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사가 끝난 뒤
함정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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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다닐 때 들었던 비평 수업 하나가 생각난다.


중간고사로 그 해 이상문학상 작품집 소설들을 달달 외우게 하는 수업이었다.


랜덤으로 몇 문장을 가져다놓고 사이사이에 뚫린 빈칸을 채우게 하는.


함정임 작가의 소설을 그 시험으로 처음 보게 되었다. <기억의 고고학 -내 멕시코 삼촌>이라는 소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뒤 이 소설을 함정임 작가의 소설집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소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달달 외우기 위해서 읽었던 그때와는 또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춘아 고모의 외로움과 서글픔, 그런 춘아 고모를 생각하는 '나'의 그리움과 아련함까지.


생각해보면 삼 년 전 소설을 외우면서 기계적으로 읽을 때에도, 소설 전체에 녹아든 아련한 분위기는


진하게 느꼈던 것 같다. 나에게는 이런 고모가 없는데도 어쩐지 나까지 아련해진 걸 보면.


춘아 고모의 애인이 멕시코 사람이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베사메, 베사메 무초 노래가 나와서였는지도.


그 수업의 교수님은 수업 시간에 이 소설에 대해 강의하시면서 베사메 무초를 틀어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소설을 베사메 무초의 노래가 흐르는 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이 소설이 소설집의 가장 첫 번째에 있었던 게 나에게는 다행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이 소설집이 조금 더 친근했고 서술자, 그리고 서술자 뒤의 작가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첫 소설의 분위기가 토속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이국적이었는데, 그러한 이국적인 분위기가


그 뒤의 소설에서도 계속 진행되어서 좋았다.


여행을 다녀온지 반 년도 되지 않았는데 늘 여행이 그리운 나로서는 


그런 분위기의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 간접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니까.


특히 정말 여행을 소재로 하고 있는 소설들이 그랬다.





<어떤 여름>

p.84

 

나는 여자가 다시 책 속에 파묻히기 전에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자신도 니스에서 내린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꽉 막혔던 답답한 기분이 홀가분해지며 야릇한 쾌감에 사로잡혔다. 내친김에 앞으로의 일정을 물었고,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프랑스의 몇몇 호텔들을 여행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도시들이 아니라, 호텔들이라고요? 그녀의 영어는 완전하지 않았지만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주로 짧게 대답해서 자칫 비약으로 오해가 있을 수 있어 확인이 필요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곤, 가방에서 빨간색의 아주 작은 수첩을 꺼내더니 순순히 나에게 보여주었다. 시테아 브장송, 보졸레의 레 마리톤느 호텔, 리옹의 콩코르드 호텔, 그르노블의 유럽 호텔, 엑스레벵의 엑스 오리앙탈 호텔, 안시의 임페리얼 팰리스 호텔, 스트라스부르의 메종 루주 호텔, 랭스의 카테드랄 호텔, 파리의 르 세나 호텔…… 그녀의 수첩에 적힌 목록을 대충 훑어보니 프랑스 중동부 부르고뉴에서 북동부 샹파뉴까지 올라가 다시 파리로 내려오는 여정이었다. 호텔업과 관련이 있는 일을 하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살짝 예의 그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연애칼럼을 쓰신다는 분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소개팅에서 할 만 한 좋은 대화 중 하나는 여행에 관한 것이라고.


여행은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상상력을 일깨워주고, 동시에 서로의 호감을


높여준다고.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여행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사람을 낭만적으로, 긍정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함정임 작가는 이러한 여행의 이점을 소설에서 최대한 활용한다.


판타지 없이도 인물이 환상을 겪도록, 사진첩 없이도 인물이 과거를 떠올릴 수 있도록.


덕분에 그녀의 소설들은 현실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환상적이다.





<구두의 기원>

p.141-142

 

"마을로 들어서자 멀리 성成이 보였다. 마을은 성으로부터 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왼편 고원 위에 있었다. (중략) 알프스 산록의 이 고원 마을에서 스페인 국경지대인 페르피냥까지는 오백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였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몽펠리에나 세트에 도달해, 해변의 묘지 입구에 있는 포구에서 점심식사를 주문하고 있어야 했다. 한겨울 창공을 꽉 채우고 있는 빛살이 압박감을 주었다. 나는 갑갑함을 느꼈다. 세 시간 전의 돌발 행동에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자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다. 마을 입구에서 발길을 돌려 자동차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때, 정적을 깨고 아이들의 함성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이 소설집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땐, 왠지 모르게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피곤하고 몽롱하면서도 내가 다녀온 여행지가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그런 상태.


여행하는 동안 정말 행복했던 프랑스와 스페인, 


아쉬움이 많이 남아서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이탈리아,


내가 지금 제일 가 보고 싶은 나라 중에 하나인 미국의 뉴욕과 로스앤젤레스까지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긴 여행을 마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가장 많이 떠올리게 되는 건,


그런 이국적인 분위기가 가장 덜했던 <저녁식사가 끝난 뒤>였다.


추모하지 않는 것으로 추모를 한다는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추모라는 건 조용히, 소소하게, 행복한 마음으로 할 때 진실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순남씨 혼자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결말도 소소하게 귀엽고 아기자기했다.


무엇보다 그 일을 이상하게 여기는 순남씨에게 남편이 한 말이 명대사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

p.52

 

"모두 당신처럼 기다리다 놓친 거라고 생각하지 않소? 그리고 기다리다 놓치기도 하는 거요. 그게 무엇이든…… 난 그게 더 나을 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 말을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건, 우리 사회에 추모할 일이 너무 많아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들도 많고, 놓쳐서 계속 아쉬워하는 것들도 많고.


놓친 걸 아쉬워하고 있다가 다른 중요한 걸 놓치고, 그것을 다시 아쉬워하기를 반복했다.


이 소설은 나에게 그러지 말라고 다독거려주는 것 같다. 얼마쯤은 놓쳐도 된다고.


그래서인지 이제 아쉬워하는 걸 그만두고 진심으로 어떤 것을 추모하고 싶어진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러했듯이, 역시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내가 추모하고 싶은 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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