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고향」의 말미에 적어둔 루쉰의 이 말을 "명랑한 언설로 앞길의광명을 생각하며 걷기 시작하는 자들의 구령처럼 인용하는 예가 많다고 나카노 시게하루는 지적한다. 하지만 그것은 읽는 이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희망은 없지만 걷는 수밖에 없다. 걸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희망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루시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이야기한다. 암흑을 이야기한다. - P108

하지만 나카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견인불발의 중국 혁명가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략) 여기서 희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짙은 어둠과, 어둠 그자체에 의해 필연적으로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한 실천적희망과의 살아 있는 교착, 교체를 ‘문학적‘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루쉰의 정치와 문학의 결합을 나카노 시게하루는 "서정시형태의정치적 태도 결정"이라 부른다.

거기에 거의 서정시 형태로 된 그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 있었다.(중략) 루쉰의 문학이 문학으로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이러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에 있다.

시란 무엇인가?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란 무엇인가? 지금도 나는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길이 그곳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걷는다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않는다는 태도가 아니다. 효율이라든 - P109

가 유효성이라든가 하는 것과도 무관하다. 이 길을 걸으면 빨리 목적지에 닿을 테니 이 길을 간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요컨대 이것은 승산의 유무나 유효성, 효율성 같은 원리들과는 전혀 다른 원리에 관한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언어이며 그것이 서정시다.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절망‘을 말할 때도, "이런 짓을 해봤자 아무런 희망도 없어, 절망이라고 하는 것과, 루쉰이 말하는 ‘절망‘과는 같은 단어이지만 쓰임새가 전혀 다르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의 말에서 절망밖에 읽을 수 없건만, 그럼에도 읽을 때마다 이렇게 느낀다고 말한다.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어떤 일이 있어도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지 하는 것 이상으로 (중략) 일신의 이해, 이기(利己)라는 것을 떨쳐버리고, 압박이나 곤란, 음모가들의 간계를 만나더라도 그것을 견뎌내며 어디까지나 나아가자, 고립되고 포위당하더라도 싸우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곳으로 간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숭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 P110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루쉰이라는 중국의 시인을 만나, 한 사람의 일본 시인 나카노 시게하루가 감동을 받았다. 여기에 동아시아 근대사 속의 만남이 지닌실낱같은 가능성이 엿보인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 사회에 나카노가루쉰으로부터 배운 것을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이가 존재할까? 큰 의문이다. 전후 한 시기에 보였던 그런 ‘가느다란 가능성‘은 이제 소멸의 낭떠러지에 있다. - P111

시인이란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그렇다면 시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컨대 이것은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효율적인지 아닌지, 유효한지 어떤지 하는 이야기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내가 뭔가를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네는 너무 올곧고래가지곤 이길 수 없어"라든가 "네 주장을 받아들이게끔 하려면 즐더 부드러운 말투를 써야 해"라고 조언을 해준다. 고맙긴 하지만이는 틀린 말이다. 승산과 유효성에 관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게아니라,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존재하는 루쉰에게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이렇게 살겠다‘, ‘이것이 진짜 삶이다‘라는 무언가를 드러내야만 한 - P154

다. 시인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한국도 일본 못지않게 사회가 양극화되고 격차가 심해지는 까닭해, 일부 재벌이나 부유층은 기세가 등등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고통듣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경쟁사회로 내몰리고 있다. 한국 인구•는 일본의 절반 정도이지만 자살자 수는 일본을 웃돌 만큼 많다.
"상처 입고 소외된 사람들"은 정희성의 말이다. 한국에서도 "상처 입고 소외된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하는 것이 시인에게 부과된 커다란 과제다. 1970년대, 1980년대 같은 피투성이 잔치는끝났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언제 되살아날지 모르지만......) 하지만 시인은 지금 눈앞에 있는 현실을 노래할 방법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물론 옛날과 같은 가락으로 같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지금 이 상황 속에서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노래해야만 한다. 그것이 시인의 소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도 똑같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이 사회에 소외되고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지금이 시대가 시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요구하고 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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