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틱한 찰리 문학동네 시인선 68
여성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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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은 짧고 강렬하다.



톰과 찰리와 스티븐에게

이제 우리 서로를 증오했으면 해

고맙고 사랑하고 지겨우니까




지금의 우리에게는 누구든 톰이 될 수 있고 찰리가 될 수 있고 스티븐이 될 수 있다.


고맙고 사랑하고 지겨운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책장을 넘긴다.


1부의 제목은 <보라색 톰>이다. 어쩐지 황순원의 <소나기>가 떠오른다.


소녀가 입은 보라색 스웨터는 우울을 상징하고 나아가 소녀의 죽음을 암시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사실은 작가가 보라색을 좋아해서였다. 지금은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보라색을 보면 오해, 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눈을 가린 편견, 그릇된 단정들.




 

보라색 톰

p.18

 

보라색 톰, 이라고 적으려던 것인데


그것은 심장 대신 몸의 안쪽에 걸어놓은 모자이거나 매니큐어를 싣고 가는 군함


네가 앓는 병에 매니큐어의 이름들을 붙일 수 있다면 주황이나 귤색이라는 병명을 적고


즐거운 환자가 될게 병실 옆에서 보라색 톰을 팔게

 

 




1부에서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무언가가, 그것이 전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타일들>의 타일은 "가지런하고" "아름답"고 "두 발이 빛나"게 해줄 수도 있지만


"타일 하나가 깨지"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박동소리"와 "발이 타일을 깨고 나가는 소리"와 "아픈 발의 증언"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앨버트>의 앨버트는 앨버트 아인슈타인인지 앨버트 까뮈인지 확신할 수 없고


<스미스 부인>의 스미스 부인은 스미스의 부인인지 웨슨의 부인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오해와 혼돈을 지나 2부의 제목은 <에로틱한 찰리>다.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건지 이 시집에서 가장 시인 자신에 가까운 시로 보이기도.




에로틱한 찰리

p.60

 

나는 찰리를 생각한 내가 찰리이고 누구인지 몰랐던 찰리는 찰리 a이며 지금의 찰리는 찰리 b라고 구별한다 문제는 찰리에 대해 생각하자 찰리가 떠났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찰리 a에 대해 생각했고 그러자 찰리 a는 찰리 b가 되었고 찰리는 빌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 세계를 잠시 해체하는 것 같은 느낌이 찰리와 빌리 사이로 지나갔다 나는 그것을 에로틱한 각성이라고 적어둔다 여자가 플룻을 가방에 도로 넣는다 플롯은 숨어 있다

 

 




혼돈은 계속된다. 찰리 a와 찰리 b 사이에서, 찰리와 빌리 사이에서, 플룻과 플롯 사이에서.


플룻은 가방에 들어갔고 플롯은 숨었으니 과연 이 시의 도입부처럼, 


"찰리가 에로틱해도 되는" 건지조차 알 수가 없다. 찰리와 빌리 사이로 지나간, "세계를 잠시 해체하는


것 같은 느낌"이 에로틱하므로 찰리가 에로틱할 수 있는 건지.


이 카오스를 지나 도착하는 마지막 3부의 제목은 <모호한 스티븐>.


'모호하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서 알쏭달쏭한 말이나 성질'이다.


사실 단 한 가지로만 해석되는 것이 세상에 있을까? 그러고 보면 우주의 모든 것이 모호한 게 아닐까.


신기하게도 <모호한 스티븐 1>은 <모호한 스티븐 2>보다 뒤에 있다.


독자는 <모호한 스티븐 2>를 먼저 만나고, <모호한 스티븐 1>에서 <모호한 스티븐 2>를 다시 본다.




<모호한 스티븐 1>

p.111

 

스티븐은 스티븐 밖에서 잠을 잔다 가령 스티븐의 모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스티븐은 스티븐의 모자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스티븐의 모자는 스티븐을 덮지 못한다 (…) 스티븐의 아내가 하얀 접시들을 펼친다 스티븐은 집중해서 본다 식탁 위 접시들을 아내가 배열하는 표정을 스티븐이 일어나 접시들을 밀어버린다, 어떤 표정을 밀듯, 스티븐이 난간에서 춤을 춘다 사라져봐 스티븐 떨어봐 스티븐 두번째 표정에서 스티븐은 모호하다



<모호한 스티븐 1>의 스티븐은 <모호한 스티븐 2>에서 더욱 무기력하고 나약해진다.


접시를 배열하던 아내는 죽고 아직은 그녀를 사랑하고 머릿속에서는 "어떤 총알"이 평생을 날아가고


그 앞에는 "쓰러진 스탠드"와 "두통약들"이 있다. "거리를 날아가는 녹슨 새"도.


이 두 편은 영화 <박하사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의, 조금은 달랐던 과거.


하지만 과거에서나 현재에서나 여전히 스티븐은 모호하므로 스티븐은 모호한 스티븐일 뿐.



마지막에는 다른 오해를 낳을 '보라색 톰'과 에로틱한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에로틱한 찰리'와


여러 가지로 해석되기 때문에 모호할 수밖에 없는 '모호한 스티븐'의 집이 저문다.




저무는, 집

p.114

 

달은 나무에 찔려 저물고 꽃은 꿀벌에 찔려 저물고 노을은 산머리에 찔려 저무네 저무는, 집은 저무는 것들을 가두고 있어서 저무네 저물도록, 노래를 기다리던 후렴이 노래를 후려치고 저무는, 집에는 아직 당도한 문장과 이미 당도하지 않은 문장이 있네 다, 저무네


오늘이 저문다는 건 내일이 올 거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내일은 톰이 다른 색깔을 갖게 될지, 찰리는 더욱 에로틱해질 수 있을지,


스티븐은 하나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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