰던 동기가 됐고

요조는 술자리에서마다 곧 피디가 되면 어떤 형식의 다큐를 찍을지 지치지도 않고 설명하던 과 선배가 됐다.

민영도 그렇게 먼 인물은 아니었다. 나도 유럽여행을 갔을 때, 내가 소설 속 화자만큼의 용기가 있었다면 

페이스북 친구를 맺자고 했을 만큼 매력적인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세 명은 정말 내 주위에 하나쯤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모든 캐릭터가 어딘가에, 그것도 멀지 않은 곳에 꼭 있을 것처럼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뻔하고 진부하고 아무런 특색도 없어서, 다시 찾고 싶지 않을 것 같은 캐릭터가 될 테니까.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게, 그러면서도 누구와도 다른 매력을 가진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은 

온전히 작가의 능력에 의존한다. 예를 들면 짧은 대화로 두 사람의 성격이 바로 드러나게끔 하는 것.



-알겠다. 우리 엄마는 양호선생님인데, 나를 양호실에 온 아픈 애들처럼 대했다, 이렇게 말하면 소설이 시작되는 거냐?
-응. 좋다.
-그럼 네 트라우마는 뭔데?
-우리 엄마는 양호선생님도 아닌데, 나를 친구따라 양호실에 온 애처럼 대했다는 거.
요조가 피식거렸지.
-근데 엄마는 나한테 사과도 안 하고 죽었어.
요조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쳐다봤지. 엄마가 죽었다고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왠지 미안한 표정을 짓곤 했거든. 하지만 요조는 그러지 않았어.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어.
-33쪽



소설에서 대사가 중요한 이유는 인물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영상으로 만든다면 30초도 걸리지 않을 이 대화에서, 화자의 상처와 그 상처를 바라보는 요조의 태도,

그리고 그 태도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 화자의 성격까지 모두 볼 수 있다.

위에서 요조와 화자를 보여주는 것이 묘사라면, 아래에서 민영을 보여주는 것은 세 문장의 서술이다.



내가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는지 민영이 덧붙였지.
-나는 괜찮아. 충분히 사랑받았거든.
민영은 내게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박또박 말했어. 그애는 진심을 손에 잡히는 물건처럼 사용할 줄 알았지. 그럴 때면 의심이 많은 나 역시도 그애에게서 그것을 건네받을 수밖에 없었어.
-53쪽



이 세 명의 인물은 화자의 원룸 안에서 말 없이 표류하는 것 같지만, 이처럼 인물에 대한 묘사와 서술이 착실히

이어져서 인물마다 숨결이 생기고 눈빛이 생긴다. 

문장 하나하나를 지날 때마다, 작가가 인물에게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세 명의 청춘들에게 그만큼의 애정이 자라고, 

그들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결말까지 지켜보게 된다.

물론 그곳도 그들의 영원한 자리는 아닐 것이다. 

어딘가 한곳에 뿌리내리기에, 그들은 너무나 매력적인 가죽소파들이니까.

긍정의 의미를 가진 초록색의 가죽을 뽐내면서, 어디까지고 표류할 수 있는 게 그 세 명이니까.



우리 과의 소설 수업에서도, 딱 봐도 우리 학교 자취촌을 배경으로 우리 과 사람들을 인물로 내세운 것 같은

소설을 합평작으로 냈던 동기들이나 선배들이 몇몇 있었다.

그들의 소설은 열이면 열 혹평을 들었다. 그 소설을 합평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공간과 인물로 

그 이상의 이야기를 끌어내지 못해서 신변잡기로만 그쳤다는 것이 혹평의 주된 이유였다.

특히 나는 이런 소설을 더욱 싫어하는 편이었는데, 이런 소설들은 작가가 더 새로운 공간과 인물에 대한 연구 없이

쉽고 편하게만 쓰려고 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대학가 자취촌을 '내리'라고 불렀는데,

"그러니까 이 소설은 전형적인 내리문학이네요." 라는 게 내가 합평을 끝맺을 때 자주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내가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에 대해서 할 수 있는 한 줄의 평가는,

누구의 이야기기도 하지만 정지향이 아니면 누구도 쓸 수 없는, '최고의 내리문학'이라는 것이다.

조용한 대학가의 자취촌을 배경으로 해도 훌륭한 소설이 나올 수 있다는,

그것은 오로지 작가의 역량에 달렸다는 점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특히 작가가 나와 또래이기도 해서, 어쩐지 소설 쓰기에 대한 의지도 새삼 다지게 되는 밤이다.

여전히 내리에서 글을 쓰는 후배들과 동기들의 가죽소파는 어떤 색일지 상상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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