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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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상상력을 낳게 하는 홍보문구였다. 김중혁의 첫 연애소설.


김중혁의 캐릭터들, 하면 왠지 모르게 두 명의 남자가 떠올라서였을까. 


(김중혁의 소설 중에서 두 남자가 주인공인 소설들을 재밌게 읽어서인 것 같다.)


연애소설이라는 건 김중혁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의심보다는 기대가 컸다. 예전부터 나에게 실망이라고는 시킨 적이 없는 작가였으니까.


읽고 나서 말할 수 있는 건, 이게 연애소설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연애소설인가? 라는 것이다.


연애소설의 사전적 의미는 말 그대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소설인데,


일반적으로는 소재와 주제가 모두 그 사랑에만 치중되어있기 때문에 연애소설은 장르소설 혹은 


통속소설로 구분되곤 했다.


그리고 이 소설집을 읽고서는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만 쓰면 연애소설도 순수문학이 될 수 있다고.





보트가 가는 곳

p.218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모호할 때도 있다. 그녀가 비틀거리지 않았으면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내가 그녀의 발뒤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예를 들면 모든 게 평온하던 크리스마스이브 어느 찻집에서 그녀를 만났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가슴이 쿵쾅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내 심장은 상황과 사랑을 혼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종말을 앞두고 쿵쾅거리는 심장이 그녀에 대한 동정을 사랑으로 변질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랑은 그런 착각과 변질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에만 치중되어있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은 '그 외에는 깊은 고민이 없다'이기도 하다.


삶에 대한 통찰력까지 지니면서 사랑의 설렘과 애틋함, 슬픔까지 담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사랑에 주목하는 것이 또 삶에 대해 통찰하게 되는 길이 아닐까 싶다.


사람의 삶에서 사랑을 빼놓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너무나 외롭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니까.


그런 점에서 이 연애소설집은 인생에 대한 소설집이기도 하다.


"착각과 변질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인생에 대한.


물론 모두가 인지하고 있듯이, 사랑은 곱고 예쁘기만 하지는 않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알고 겪어본 사랑은 거칠고 삐뚤삐뚤한 형태일 것이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p.114

 

내가 우습게 보이지?

왜 또 그래?

내가 우습게 보이니까 계속 네가 그러는 거 아냐.

내가 뭘 어쨌는데?

눈빛에 다 보여. 내가 그 눈빛 때문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눈빛에서 '나가 죽어라, 주정뱅이야' 이런 말이 보여.

나 갈게. 혼자 술 많이 드시고 와. 더는 안 되겠다.

알았어, 안 그럴게, 가지마.

이러려고 나 불러냈니? 오랜만에 할 이야기 있다고 불러내서, 좀 멀쩡할 줄 알았더니, 너 똑같구나, 이규호.

알았어, 안 그럴게. 그냥 좀 안아주면 안 되냐?

뭘 어떻게 안아줘. 온몸에 가시가 돋아 있는데.

 




왜 사람이 사는 모습은 이렇게 다 똑같을까?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알콜중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누군가의 알콜중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술값을 내주고,


고작 그것뿐인 이들이 왜 이렇게 평범한 연인으로 보이는 걸까?


또 나는 왜 알콜중독에 걸려본 적도, 다른 사람의 술값을 내줘본 적도 없으면서


남자의 구차함에, 여자의 지리함에 이렇게 공감하게 되는 걸까?


사람의 삶이라는 건 모습은 제각기 달라도 결국 본질은 같아서,


어떤 소설이든 나의 이야기와는 달라도 삶을 관통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건 결국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 같다.


나에게도 사실 가짜 팔이 있고, 나는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 어떤지 알고 있다.





요요

p.298

 

차선재는 장수영이 걸어가는 모습을 한창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다. 쌓여 있는 말이 많아서 그걸 꺼내놓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못했던 말을 하기 위해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하지 못한 말이 더 쌓이고 말았다. 높이 쌓아올린 책더미에서 밑바닥과 가운데 책을 꺼내기 힘들듯 오래전 얘기를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 얘기를 꺼내려면 한 줄로 쌓인 모든 얘기를 허물거나 위에 쌓인 이야기를 전부 걷어내야 한다.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남아 있을까. 그 이야기들을 꺼낼 만한 시간이 다시 올까.





항상 그랬다. 할 말은 많았고, 시간은 부족했다. 시간이 있을 때는 말을 들을 사람이 옆에 없었다.


언제든, 누구에게든, 무슨 일에서든 미련과 아쉬움이 남는다. 


각기 다른 색깔과 모양을 가진 미련과 아쉬움들을 굴리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연애소설은 한 가지 결론으로 귀결된다. 나에게 소중한 인연에게 잘하자.


그냥 잘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자.


아무리 잘해도 후회는 남기 마련이니까.


역시 작가답게 기발한 아이디어로, 소설 속 인물들을 아주 사소한 역할이라도 일일이


거론하여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작가의 말도 웃음 뒤에는 생각할 거리들을 남긴다.


<픽포켓>의 호텔에서 일하는 송진구 후배도, <뱀들이 있어>의 정민철과 데이트했던 여자 1,2도,


표지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두 자신 인생의 주인공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인연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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