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법칙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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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의 표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끔 표지가 소설의 주제를 보여줄 때가 있어서.


이 책의 표지는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표지 중에 하나다.




 




하얀 종이 위에 연필로 그려진, 차분히 감겨 있는 눈.


나는 이 눈을 가진 사람이 잠들어 있는 건지,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심지어 살아 있는 건지 죽어 있는 건지조차 말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는 일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종이 위에 그려진 모습만 보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





Chapter 12

p.101

 

어떤 때는 하도 생각을 많이 해서 이미 그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실제 일어난 일과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을 구분하기 힘들 때도 있었다. 미래의 시간인데 과거의 일처럼 여겨졌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그려보는 게 아니라 일어난 일을 되새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일에 대한 상상은 구체적이고 명확하며 세부가 뚜렷했다. 알려진 사실이나 자명한 인과가 아니라 추측과 비약에서 비롯된 것인데도 그랬다. 논리도 타당성도 없는 것이 깊이 파고들어왔다. 윤세오는 이미 그것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설의 두 축, 신기정과 윤세오는 각자의 세상에서 각자의 혼란을 겪는다.


그들이 겪는 혼란은 어지럽고 떠들썩한 카오스가 아닌, 밑도끝도 없이 하얗기만 한 백야다.


눈을 떠서 주위를 봐도 이곳이 위인지 아래인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알 수 없어서


손을 뻗어 더듬거리며 한 발짝씩 내딛어야 하는 백야. 이 책의 표지만큼 깊고 넓은, 하얀 밤.


신기정은 이복동생 신하정의 죽음을 알기 위해 여러 정보를 모으지만 어떤 확신을 얻지는 못한다.


그녀가 모은 정보는 종이에 그려진 그림과도 같기 때문이다. 




Chapter 23

p.200

 

신기정은 서울에서 약 삼백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거리만큼 동생의 시신을 확인한 때로부터 시간이 흘렀다. 그간 윤세오라는 이름과 부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동생이 지내던 고시원에도 가보고 윤세오 방에 몰래 들어가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동생은 미궁 같았다. 알수록 더 검고 깊은 구멍이 생겼다.

 

 




모든 것은 눈으로 대면하고 살갗을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보아야 명확해진다.


그녀가 그녀의 동생을 알기 위해 대면할 수 있는, 살갗을 만져볼 수 있는 상대는 윤세오였다.


신기정이 윤세오를 찾아간다. 이 짧은 문장이 이 소설의 스토리, 혹은 플롯이라고 해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만남 자체가 아닌, 신기정이 윤세오를 '찾아가는 길'에 있다.


친동생도 아닌 이복동생, 자매로서 아주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는 동생의 죽음으로


신기정은 "스스로는 대답이 불가능한 질문들을 계속해서 던"지게 된다.


그동안 원치 않는 삶을 타의로 인해 '연기'하면서 살아온 그녀에게 이 사건은 첫 파동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결국, 하나의 점으로 살았던 사람이 그 파동으로 말미암아 다른 점들을 만나면서


하나의 선이 되는, 그리고 그 선이 무수히 그어져서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이야기다.





Chapter 14

p.119-120

 

신기정은 부이라는 이름을 여러 번 소리내어 불러보았다. 동생의 이름을 쓰고 그 옆에 부이라고 적은 후 각각의 이름을 동그라미로 둘러쌌다. 둘러싼 동그라미를 선으로 이었다. 하부라인과 상부라인의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윤세오의 이름을 적고 세 개의 이름을 각기 감싼 동그라미를 가능한 방향으로 연결해보았다. 맨 처음 동생이 있다. 그다음 윤세오, 그리고 부이. 순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어디로 선을 긋건, 윤세오-동생-부이로 연결되는 선이건, 동생-부이-윤세오로 이어지는 선이건,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과정을 따라가고 함께하면서 독자는 여러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부이부터 조미연, 이수호, 김우술, 신재형까지. 세상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하고 소소한 사람들.


그러나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드라마보다 슬프고 영화보다 애처로운 사람들.


신기정이 윤세오를 만나야 하듯이, 우리는 그들을 만나야 한다. 만나서 알아야 한다.


세상은 종이처럼 하얗고 얄팍하지만 한 톨의 점만큼 소소한 사람은 다른 한 톨의 점 같은 누군가를 


만나 선이 되고, 뭔가를 그려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비록 세상 밖의 타인에게는 알 수 없는 그림일 뿐이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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